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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글/무지의 구름

[스크랩] 無知(무지)의 구름

by Andrew Y Lee 2007. 5. 4.

<!-by_daum->< 無知(무지)의 구름 >

먼저 이 글은 '무지의 구름'이라는 책의 내용을 어느 정도 요약하여 소개해드리는 것임과 아울러 이 내용이 기독인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제목 : 無知(무지)의 구름
저자 : 클리프턴 월터스

옮긴이의 말 : 이 책은 영국 교회에서 고전으로 손꼽히는 신심서 가운데 하나로 어쩌면 모든 신심서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인 '토마스 아켐피스'가 1400년대 사람이라면 이 책의 저자는 그보다 이른 1300년대의 신비가 중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태동한 이 관상서 '무지의 구름'은 주도권이 늘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영혼은 그분의 은총이 있어야만 그분을 관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 완전히 보이지 않고 완전히 어두컴컴한 바로 그 無知(무지)야말로 이승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앎이요 풍성한 신적 빛에서 비롯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관상 생활은 바로 무지의 앎, 보이지 않는 봄, 감지되지 않는 현존으로서 ...

... 그대의 마음이나 의지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 관한 지식과 느낌 일체를 제압하고 망각의 구름 아래로 버려야 한다. 그대의 마음과 의지에 출현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싫어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갖 형태의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지식과 체험을 짓밟되 무엇보다도 우선 그대 자신에 대한 지식과 체험부터 짓밟아 버려야...

... 설령 사람이 일찍이 창조된 온갖 영적 사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통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이해력만으로는, 유일하게 창조되지 않은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해력에 한계를 느끼고 이제 그 이해력을 벗어버리려 한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해력을 제한하고 있는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성디오니시오는 '하나님을 아는 가장 신적인 지식은 무지(無知)를 통해 알려진 지식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

모든 마음이 당신께로 열리고
모든 의지가 당신께 이야기하고
어떤 은밀한 것도 당신께는 숨기지 못하옵기에

청하오니
당신 은총이라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선물로
제 마음의 지향을 정결케 하시어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고
합당하게 찬미하게 하소서
아멘

* 여는 말

사랑으로 가능한 힘과 능력 전체를 빌려 그대에게 간청하거니와 이 책을 자신이 소유하거나 보관하거나 전달 중이거나 빌렸거나 간에 그대가 누구든 만약 이 책을 가지고 있거든 누구에게 읽어주지도, 글을 써보내지도, 말하지도 말며 누가 읽거나 글을 쓰거나 언급하도록 허용하지도 말라. 혹시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대가 판단하기에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진심으로 확고하게 다짐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비단 활동 생활로도 그리스도를 따라야 할 뿐 아니라 사멸할 육체 안에 깃든 영혼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도달할 수 있는 더없이 드높은 관상 생활로도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다짐해야 한다. 또한 그는 그대가 평가하기에 자신의 활동 생활을 통해서 오랜 기간 동안 관상 생활에 도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아가 사랑이 부여하는 권위를 빌려 그대에게 당부하고 또 간청하노니 누군가가 이 책을 읽고 글로 쓰고 언급할 경우나 아니면 남이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듣는 경우에 그대는 내가 그대에게 하듯이 그에게 아무쪼록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고 말하고 쓰고 들으라고 당부하기를 잊지 말라.

왜냐하면 이 책의 첫머리나 중간부분에 전후 문맥으로 보아 충분하게 설명되지 못한 채 막연한 상태로 넘어간 몇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그 자리에서 즉시 해결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바로 뒷부분이나 이 책 끝 부분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사람이 문제를 부분적으로만 보면 자칫 오류를 범하기 쉽다. 따라서 그대가 다른 사람들이나 이런 오류를 피하자면 사랑에 대고 호소하거니와 부디 내가 말하는 대로하라.

설령 소란꾼이나 아첨꾼, 허풍쟁이, 잔소리꾼, 험담꾼, 수다쟁이, 고자질쟁이나 이런 저런 불평꾼들이 이 책을 보지 않는다 해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그저 호기심뿐인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로 관상에 마음이 끌리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진정한 관상가들처럼 지속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때때로 관상의 심오한 일들을 흔연한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사람들, 만일 이런 사람들이 이 책을 볼 경우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많은 영감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 서론

침묵기도는 소리기도보다 더 높은 단계로 간주된다. 침묵기도는 묵상과 동일하다. 묵상은 어떤 진리나 성서 구절을 두고 하는 의도적, 통상적 성찰을 말한다. 묵상의 3대 목표는 마음을 뜨겁게 데우고 의지를 움직이고 정신을 교화하는 것이다. 묵상에는 지적 요소가 있어 정신을 기도의 통로로 안전하게 이끌어가지 않는 한 묵상은 한낱 정신 작용 곧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설교로 전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래서 묵상의 모든 체계는 정신을 설교가 아닌 기도로 끌고 가야 한다는 주의가 필요하다.

묵상은 기도 생활의 기초 단계로 하나님을 배우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통로가 된다. 그러나 정신이 일단 하나님의 일에 충분히 교화되고 마음이 쉽게 그분께로 향하게 되면 묵상은 사실상 필요 없다. 아니 심지어는 방해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영혼은 더 이상 이런 초보적인 수련에 의하지 않고 곧바로 친교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결 심화된 교통 속에 들어가면 이전 단계에서 누리던 자유로움은 사라지는 경향이 있으며 때로는 간단한 구절들을 반복함으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게 된다. 이는 서로를 사랑하는 남녀가 처음에는 할 말이 많은 법이지만 그 단계를 지나면 서로를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미진하여 말은 갈수록 함축성이 있고 의미는 깊은 짤막한 구절로 대화할 수밖에 없고 현란한 수식어도 줄어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실이나 진실도가 저하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도 이와 같이 갈수록 단순해져 영혼은 마침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고 말수는 점점 줄어든다. 기도의 이 단계를 애정적 단계라 하는데 이 때는 애정이 감성적인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아서 말수가 적고 영상이 진하지 않으며 건조하여 자신의 기도에 대해 삭막하고 고독감을 느끼며 적이 당황할 때조차 애정이나 사랑은 사실상 식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단계가 일반적으로 신비기도의 출발점으로 간주된다.

이 때 영혼은 스스로 아는 것 일체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한다. 이미 너무 가까이 그분께 다가가 있기에 평소의 정신 상태로는 그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여 한동안 정신이 그 상황에 맞도록 조정되도록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마치 수신되는 신호음이 너무 강한 나머지 정신이 수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는 당장, 또는 한 동안은 되지 않는다. 이 때의 영혼은 하나님말고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기에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황량함과 당혹감의 고통스런 시간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바라기만 하고 감지하지 못하는 이 답답한 상황의 고통은 오히려 하나님과 자신 사이를 가로막는 일체의 것들을 제거해주는 귀중한 시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일체의 상념들 나아가 선한 상념들까지 버리지 않으면 그 최종 목표가 되는 하나님 한 분만을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오감의 밤'이라 불리는 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을 얻기 위해 인간 편에서 나온 모든 감정과 지식이 닫혀지고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한결 분명하게 주도권을 잡고 통제력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상태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이끌림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우리 마음과 지식과 정신이 주체가 된 상태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우리의 열심은 언제나 그분의 은총과 자비 아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고통의 밤은 하나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영혼이 순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시는 만큼 언제까지나 지속된다. 여기에는 때로 영혼이 강도 높은 정화를 거치면서 자신이 철저히 무가치하고 또 자신의 지식, 정신, 감정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 이윽고 오로지 그분 자신만을 생각해서 섬기고 사랑하기로 분명하게 결심하는 영혼의 밤이 뒤따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순간이 어둠의 밤인 것은 아니고 시시때때로 빛의 순간들도 뒤따르지만 전 과정을 통해 본다면 영혼은 자제력을 잃고 참을성을 잃어버려 중도에 뒤돌아 서기도 한다. 이 때가 기도의 생활에 참으로 위기의 순간이다. 밤이 최고로 어두운 때조차 영혼은 하나님을 더욱 확신해야 한다. 이 때의 영혼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삶 속에서 추구해야할 것도 없는 허무감 가운데 처하게 되나 이 모든 것 이면에는 하나님만을 감지해야 하는데 이 엄청난 갈증은 필연인 것이다.

이론가들은 이 때를 가리켜 이미 하나님을 발견한 것처럼 보는 경향이 있지만 영혼은 실제 이 상태에서 아주 선명하거나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발견한 것이 없다. 그저 신음과 괴로움만 있을 뿐 열망에 찬 기대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꺼지기를 거부하는 희망만 남아있을 뿐이다. 영혼은 글자 그대로 자신을 이탈한 채 거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붙잡혀 있어 그 힘에 농락 당하고 있는 처절한 기분마저 느낄 뿐이다. 그러나 영혼이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을 하시되 영혼의 의지를 좇는 것이 아니고 명령권을 지니고 당신 뜻대로 하시는 것이다. 외관상으로 보면 영혼이 응답 받는 기간이 얼마나 소요되는가에 따라 이 시간의 개념을 따져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에 그 기간의 주도권은 있는 것이며 또 제 아무리 오래 지체되더라도 필연적으로 결과는 나오게 되어 있다.

그 기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현존이 어렴풋이 감지되면서 이어 무한정의 결실이 눈에 보이지 않게 맺혀지고 영혼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이루 형언할 수 없고 황홀하기 그지없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시는 손길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어떤 언어를 사용해도 부적절하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탈혼의 순간'이라 부르는 시간인 것이다. 이 경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또 그분의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원하시는 방식대로 체험되기에 사람마다 일정하지 않아 예측하기 힘든다. 따라서 영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의 이런 역사의 총화를 어떻게, 언제, 어느 만큼 아느냐 까지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 채 기쁨이든 어둠이든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하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최선책이라 여기는 수밖에 없다. 관상은 애당초 하나님의 일이요 우리의 몫은 이에 의지로 응답하는 일이다. 지성으로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 영적 위로는 있을 수 있으나 찾아 나서서는 안되며 오히려 이에 무관심해야 하고 심하게 말하자면 의구심까지도 일으켜야 한다.

하나님을 관상하는 일은 인간의 의지에 기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하는 것이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 열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관상에 필요한 최대의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합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은총뿐이다. 이는 우리 신앙의 주된 원리를 인간의 노력에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둔다는 말과도 같다. 무지의 구름을 걷을 수 있는 관상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관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시작해야 한다.

관상의 수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는데 인간의 이런 능력조차 하나님의 은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를 향한 열정에 불을 지피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인간의 본성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은총은 인간의 의지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영으로, 사랑으로, 자신과 합일을 이루도록 당신의 과업을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은총의 덕분인 것이다.

이 관상은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시는 영혼 안에서 그 영혼의 공적과는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이루시는 그분 혼자만의 작품이다. 그러므로 어떤 힘이 우리를 제 뜻대로 이끌도록 자신을 맡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정신은 여기에 끌려가 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스스로 제 힘을 발휘하려 하면 그만큼 방해만 받을 뿐이다. 하나님의 힘이 우리 안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우리 의지는 순순히 따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나무가 되고 그 힘은 목수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집이 되고 그 힘은 집주인이 되야 한다. 우리는 기꺼이 소경이 되어 '왜' 또는 '어떻게' 등의 의문사를 접고 알고 싶은 욕망을 버려야 한다. 이는 아는 것이 도움을 주기보다 방해가 될 공산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것이 우리를 다정하게 이끌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이 내적 충동 속에서 하나님보다 못한 그 어떤 것, 즉 그에게서 나온 어떤 선한 것이라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우리 의지의 갈망은 줄곧 그분께로만 향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이 관상 기도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인간의 의지나 기대를 초월한 임의적인 것이지만 역으로 이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전혀 불가항력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협조가 반드시 따라야 하며 이 협조 없이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관상으로 끌어올리지 못하신다. 인간이 이 같은 특전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전에 독서와 묵상, 기도로 채비를 갖추기 마련이고 하나님이 부르심이 있을 때쯤에는 이미 삽질은 되어있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간의 '적나라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적나라한 의지'라는 말은 그 뜻을 묘사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이것은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열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각오 때문에 설령 마음이 잠시 인간적인 기쁨에 휩싸일지언정 열망은 이것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변함 없는 강도로 하나님을 지향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해 뻗어 가는 적나라한 의지 외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열망 속으로 아예 흡수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확고한 이 의지를 결코 꺾어서는 안 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자리하는 이 무지의 구름에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날려야 한다. 하나님보다 못한 것에 대해서는 그 어떠한 것이라도 생각을 주어서는 안되고 이 목표를 벗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야 한다. 이런 뜨거운 사랑은 수련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확보되어야 한다.

일단 사랑이 확보되면 영혼은 하나님께 다정히 매달릴 수 있게 된다. 사랑은 관상의 열쇠를 쥐고 있다. 하나님은 지성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분을 사랑할 수는 있으나 생각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으나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관상에는 사람이 지적으로 공백상태가 되고 이 무지의 공백 또는 무지의 구름 속에서 사랑을 내뻗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영혼은 원래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께만 오로지 집중해야지 그분의 속성이나 그분의 좋아하시는 일들을 생각하게 되면 관상의 순도는 떨어지게 된다.

그토록 더러운 죄를 떨어버리기 위해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되새겨보거나 하나님에 관한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으로는 목적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이 사랑만이 영혼에서 죄를 완전히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낮 동안에는 밤이 찾아들 수 없듯이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는 죄가 발붙이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것이야말로 죄의 토대와 뿌리를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하나님을 향한 이런 불타는 사랑은 모든 성스러움의 근원이 되고 아울러 겸손과 자애를 영혼에 심게 된다.

이런 사랑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있다. 그녀가 한결 더 애처롭게 슬퍼하고 간절하게 열망하고 애절하게 한숨짓고 정말로 금방 죽어버릴 것처럼 번민했던 것은 하나님을 한결 더 사랑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그녀가 자신의 죄를 되새겨보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녀는 벌써 깊이 사랑하고 있으면서 더욱더 사랑하고 싶어했다. 마리아의 죄를 사함 받도록 만든 것은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이 사랑이 그녀의 겸허한 참회를 증폭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기도나 관상의 기초 작업은 하나님을 에워싸고 있고 또 사랑의 부단한 압력 외에는 달리 뚫고 들어갈 수가 없는 지적 무지의 어둠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맹목적인 사랑을 수용하는데 따르는 사고변화는 결코 쉽지 않지만 모든 지적 인식을 망각의 구름 아래로 던져버리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것이 관상이다. 하나님께로부터 피조물에게 와 지금 우리에게 의식되는 모든 기억들조차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버리는 것은 실로 엄청난 산고이다.

지금껏 하나님이 만드신 온갖 피조물들 속에 있는 가장 성스럽고 선한 하나님의 묵상들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깨달음마저 포기해야 하는 것이 관상이다. 이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거스르며 존재하고 있다는 참회로 인해 마음에 솟구치는 잔잔하고도 깊은 슬픔의 의식을 가질 때 이룰 수 있다. 죄의 뿌리와 열매 모두를 박멸시키는 절대적 확실한 길은 오로지 하나님을 관상하는데 있다. 관상에서는 영혼이 고백한 이후에도 반드시 남아있는 죄의 뿌리와 근원마저 제거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행과 참회 역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끓어오를 때에야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기에 모든 신앙의 가르침에는 하나님을 향한 내부의 강렬한 욕망이 그 기초가 되는 것이다.

관상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들을 모조리 확실하게 제압해야 한다. 이 제압은 범한 죄를 씻음과 다시 범하지 않는 것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죄는 하나 하나마다 다루지 말고 뭉쳐서 단 하나의 덩어리로 바라보라. 신학자들과 달리 죄를 낱개로 다루지 않아야 할 것은 죄 하나 하나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적나라한 의지를 가로막을 뿐 아니라 죄를 더 부추길 우려가 있다. 이 모두도 망각의 구름 속으로 묻어버려야 한다. 그렇다고 죄를 하찮게 다루라는 뜻은 아니다. 죄의식은 오로지 하나님을 뵙는 대면의 시간 전까지는 존속되어야 하지만 그런 죄를 분석하거나 세부적으로 나열하기보다 우리 자신에 다름 아닌 '그 덩어리'를 하나의 총체로 대해보라는 의미이다. 이럴 때 하나님의 선과 자비에 대한 참신한 감각이 다가오며 영혼은 겸손을 유지하게 되고 날카로우면서도 차분한 슬픔을 불러일으켜 궁극적으로 죄 하나 하나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별개로 존재하던 우리 자신의 모습들을 지워버리는 힘을 얻게 된다.

관상은 천계의 일몰을 감상하는 유쾌한 신선놀이가 아니요 끊임없이 지저귀는 천상의 새소리도 아니다. 그것은 결코 강렬한 정서가 아니다. 관상은 자기 존재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깨달음이다. 적어도 어떤 영성 생활의 단계에 있어서의 깨달음 속에는 아름다운 색조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고 만족스러운 응답 같은 것도 전혀 있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깨달음은 너무나 생생해서 넋을 잃어 꼼짝달싹도 힐 수 없게 되는가 하면 반대로 오랜 기간 동안 거의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깨달음 속에서 우리는 때로 두려움에 젖어 겸손해지기도 하고 무아경에 빠져들기도 하며 위압당해서 어리벙벙해 하는가 하면 매료되고 환히 밝아지기도 한다. 이것이 때로 부드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영혼이 살아서 성장하고 있는 때이며 영혼이 이런 상태에 붙들린다면 참된 목적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언제나 영혼이 자기 고향으로 향하는 상태에서 이방인이 가지는 원초적인 감각이요 영혼은 이 감각 없이는 생명을 지탱하기 불가능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관상 중 하나님은 어쩌면 한 줄기 영적인 빛을 쏘아 보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이 무지의 구름을 뚫으면서 말해서도 안되고 말할 수도 없는 자신의 비밀의 일부를 보여주실 것이다. 그럴 때면 우리의 애정은 그분의 사랑의 불길로 세차게 타오름을 느끼고 그 강도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때의 우리의 감정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속하는 일을 두고 우리의 무디고 세속적인 혀를 놀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위로는 의심해 보는 것이 신앙의 모든 면에서 마땅한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이 택하신 때에 더없이 놀라운 위로와 감미로움을 주신다. 환희와 법열은 그것을 목격하게 되면 천지만물이 몸을 떨고 모든 학자는 바보가 되고 만다. 모든 성인과 천사들의 눈이 멀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사랑의 진가는 오직 무지의 구름 속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관상 중 환희의 순간이 인간의 표현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극한 것이라면 관상 생활은 전반적으로 그렇지 않아서 '전부'가 '무'로 명료하게 제시될 따름이다. 하나님은 있는 것 속에 계시면서 없는 것 속에도 계시는 분이라면 환희 대신 무가 우리 앞에 놓인다 할지라도 거기 하나님의 임재는 떠나있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신앙여정 중에 마주치게 된 무와 어디도 아닌 곳이 바로 하나님의 현존임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 무엇도 아닌 분이요 어디도 아닌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완전히 보이지 않고 완전히 어두컴컴한 바로 그 무지야말로 이승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앎이요 풍성한 신적 빛에서 비롯되는 그 무엇이다. 그리고 관상 생활은 바로 무지의 앎, 보이지 않는 봄, 감지되지 않는 현존으로서 장차 도달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환희의 전조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총으로 이 선물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누릴 것이다.
< '無知(무지)의 구름 2' 로 이어집니다 >

< 無知(무지)의 구름 2 >

* 본론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네 종류가 있다. 이는 '평범한 삶'과 '특수한 삶' 그리고 '고독한 삶'과 '완전한 삶'이 그것이다 이 중 세 가지는 현세에서 이룰 수 있으나 완전한 삶 곧 완덕의 삶은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승에서 시작하지만 더없이 행복한 천상에서도 언제까지나 이어지게 된다. 주님은 사람들을 당신에게 나오도록 배려하실 때 이같이 동일한 순서와 방법으로 부르신다.

겸허한 사랑을 가지고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들어 올려라. 하나님께 무엇을 바라지말고 바로 하나님 그분만을 바라라. 실제로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해야만 그 무엇도 그대 마음을 차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차지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갖 피조물과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도 망각하고 그대의 생각과 열망을 하나님께로만 향하도록 해야 한다. 다른 것들은 스쳐 지나가도록 놓아두고 신경을 쓰지 말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영혼의 수련이다.

그대는 관상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오로지 어둠밖에 발견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무지의 구름이다. 그대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오직 그대의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뻗어가려는 순수하고 단호한 의향만을 느낄 것이다.

이 어둠과 구름은 그대를 돕기는커녕 그대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아 그대가 지금까지 지녀온 밝은 이성의 빛으로 그분을 바라보지도 못하게 만들고 그분 사랑의 감미로움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필요할 때까지 이 어둠 속에서 참고 기다리면서 사랑하는 그분을 끊임없이 애타게 바라본다면 이 어둠과 이 구름은 그대를 하나님께로 이끌어 줄 고마운 무지의 구름으로 그 정체를 나타낼 것이다. 만일 그대가 내가 일러준 말로 열심히 수련한다면 하나님의 자비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네 영혼의 의지와 열망을 충족시키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조건은 오직 그분 자신뿐이다. 영혼이 은총으로 제 모습을 되찾는다면 그 영혼은 사랑으로 온전히 그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분은 우리 지성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계신다는 점에 있어서는 천사의 지성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나 그들이나 모두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지성일 뿐 만일 사랑을 얻는다면 그 사랑으로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유일한 길을 열게 될 것이다.

모든 이성적 존재인 천사와 인간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닌 바 아는 능력과 사랑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첫 번째 기능인 지성으로는 이를 만드신 하나님을 언제까지나 알지 못하지만 사랑으로는 그분을 온전히 그것도 개개인이 저마다 따로따로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은 오직 사랑으로서만, 세상에 존재하는 뭇 영혼들을 채우기에 충분하고도 한참 남을 그분을 직접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영원히 지속될 사랑의 기적이라 불려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늘 이런 방식으로 역사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을 향한 끌어 오르는 사랑의 기적을 스스로 안다는 것은 끝없는 축복이요 그 반대는 끝없는 고통이다. 인간은 바로 이 목적 때문에 창조되었으며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이 목적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인간은 원래 모습을 되찾게 될 것은 참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이 갈수록 죄에 깊이 빠지는 것은 바로 이를 모르고 유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사랑을 얻으려 수련할수록 점차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은 소중한 것이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하늘 나라를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

은총의 나타남은 그대의 영혼으로 하여금 갑작스런 충동에 의해 하나님을 염원하는 갈망에 젖게도 하며 또 이 뜨거움은 불꽃이 솟듯이 예고 없이 하나님께로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 이 같은 은총의 역사를 소망하는 영혼에게는 이런 충동들이 짤막한 시간에 놀랍도록 솟구치고 그런 번뜩임 속에서 영혼은 창조된 외부 세계를 까마득히 잊게도 한다. 하지만 그 세계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 탓에 순식간에 되살아나면서 하거나 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생각과 기억 속으로 우리 의식을 다시 빠져들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은총의 화염 역시 그에 못지 않게 금방 다시 솟구친다. 그러니까 바로 이것이 간단하나마 은총이 역사 하는 방법이다.

이 모든 것이 기본적으로 정신 작용의 활동(이해성)이라고 생각하고 이와 같은 노선에 입각해 마음을 움직여 가려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심각한 위험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 정도는 너무나 심각해서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비의 기적으로 그를 멈추어 주시지 않는 한 그는 미쳐버리거나 여타의 끔찍스런 영적 재해와 지독한 기만에 시달릴 것이다. 그는 실상 말 그대로 무심코 몸과 영혼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어지는 은총에 초점을 맞추고 이런 체험을 머리로 체득하려고 덤비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외에는 어떠한 강제적이거나 인위적인 요소가 개입되어서는 안되기에 우리가 그런 높은 상태를 얻어보겠다는 욕구에 찬 시도나 생각 역시 차단한 채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바른 믿음이다. 이와 같은 방법은 인간 정신에 의한 정성으로 그분의 은총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은총만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성을 포함한 모든 피조계의 사물들을 의지하려는 마음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그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때 그 무엇에도 또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본질의 하나님을 우리는 만날 수 있다. 무지의 구름은 바로 여기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한계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무지의 구름에 휩싸여 계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뵈려는 자는 이 무지의 구름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이 곳은 인간의 모든 지성이 버려지는 어둠의 상태로 고통과 혼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망각의 구름은 모든 것을 지우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언젠가 무지의 구름에 도달하여 그 안에서 살며 일하고자 한다면 그 때 이 무지의 구름이 하나님과 그대 사이를 가로막고 있듯이 그대 발 아래로 망각의 구름을 깔아서 그대와 피조물 사이를 가로막아야 한다. 사실 이 두 구름은 서로 다른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의 몸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곧 무지의 구름을 통과하기 위해 망각의 구름을 깔아야 하는 것이 마치 한 몸처럼 이것을 행하는 것이 저것을 이루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 무지의 구름 탓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같이 느낄지라도 사실은 망각의 구름을 깔지 않은 것이 진짜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멀게 하는 것이다. 이는 망각의 구름이 움직임에 따라 무지의 구름도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망각의 구름 아래 묻어야 하는 창조계의 모든 것은 피조물 뿐 아니라 그 피조물에 의해 움직이는 전 사물을 일컬어야 한다. 또 그것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를 망각의 구름 아래에 묻고 기억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때로 특정한 피조물을 두고 그것이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 유익함이나 선함을 생각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으나 이것이 오히려 영혼이 하나님만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어 영혼의 눈을 피조 세계로 돌리게 한다. 그대가 어떤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그 시간 동안 하나님과 그대 사이를 가로막는 무지의 구름을 통과하기 위하여 망각의 구름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시간과 같다. 따라서 하나님 이외의 어떠한 것이 그대 마음에 깃들면 그만큼 그대와 하나님 사이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나 능력, 성인이나 천사 그리고 천상의 기쁨 등 이런 선하게 보이는 것을 이용해 그대의 기도 목표를 강화시키고자 한다면 이조차 별로 유익이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친절하심을 생각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랑하는 것이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오로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편이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을 생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며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를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 무지의 구름 속으로 끌려가야 하는데 그대는 이미 그것을 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을 찾는 자는 심지어 어떠한 가느다란 생각이 떠오르는 것조차 버리는 것이 그가 가야할 길인데 그대는 지금 선하게 여기는 생각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굳이 이를 대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모든 것들을 온전히 알 수 있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일들까지 아는 영광을 누릴지라도 어떤 인간도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분을 족히 사랑할 수는 있으나 그분을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것들을 치우고 생각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사랑으로는 그분을 붙들고 차지할 수 있으나 생각으로는 결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하나님의 자비와 진가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보는 일도 선익이 있고 교화 작용도 할 수 있으며 관상의 일부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것마저도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도 생각으로 다가온다면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생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필요한 때문이다.

관상의 주요 요지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버리고 오직 사랑하는 마음을 갖추는데 있다. 그대의 타오르는 사랑으로 지성과 생각들을 단호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짓밟고 올라서서 그대 위에 드리워진 그 어둠을 꿰뚫어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니 간절한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로 두꺼운 무지의 구름을 맞추되 결코 포기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야 한다.

그대와 어둠 사이에서 어떤 생각이 불쑥 솟아올라 의식을 다른 데로 이끌어 가거든 얼른 그대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 뿐으로 다른 어떤 생각도 그대의 기억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오직 그분만을 바라라. 그러나 그 생각은 하나님의 선한 면모를 보이며 그대 안에 그러한 생각을 유도할 것인즉 얼른 그 하나님은 그대를 만들고 구원하시고 은총과 사랑으로 그대를 불러주신 하나님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하고 그런 생각들에 다시는 대답을 하지 말아야 한다.

설령 그 같은 생각들이 거룩해 보이고 하나님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같이 보일지라도 그 생각들을 좇아가서는 안 된다. 그 지성의 생각 속에는 하나님의 친절에 관해서 여러 가지 놀랍고 멋진 상념들이 그대의 마음속에 나타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감미로움과 사랑, 은총과 자비를 일깨워 줄 공산도 아주 크다. 하지만 그대가 하나님만을 향한다는 일편 단심의 마음을 유지한다면 그 생각들은 이내 사라져 버린다.

때로 그들은 갈수록 유난을 떨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도록 끈질기게 달라붙으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를 그대에게 묵상하도록 유도할 터인즉 그 생각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대의 의식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의 세계 속으로 함께 와서 자기들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만들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주의해야 할 것은 만일 그 생각들을 무지의 구름 아래 파묻지 못한다면 그대는 지난날의 죄악 된 생활을 들여다보고 그 시절의 사악한 참상을 생각함에 따라 지난날의 죄를 보고 회개하려는 의식의 이면에 여전히 그 죄를 음미하며 자신도 몰래 그 죄 속으로 끌려가는 의지가 슬며시 발동하여 지난 날 노상 드나들던 그 소굴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대가 자유로이 그 생각에 귀를 기울이기로 동의했고 그 생각에 응답했으며 그 생각을 받아들였고 그 생각이 제멋대로 굴러가도록 방치했기 때문이다.

이런 대답은 참으로 역설적인 것으로 그 생각이 성스럽고 실로 우리의 신앙에 지대한 도움을 주었던 면모 곧 인간은 자신의 사악한 참상과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 선과 진가를 주제로 하는 지극히 매혹적인 수많은 묵상들을 통해 지금의 신앙을 유지해왔고 또한 관상도 어느 정도는 이런 묵상을 토대로 진행되기에 이를 다시 거부하고 버리는 것은 혼란스런 일로 간주될 것이다. 그래도 숙련된 관상가는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무지의 구름을 꿰뚫고자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망각의 구름 속에 깊숙이 파묻어 버린다. 모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대의 열망에 달려 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꾸밈없는 의향이면 족한 것이다.

그대의 선한 생각들이 때로는 대단한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그대를 감동시켜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그대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연민을 느끼도록 하여 눈물까지 흐르게 하는가 하면 성스러운 감정 속으로 그대를 몰입시켜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하나님의 은총에 기인 한다기 보다 정신 작용의 최고 상태로만 관상을 유지하게 만들어 그 자체로는 선한 것이지만 더 높은 단계인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데 그것은 오히려 그대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활동 생활과 관상 생활의 차이점을 짚어보자. 활동이 낮은 단계라면 관상은 높은 단계인 것처럼 활동 생활 속에도 낮고 높은 단계가 있고 관상 생활 속에도 낮고 높은 단계가 있다. 이 두 가지 생활 방식은 서로에 연결되어 상호 의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활동 생활의 높은 단계는 관상 생활의 낮은 단계와 동일한 것이 된다. 사람은 부분적으로는 관상적이 되지 않으면 지상에서 온전한 활동가가 될 수 없으며 또 부분적으로나마 활동적이 되지 않으면 온전한 관상가가 될 수 없다.

활동 생활은 이승에서 끝이 나지만 관상 생활은 이승에서 시작하여 영원히 이어진다. 마리아가 선택하여 빼앗기지 않을 그 몫처럼 관상 생활은 평화로이 앉아서 한 가지에만 마음을 쏟는 반면 활동 생활은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을 한다. 사람이 자연적인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가는 것은 활동 생활의 낮은 단계에 속하고 영적 묵상이나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애통하거나 참회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이나 그 종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성찰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계 모든 부문에서 영육 간에 이루시는 자비의 일들에 감사하는 것 등은 활동 생활의 높은 단계 곧 관상 생활의 낮은 단계에 속한다. 그러나 관상 생활의 높은 단계는 어둡고 칙칙한 이 무지의 구름 속에 온전히 감싸인 채 사랑의 손길을 내뻗고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만을 맹목적으로 더듬어 찾는 단계로 이는 다른 두 가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힘이 주어지게 된다.

첫 단계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의 바깥 즉 그 사람 아래에 자리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사람의 행위가 내면으로 향하면서 그 사람 안에 자리하여 자신의 속과 겉이 같은 자기 자신의 높이에 서게 된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에서는 사람은 명확히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빼고는 그 무엇에도 뒤떨어지지 않고 모든 것보다 높은 위치에 자신을 서게 한다. 이는 자신의 본성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들을 은총으로 성취하게 되어 이성이나 정신이 아닌 영으로 하나님과 일치하고 사랑과 의지로 하나님과 하나된다는 것이 그의 지향이 된다.

사람마다 높은 단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 낮은 단계를 일시 벗어나야 하는 아픔이 따른다. 묵상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바깥일들 곧 그 일이 제아무리 거룩한 것일지라도 그가 의도했던 일이나 해야할 일들에 골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이 무지의 구름과 신성한 어둠 속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하나님 한 분께로만 흐르도록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것들에 붙잡혀 정작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을 그의 시야에서 놓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실상 사랑은 이승에서도 하나님께 도달할 수 있으나 이성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혼이 이 썩어 부패할 육체 속에 거처하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우리의 맑다는 영적 이해력조차 하나님을 그 대상으로 할 때 이런 저런 왜곡에 부딪치게 만들어 우리의 것들을 불완전하게 만들면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제쳐두는 오류를 범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 맹목적인 관상에 돌입할 때면 언제고 왕성한 상상력의 활동이 일어나므로 이를 억제시켜야 한다. 그대가 그것을 억누르지 않으면 그것이 그대를 억누르고 말 것이다. 그대가 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고 그대 마음에는 오로지 하나님만 계시다고 여길 때조차 문득 그대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대의 마음이 어둠에 휩싸이기는커녕 하나님보다 못한 어떤 것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케 된다.

그대는 이 맹목적인 사랑, 곧 무지의 구름 위로 밀어 올리는 이 은밀한 사랑을 간직하되 이를 그대의 영적 품성으로 굳히는 것이 더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이승에서는 인간에게서 나온 최상의 것으로도 하나님의 맑은 영상을 결코 목격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총으로 이를 허락하실 때는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대는 인간의 것을 버리는 작업으로 그대의 사랑을 이 구름 위로 들어올려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구름으로 그대의 사랑을 끌어올리시게 만들어야 한다.

죄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향한 의지를 결코 꺾지 말아야 한다. 그대와 하나님 사이에 자리한 이 무지의 구름에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날려라. 하나님보다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의지만 붙잡는다면 죄의 토대와 뿌리를 없앨 수 있다. 그대가 그야말로 자주단식하고 철야 기도를 바치고 동이 트자마자 일어나고 널판지에서 잠자며 쇠사슬로 몸을 칭칭 감는다 해도 또 그대 자신의 눈알을 빼고 혀를 뽑고 코와 귀를 틀어막고 팔다리를 절단하는 등 생각해낼 수 있는 온갖 방법으로 육신을 괴롭힌다 할지라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죄의 자극과 충동은 여전히 그대에게 남아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대가 자신의 죄나 그리스도의 고난을 슬퍼하며 제 아무리 크게 통곡한다 한들, 또 천상의 환희들을 제아무리 많고 깊게 생각한다 한들 그것이 그대에게 죄를 끊는 참다운 힘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물론 그것의 효과가 아주 없다는 뜻은 아니고 맹목적인 사랑에 비하면 그들은 너무나 초라한 모습들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큰 두 덕목인 사랑과 겸손을 통해 무지의 구름을 이해해보자. 완덕이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위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정돈되고 분별 있는 애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복합적인 동기에서 특정한 완덕을 추구한다면 비록 그의 주된 동기가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그 완덕은 불완전한 것이 된다. 사람이 사랑과 겸손이라는 완덕을 구비하였다면 다른 덕들도 모두 갖춘 자가 되는 것은 모든 완덕들이 그 속에서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즉 다른 완덕들은 사랑과 겸손의 부분적인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그중 겸손 그 자체는 우리 자신을 실제 있는 그대로 아는 진실한 앎이요 깨달음이다. 누구든지 온갖 것으로 포장되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고 느끼는 사람은 진실로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겸손을 유발하는 요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면서 나타난 퇴화와 참상과 약점으로서 그는 자신이 제아무리 거룩하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동안 보잘 것 없는 자기 모습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분에 넘치는 사랑과 진가로서 이를 바라보노라면 천지 만물은 몸을 떨고 모든 학자들은 바보가 되고 모든 성인과 천사들은 눈이 멀고 만다. 하나는 이성의 빛에 비추어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실제 그대로 깨닫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주어지는 은총에 의해 먼지와 같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동기 가운데 후자는 완전하고 영원하지만 전자는 불완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와 후자가 모두 그 순간에는 한시적일지라도 후자는 전자에 비해 그 힘의 강도가 여전히 남아 지속되기 때문이며 또 사멸할 육체 안에 깃든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그의 열망이 증폭되는 영향을 받지만 인간은 본래적으로 자신에 영향을 줄 무엇도 그 속에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라는 일차적인 동기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을 때 영혼은 완전한 겸손의 모습을 가질 수 있으나 그가 다른 요인을 의식하고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한 하나님 자신을 주된 동기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그의 겸손은 불완전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불완전한 겸손도 우리는 체험할 필요가 있는 바 실상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육체로 사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필요한 이성을 주신 목적을 헤아려본다면 우리의 지성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목표를 향한 접근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 상태는 죄인의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는 무능과 부패의 쇠사슬로 묶여 있기에 불완전한 겸손이 없이 완전한 겸손을 얻거나 간직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결국 완전한 겸손도 불완전한 겸손 위에 이어지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지식의 결핍이 흔히 지식의 과다와 같이 심각한 교만의 원인이 되는 것은 사람이 완전한 겸손이 무엇인지 지식적으로 모를 경우 불완전한 겸손을 약간 체득하게 되면 자신이 완전히 겸손에 도달했다고 생각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대는 불완전한 겸손을 통하여 완전한 겸손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완전한 겸손은 그것을 지닌 사람이 그것을 지니고 있는 동안에는 내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고 또 그것이 사라진 후에도 일정 기간 동안 그 효과는 지속되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흔히들 죄를 깨달아야 겸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히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의 비천함과 과거의 죄악을 기억하고 회개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즉 우리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지향하는 간절한 마음 속에 얻어지는 은총이 우리를 완전한 겸손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약함과 비천함 그리고 지나간 죄를 바라보는 것으로 겸손에 도달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 속에 파생되는 겸손이 더 좋은 것이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죄인들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표상인 일곱 귀신 들렸던 마리아 막달레나(눅:7:47)를 관상 생활로 부르시면서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녀가 죄를 심히 슬퍼했기 때문도 아니요 그 죄를 걱정했기 때문도 아니며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돌아보며 겸손을 보였기 때문도 아니고 다만 그녀가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의해 그녀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이 내용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만이 우리의 죄 끊음을 가능케 하는 힘이 됨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얻는 은총만이 그녀를 진정으로 겸손케 변화시켜 향유를 시몬의 집에서 주님께 붓도록 그 마음을 이끌어준 것이다.

우리도 마리아와 똑같은 방법으로 하면 틀림없이 겸손에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에서 오는 은총만이 우리의 죄를 끈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뼈저리게 아파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 죄를 마음 속에 부담으로 안고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서가 보여주고 있듯이 한결 더 애처롭게 슬퍼하고 열망하고 더욱 애절하게 한숨짓고 정말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번민했던 것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죄를 되새기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더욱더 사랑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는 것같이 그녀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마리아는 자신이 모든 죄인 가운데서 가장 끔찍한 죄인이고 자신의 죄가 그토록 깊이 사랑하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심연을 만들었으며 자기가 나약해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주요 원인도 바로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하였던가. 과연 그녀는 열망의 봉우리에서 사악한 삶의 나락으로 내려와 죄악의 쓰레기더미며 하수구를 뒤져서 자신이 범한 죄 하나하나를 건져내고 하나씩 주워 올릴 때마다 찬찬히 뜯어보며 슬퍼하고 통곡했던가. 물론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녀의 영혼 안에서 당신의 은총을 통해 그런 식으로 해서는 결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만일 그녀가 그런 식으로 처신했더라면 죄를 용서받기는커녕 다시 죄를 범했을 공산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자기 속에 있는 등불로 자신의 어둠을 몰아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등불마저 스스로 외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과 간절한 소망을 이 무지의 구름에다 걸었던 바 결국 이승에서 이성으로 확연히 이해하기 불가능하고 감성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없는 어떤 것을 사랑할 줄 알기에 이른 것이다.

그녀는 사랑이 너무 깊었던 까닭에 자신이 지독한 죄인이었다는 것마저 곧잘 잊곤 했다. 그녀는 주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는 동안에도 그분의 신성에 취해 이 땅의 육체로 오신 주님의 모습이 축복 받은 고귀한 것임에도 그 아름다움과 감미로움에는 관심이 거의 잊혀졌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진수요 관상의 별미가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관상에서 가르치는 무지의 구름은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을 의지하여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돌아봄으로 얻는 불완전한 겸손의 단계를 너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분에게서 베풀어지는 은총으로 얻는 완전한 겸손에 도달하려는 자들은 누구나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외길인 것이다.
< '無知(무지)의 구름 3' 으로 이어집니다 >

< 無知(무지)의 구름 3 >

이 땅의 더러움이 사실일지언정 이 땅의 온갖 것으로 그것을 문질러 지우려 해도 그것은 없어지지 않거니와 이를 위해 하늘로 우리 시선을 옮겨보면 거기에서 온 하늘 가득 내려오는 은총을 발견하고 그토록 지워지지 않던 마음의 추한 얼룩들이 지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죄를 지우고 싶거든 죄를 깊이 관찰하기보다 차라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의 자매 마르다는 주님의 식사 준비로 바쁘게 움직인 반면 마리아는 줄곧 그분의 발치에 앉아 온통 귀를 그분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선하고 성스러운 일로서 활동 생활의 첫 번째 단계에 해당되는 분주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주님께로부터 그분의 더없이 귀하고 신성하며 완벽한 육신의 아름다운 모습과 감미로운 음성과 그 말씀들 속에 활동 생활의 두 번째 단계이자 관상 생활의 첫 번째 단계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어느 것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녀가 찾고 있던 것은 그분의 인성에서 나오는 말씀들로 포장되어 있으나 실상은 그분의 신성에서 나오는 지고한 지혜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곧 말씀을 듣고 그 교훈에 잠겨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분을 하염없이 사랑하고자 불타오르는 정열만이 그녀의 마음의 전체를 휩싸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의 진리가 궁극으로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기 때문이었다. 마리아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바로 이것을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다하여 이 지고한 지혜를 응시하며, 보거나 듣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냥 고요하게 거기 앉아서 심원한 환희와 절박한 사랑으로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놓인 이 드높은 무지의 구름 속으로 열심히 팔을 내뻗었던 것이다.

여기 중요한 단서가 있다. 이승에서는 제아무리 순결하고 황홀한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관상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중재 역할을 하는 이 고상하고 경이로운 구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사랑의 은밀한 움직임들을 수없이 체험했던 곳도 바로 이 구름 속이었다. 그녀는 하나님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먼저 버려야 하는 아픔을 기뻐했던 것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의 진리는 사랑을 표현하고 그 외적 수명을 다하여 이제부터는 사랑의 품에 안긴 채 살아가야 참 생명을 지니게 된다는 것과 이와 같이 우리의 지성 역시 새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일시 무지의 구름 속에 잊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관상가는 활동가들이 비난할 때 흔들림 없이 자신의 영적인 일에 매진함으로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있다. 마르다가 불평을 토로했을 때 마리아는 주님만을 관상함으로 마르다의 불평에 관심을 쏟지 않았다. 이 때 주님은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마르다 마르다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사람으로서 정녕 육이나 영으로 모든 일에 앞서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찬미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여러 현세의 일들보다 우위에 있다. 마르다가 행한 것은 주님을 위한 선의 일종일지라도 주님은 마르다가 현세의 일에 분주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오히려 마리아가 가장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신 것이다.

마르다는 활동 생활을 대변하고 마리아는 관상 생활을 대변한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가 없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활동 생활의 첫 부분은 자비와 사랑에서 나온 선하고 정직한 육체의 행위이다. 둘째 부분은 활동의 마지막과 관상의 처음 부분이 겹치는 곳으로 우리의 비참한 처지와 그리스도의 고난과 천상의 기쁨을 주제로 하는 선한 묵상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활동과 관상의 영적인 결합이 이루어지며 이곳은 활동가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상태이고 반대로 관상가가 내려갈 수 있는 최하의 상태이다. 셋째 부분은 어두운 무지의 구름에 싸여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향한 수많은 은밀한 사랑의 행위를 내포한다. 이 부분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장 좋은 몫이다. 첫 부분과 둘째 부분도 선한 것이지만 이승에서 끝나고 만다. 장차 올 삶 속에서는 인간의 비참도 끝나기에 그때는 인간을 위한 삶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삶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활동가들은 관상가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들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아니고서는 그 무엇도 마리아를 만족시킬 수 없었기에 그녀는 주님의 무덤에서 천사들의 위로도 마다하고 주님만을 찾아 울고있었다. 회개하고 관상의 은총으로 부름 받은 습관적인 죄인의 전형인 마리아를 나병환자 시몬이 자기 집에서 마음 속으로 비난하자 주님은 그를 꾸짖으실 만큼 그녀를 사랑하셨다.

관상 생활이란 우리네 의지가 일편단심으로 하나님만을 지향하는 것 외에 바랄 것을 갖지 못한다. 그 생활의 수련자는 고통을 없애 달란다거나 풍성한 보상을 내려 달란다거나 하나님 이외에 다른 무엇을 달라고 구하는 일이 절대로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기쁘다던가 슬프다던가 하는 것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만을 바란다. 제 아무리 성스러운 일일지라도 거기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는다.

관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잘 안 되는 것은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기억을 억누르고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버리는 일이다. 무지의 구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인간의 지성이 이 세상 모든 사물로부터 얻는 깨달음보다 훨씬 낫다. 하나님의 시작을 위해 나 자신의 끝을 만들 줄 알아야 하며 자신의 눈을 스스로 어둡게 함으로 철저히 인간에게서 발출된 빛으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열망을 지워야 한다. 이 과정 중에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손수 도울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어쩌지 못해 당황해하고 답답해질 때 두려워말 것은 인자하신 하나님은 그대를 틀림없이 도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이다.

관상 생활을 시작하려면 먼저 과거에 범한 죄로 더럽혀진 양심을 일반적으로 깨끗이 씻어내는 작업을 먼저 해야 한다. 왜냐하면 관상 생활은 제 아무리 성스러운 일에 열심인 자일지라도 고백 이후까지 반드시 남게 되는 죄의 뿌리까지 제거하게 되고 또 일생 동안 계속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습관적인 죄인도 충분히 이 수련에 참가할 수 있다. 아 수련은 죄인이든 순결한 사람이든 모두가 힘들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순결한 사람이 더 힘들어하게 되고 많은 습관적인 죄를 범하던 사람이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빠르게 관상에 도달하는 경우가 흔하게 있다. 이는 죄인들에게 당신의 특별한 은총을 내리시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기적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끔찍한 죄를 범하여 멸시 당하던 자들이 성인들과 함께 당당히 앉아 있게 될 것이고 그런가 하면 거룩한 자로 보이던 어쩌면 대죄를 한 번도 범한 적이 없던 사람들은 오히려 지옥의 동굴 속에 앉아있을 것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승에서 행한 선악을 보고 조급히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하물며 자신조차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외부에 만들어내는 행실 하나하나 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선악의 어떠함이 있는 그대로 나타난 것이지만 사람의 마음 속 깊고 깊은 곳에 형성된 사랑과 지혜의 세계를 참되게 아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관상이 그 무엇에 이끌려 가는 느낌을 받는 것은 관상은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관상의 능력은 관상 그 자체와 하나이며 따라서 관상을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만이 관상이 가능하다. 그대가 이 관상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다면 이미 관상을 수중에 넣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대를 움직이는 것은 갈망이나 의지가 아니라 그대가 전혀 모르고 있는 사이에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바라고 갈망하도록 부추기는 어떤 힘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정진해야 한다. 한 마디로 말해 그 어떤 것이 그대를 제 뜻대로 이끌도록 맡겨야 한다.

그대는 그것이 이끄는 대로 지켜보기만 하되 그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듯이 간섭하지 말라.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이 실제 그대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 간주해도 좋다. 그대는 이 상태에서 잘못될까 전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그대를 이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으로 악마나 천사조차 그대를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는 여기 기술한 내용만 가지고도 다른 어느 도움이 없을지라도 관상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온갖 선한 도움이 관상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관상에 오히려 종속되기에 그 조력이 관상을 좌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죄나 하나님을 분석하려는 상상력보다 단순한 이미지로 그 전체를 인식해야 한다. 신앙의 처음에는 성경을 알아야 묵상이 되고 사색이 되어야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일반적인 이치이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식이 모든 것의 과정이자 종착역이 되어버리지만 관상에 임하는 정도의 사람들은 지식을 너머 실제로 충동적인 즉석의 깨달음이 마음에 파동 치는 것을 목표로 그것들을 접하려 하기에 죄나 하나님에 대한 구성 요소를 고찰 분석하려 상상력을 동원하기보다 그 대상에 대한 전체적인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어떤 낱말의 세부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 죄와 선을 깨달으려 하지말고 죄를 전체적으로 악한 것, 곧 나 자신 등으로 인식하는 본능에 의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으로 즉 직관으로 알아야 한다. 진리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 본질적인 것이 환히 드러나게 마련이지만 그럴수록 오류를 더 경계해야 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자기를 인식하지 않아야 하나님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대의 마음이나 의지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것도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라.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 관한 지식과 느낌 일체를 제압하고 망각의 구름 아래로 버려야 한다. 그대의 마음과 의지에 출현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싫어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갖 형태의 피조물들에 대한 모든 지식과 체험을 짓밟되 무엇보다도 우선 그대 자신에 대한 지식과 체험부터 짓밟아 버려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자기애에서 비롯되기에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자기애가 잊혀지면 다른 모든 것도 잊혀진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강한 인식이 모든 것에 영향을 주어 하나님에게 집중할 마음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관상에서 자신을 잊는 방법은 특별히 없다. 그것은 은총에 기인하기에 그 은총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열심 있는 마음, 곧 영혼의 통렬하고 애절한 슬픔을 강하게 간직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육체나 영혼에 불필요한 긴장을 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보다는 마치 잠든 듯이 입을 다물고 아주 조용하게 앉아서 슬픔에 몰두하고 침잠해야 한다. 만일 그대가 이 정도까지 참된 슬픔에 도달할 수 있다면 만사가 해결될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과 대치하는 입장에 서있다는 것을 깨닫는 만큼 그대의 슬픔은 더할 것이다. 이런 슬픔은 완전한 슬픔으로 이를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자는 송구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 같은 슬픔을 느낄 때 비로소 영혼은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나님만을 찾고자하는 염원이 증폭될 것이다.

이 슬픔은 순수할 경우 그 안에 성스러운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열망이 있으므로 인해 그런 순수한 슬픔을 참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볼수록 자신의 형편없는 모습에 절망하고 이런 자기 모습에 따르는 슬픔의 강도는 너무 커서 그 무엇으로도 이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은 고통스럽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고통 속에서도 자신의 생존을 포기하지 않을 마음이 피어오르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그 극심한 슬픔을 이기고 자신을 사로잡기에 오히려 이런 귀한 열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게 된다. 이런 것은 이론이 아닌 체험으로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들의 순수한 마음에 찾아오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그런 슬픔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슬픔을 유지하는 방법에는 주의가 요한다. 이 슬픔을 지니기 위해 은총에 의지하지 않고 무리하게 임의적으로 자신을 긴장 상태에 놓는 경우에는 자신이 먼저 지치게 되어 육체적, 정신적 허탈감에 빠지고 엉뚱한 외부의 위로를 구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정신 작용에서 비롯되는 인위적인 만족감을 느끼거나 거짓된 열기를 소유하게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관상가들을 거느리고 계시듯 악마도 그 수하에 관상가들을 거느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상에 임할 때 감정적으로나 힘에 벅찰 정도로 무리하게 그대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라. 야만적인 힘보다는 은총을 의지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즐겁게 이 일에 몰두해야 한다. 그대가 하는 일이 간절하면 할수록 그만큼 겸손하고 영적이 되는 반면에 거칠면 거칠수록 물리적이고 동물적이 되는 것이다. 그 같은 격한 긴장은 육체적, 정신적 안목을 뗄 수 없으며 은총이라는 이슬을 맞아들이지 못해 메말라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영혼도 육체처럼 휴식을 취하면서 차분하면서도 열렬한 기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대의 몸가짐을 겸손케 하고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아무리 굶주렸다 할지라도 탐욕스런 사냥개처럼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관상에서는 제멋대로 날뛰는 이러한 충동이 무척 위험한 것이다. 관상을 할 때는 마치 그대가 하나님을 뵙고 소유하며 감촉 하는 일을 하나님 자신조차 알아서는 안 되는 것처럼 비밀스럽게 혼자만의 기쁨으로 여기며 차분하게 그분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그대의 모습이 하나님께 대한 시위처럼 보이기 위해서이다. 이는 곧 그대의 조급한 열심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에 기대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 다음은 그 은밀한 시위를 통해 그대 속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반응 중에 이성을 잃지 않고 차분한 마음을 유지케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대가 하나님 앞에 더욱 간절한 모습으로 서기 위하여 그동안 그대 나름대로의 표현이나 말소리, 기타 원시적인 몸짓들을 통해 육체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려 해왔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분과 하나가 되려는 사람은 육체적인 것을 멀리하고 영적인 접근으로 순수하게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한다. 육체적인 것은 영적인 것보다 하나님에게서 더욱 멀리 떨어져 그와의 합일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런 이유에서 그대의 열망에 어떤 자연적인 요소가 섞이지 않도록 그대의 표면적이고 들뜬 상태를 가라앉힌 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조차 들키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그 열망을 자신의 영 깊은 곳에 감추고 감정적, 육체적 상태를 벗어나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하나님의 보다 나은 은총을 얻는 방법인 것은 하나님은 항상 변함 없는 분이시고 변할 수 있는 자는 그대 자신이기에 그대의 상태를 치료함으로 더욱 하나님을 밝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리내어 기도하고 싶을 때나 영혼이 끓어오르는 신심으로 넘쳐날 때 '선하신 예수여! 사랑스러운 예수여! 감미로운 예수여!' 등과 같이 적절하고 선익한 말을 항상 금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영의 하나님이면서도 육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육적인 것까지도 하나님의 위로와 보상이 내려지기도 하기에 그대에게 일어나는 육적인 감미로움과 평안, 열정 등이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지성의 창문들을 통해 육체와 영혼에 들어오기도 하고 반대로 내부로부터 풍성한 영적 기쁨과 참된 신심이 영혼과 육체에 샘솟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성이나 육체보다 영혼에 비치는 은혜가 더 본질이라는 것이다.

관상에서 그대는 영과 육이 느끼는 위로와 평안보다 마음 속에 흐르는 이 겸허한 사랑의 물결에 의해 솟아나는 선한 의지 쪽에 모든 정성을 기울이고 순응해야 한다. 육적이거나 영적인 온갖 감미로움과 위안은 제아무리 성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선한 의지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이요 거기에 종속되는 비본질적인 것이다. 그것들은 선한 의지가 없는 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천상에서는 그들이 서로 관련을 맺을 수밖에 없으나 이승에서는 그들이 전연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승에서 선한 의지를 가능한 최대한으로 소유하는 사람은 감미로움과 위안이 없다하더라도 그것을 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다.

따라서 그대는 선한 의지 안에 이루어지는 겸허한 사랑의 흐름에 온통 주의를 집중해야 하며 이를 위해 다른 형태의 위로와 감미로움은 제아무리 쾌적하고 성스럽다 할지라도 모조리 무관심으로 대해야 한다. 만일 그런 것들이 밀려든다면 맞아들이되 거기에 매달리지 말도록 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는 그대의 눈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칫하면 이같이 감미로운 눈물과 느낌에 장시간 푹 빠져든 나머지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할 수 있고 아울러 그런 것들을 얻어 누리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이런 상태를 어쩌다 맞는다면 그대의 마음을 잘 살펴 보라. 그런 기쁨이 사라졌을 때 그대 마음이 심하게 불평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아직 순수하거나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완전한 사랑은 그들이 있거나 없거나 그에 영향 받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을 기뻐하기 때문이다.

관상 중에 있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목적과 처방은 각기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런 위로를 항상 받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것을 별로 누리지 못하기도 한다. 개중에는 영적으로 너무 나약하고 민감해서 이 같은 감미로움으로 어느 정도 위로하지 않으면 삶 속에서 당하고 겪어야 하는, 영육 간의 원수들로부터 오는 다양한 유혹과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체질적으로 너무 약해서 자신을 정화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고행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이런 자들의 영을 감미로운 눈물과 정서로 말끔히 씻어주신다. 그러나 영적으로 무척 강인해서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스스로 충분한 위로를 끌어낼 수 있는 자는 구태여 감미로운 감정으로 지원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느 쪽을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관상의 본질은 하나님과 그의 선이다. 이를 인식한다면 '그대의 의지'에 흐르는 이 겸허한 사랑의 흐름에 주의해야 한다. 기쁨과 평안을 보고 듣고 느끼기 위해 모든 기관을 문열어 놓지 말고 오직 하나 그대 안에 조용히 흐르는 '선한 의지'에 목매달아야 한다. 이런 갈망조차도 하나님이 아셔서 위로를 주시도록 은근히 부산을 떨기보다 마치 하나님도 모르시게 비밀을 간직한 듯 오직 그 사랑에 흐르는 선한 의지 자체에만 몰두해야 한다. 이처럼 관상은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우리에게 나타나는 어떤 기쁨과 평강, 위로 등을 주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관상 중 맞닥뜨리게될 무지의 구름의 단계에서 그대는 그대 자신 밖이나 위, 뒤나 옆 그대의 이성의 빛이 비치는 곳 어디에도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러면 그대는 도대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그대는 아무데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가 육적으로 아무데도 없을 때 영적으로는 어디에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의 영이 육적인 것 어디에 매여있는지 살펴 보라. 그러면 그대의 몸이 가있는 곳에 그대가 있는 것만큼이나 확실하게, 그대가 마음을 주는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그곳에 그대 또한 영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무지의 구름에 접근하는 단계에서 그대의 마음이 자신을 채워줄 영적 양식의 한 조각도 얻을 것이 없다고 느끼더라도 바로 그 아무 것도 아닌 일을 계속 해나가되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라. 아무쪼록 포기하지 말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리며 세심한 의지와 열망으로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얻도록 노력하라. 내가 진실로 말하거니와 나는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무엇이나 내 것인 양 누릴 수 있는 위대한 자유자가 되기보다는 이 아무 것도 아닌 곳에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아닌 불투명한 것과 씨름하는 쪽을 훨씬 더 좋아할 것이다.

이 '어디에나'와 '무엇이나'를 버리고 이 '아무데도'와 '아무 것도'를 취하도록 하라. 그대가 설령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도대체 간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혀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그에 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가치는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눈으로 보기보다 그냥 느끼는 쪽이 한결 쉬운데 이유는 이제야 갓 주시하기 시작한 이들에게는 그것의 윤곽조차 완전한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실질적인 어둠 또는 물리적인 빛이 부재 하는 상태라기보다 그것을 체험하는 영혼을 눈멀도록 만드는 저항할 수 없는 영적인 빛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고 느끼는 실체는 누구인가. 이는 분명 우리 내면이 아닌 외면인 것이다. 우리의 내적 자아는 이를 가리켜 '모든 것'이라고 느끼는 바 이유는 그가 이것을 통해 갖가지 개별적인 사물을 독자적으로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이 육적이거나 영적인 모든 만물의 비밀을 알아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아무 데도 아닌 곳에서 체험할 때 그는 자신의 안목에 더없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영혼이 그 점에 주목하기 시작할 때 그는 자신이 태어나던 날부터 범한 지난날의 죄들이 육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모두 거기에 은밀하고 새카맣게 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어디를 가든 그의 시선과 마주치다가 이윽고 힘든 노고와 진심에서 우러난 수많은 한숨과 고통스런 눈물을 흘리면서 사실상 그것들 모두를 씻어내게 된다.

이렇듯 아무 데도 아닌 데서 이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전속력으로 열심히 노력하되 그대가 외부에서 육적으로 사물을 알아내고 좇아 다니는 그런 방식들은 한편으로 치워야 한다. 그런 종류의 일은 그 같은 방식으로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의 눈은 사물이 길다란지, 널찍한지, 작은지, 큰지, 둥근지, 네모난지, 알록달록한지 겉모습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대의 귀는 음향이나 소리로 이해하고 그대의 코는 악취나 향기로 파악한다. 그리고 그대의 혀는 신지, 단지, 짠지, 싱거운지, 쓴지, 상큼한지를, 촉감으로는 뜨거운지, 찬지, 딱딱한지, 부드러운지, 무딘지, 날카로운지를 알아낼 따름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영적인 일들은 이런 다양한 속성들을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는다. 그러니 감각을 통해 얻어지는 외적인 지식 일체는 그냥 놓아 두라.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절대로 감각을 도구 삼아 일하지 말아야 한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적인 관상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현상세계의 영상들이나 자기네 존재의 한 가운데서 영적인 일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거나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크게 오판한 것이며 사물의 자연 질서를 역행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자연 질서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도록 되어있을지언정 그 감각으로 영적 사물에 대한 지식까지 얻도록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을 때란 바로 우리가 감각의 한계를 인정하는 경우에 한해서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일에 관해 듣거나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이해력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묘사할 수 없을 때 바로 그 사실로써 그 일들이 육적인 것이 아닌 영적인 것임을 확신하게 되기도 한다.

이렇듯 감각이 제한될 때 영적인 것들이 부상하듯 영적인 것들 또한 제한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 한 분만이 그대 마음에 자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설령 사람이 일찍이 창조된 온갖 영적 사물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통달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이해력만으로는, 유일하게 창조되지 않은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해력에 한계를 느끼고 이제 그 이해력을 벗어버리려 한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이해력을 제한하고 있는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성디오니시오는 '하나님을 아는 가장 신적인 지식은 무지(無知)를 통해 알려진 지식이다'고 말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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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연약한 믿음 탈출하기
글쓴이 : 엄기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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