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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신비가/썬다싱

[스크랩] 인도의 썬다 싱의 명상

by Andrew Y Lee 2007.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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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의 썬다 싱의 명상  >

1. 어느 어두운 밤 나는 기도하려고 숲 가운데 들어갔다. 바위 위에 앉아 나의 깊은 요구를 내어놓고 도와주시기를 구하였다. 잠깐 있노라니 한 가난한 사람이 나를 향하여 오는 것을 보고 아마 구차한 사람이 나에게 빌러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이 담요 하나밖에 없다. 그대는 이 가까운 동리에 가서 구걸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보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번개와 같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물 붓듯 하는 은혜를 나에게 부어주고 문득 사라졌다. 아아! 이는 내가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이시다. 주님은 나같이 가련한 피조물에게서 아무것도 얻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은혜를 주고 부요 하게 하시려고 오신 것인 줄 밝히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련하고 통찰력 없음을 슬피 울며 그곳을 떠났다.

2. 나는 눈물로서 기도하며 주께 나의 영을 바쳤다. “나의 주이신 신이여! 나의 생명의 생명, 나의 영의 영이시여! 긍휼로서 나를 살피시며 성신으로서 부어주소서. 나의 마음은 당신을 버리고 달리 받칠만한 사랑의 전당이 없나이다. 생명과 일체의 부여자인 당신 자신 외에는 당신에게서 아무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그 안의 보배와 하늘까지도 요구하지 않나이다. 다만 당신을 사모하며 또 구하옵니다. 당신이 계신 곳 거기가 천국이므로 내 마음의 기갈은 다만 이것을 지어주신 당신에 의해서만 만족할 수 있나이다. 오! 나의 창조주여! 당신은 나의 마음을 다만 당신을 위하여서만 지은 것이요 다른 아무것도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마음은 당신 안에 있는 외에는 평화와 휴식을 얻을 수 없나이다. 나를 창조하시고 또 평안을 구하는 욕구를 주신 당신 안에서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심중에서 당신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없이하여 주시고 내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며 이와 같이 영원히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3. 내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에 한 빛나는 모양을 보았다. 그는 광휘 찬란한 아름다운 모양으로 내 앞에 섰다.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또 나의 눈은 눈물에 젖어서 밝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생명을 주는 광선과 같은 빛이 몹시 힘있게 나의 마음에 부어들어 올 때 나의 영혼은 그 중에 잠겨들어 갔다. 그때 곧 나는 사랑하는 나의 구주가 내 앞에 선 것을 알았다. 나는 곧 나의 섰던 바위에서 내려서 그의 발 앞에 몸을 던졌다. 그는 그 손으로 친히 내 마음의 열쇠를 잡았다. 그리고 나의 열쇠로서 나의 내부의 실을 열고 그의 거룩한 임재로서 내 마음에 충만하였다. 그래서 나는 안을 보나 밖을 보나 어디든지 다만 그만을 보았다.(천사나 성도나 악마나 다 우리 마음의 자물쇠를 열 권리와 능력이 없다. 또 우리 자신도 할 수 없다. 다만 우리 마음을 지으신 창조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인간의 마음이 신의 보좌요 성인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그가 들어온 때부터 나의 마음속에는 천국이 열리었다.

4. “나의 참된 아들아! 참된 행복은 육안으로 보는 자에게는 없다. 그것은 영의 눈을 뜰 때에야 아는 것이요 마음에 있는 것이다. 팔레스틴에서는 수천 인이 나를 보았다. 그러나 모두 참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니다. 썩어질 육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썩어질 물건밖에 없다. 육안으로는 영원하신 영적 실재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네 자신이 네 영혼조차 볼 수 없거든 어떻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느냐. 그러나 영안이 열리는 때에는 너는 확실히 영인 그를 볼 수 있다. 또 지금 네가 나를 보는 것은 육의 눈이 아니요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팔레스틴의 모든 사람들은 다 육안으로 나를 보았다. 또 썩어 없어질 인간으로 된 줄 생각하였다. 내가 죽을 육체를 취한 것은 이로써 세상 죄를 소멸코저 함이다.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구원의 업이 완성될 때에 죽을 육체는 죽지 않는 영광 중에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부활한 후에 나를 볼 수 있는 자는 영적 시각을 받은 자뿐이다.

5. 이 세상에 나에게 대하여 아는 자는 많으나 나를 아는 자는 적다. 그것은 저들이 나와 개인적으로 직접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참 이해도 없고 나의 안에 있는 신앙도 없고 나를 저들의 구주와 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마치 소경으로 난자가 붉고 푸르고 누른 여러 가지 빛깔에 대하여 말은 하나 그 미와 관상적 희열은 전혀 모르는 것과 같다. 눈을 뜨기 전에는 참 빛깔을 알 수 없다. 비록 박학한 사람이라도 그 영안이 뜨이기 전에는 나를 알 수 없고 나의 영광을 볼 수 없으며 내가 신의 화신인 것을 깨닫지도 못한다.

많은 신자들은 저들의 마음에 내가 임재 하는 것이 영적 생명과 평화를 주는 줄 알고 있다. 그것은 옳으나 직접 나를 볼 수는 없다. 마치 사람이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눈약 한 방울을 그 눈에 떨어뜨리면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나 눈약이 눈 안에 있으므로 눈을 상쾌하게 하는 것같이 나의 내재가 그의 내적 광명의 눈을 밝히고 시력을 증진케 한다. 참 평화는 내가 신자의 마음에 임재 하는데서 생긴다. 그러나 나를 볼 수는 없고 다만 그 힘을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행복하게 된다. 또 나의 현재에 의하여 그들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는 있으나 그 감정의 본체인 정신이나 마음을 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나는 영이기에 나의 사랑하는 무리에게 숨긴 만나가 되어 생명과 기쁨을 준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6. 병중에는 입맛이 없어진다. 비록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도리어 맛이 나쁘게 느껴진다. 그와 같이 죄는 영에 관한 미각을 상하게 만든다. 이런 상황아래서는 나의 말이나 은혜, 나의 임재도 죄인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7. 아무리 아름다운 꽃동산도 어미를 잃은 어린아이에게는 무용지물이다. 울며불며 보채던 그에게 어머니가 다가와 품에 안을 때에야 비로소 그의 마음은 평화를 찾고 다시 그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여유롭게 뛰노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무리들은 이 큰 세계의 동산에 있어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들이 마음을 끌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참 기쁨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8. 석탄의 한 조각을 취하여 그것을 아무리 씻어도 검은 것을 씻어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불 가운데에 넣으면 검은색이 변하여 붉은 빛으로 변한다. 그와 같이 죄인이 성령을 받을 때 그는 불 세례로 인하여 검은 죄의 더러운 것은 소멸되고 그는 세상의 빛이 된다. 석탄 속의 불과 같이 나는 나의 자녀들 안에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있어 나는 저들을 통하여 나 자신을 세계 중에 나타낸다.

9. 내 아들아! 만인의 심중과 그 형편은 내가 잘 안다. 나는 각 사람들의 중심의 요구에 응하여 나를 계시한다. 그러므로 아무 때나 나를 나타내지 않는 것인데 이를 모르고 사람들은 전 세상에 다시 나를 나타내주기를 바라며 그리하면 나를 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을 바른 길에 돌아오게 함에는 나만이 아는 적절한 시기에 그때 나를 계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인간을 위하여 나는 인간이 되었다. 즉 그들에게 신을 알리기 위함이다. 무서운 자나 또는 이상한 무엇이 되지 않고 사랑이 충만한 그들 자신과 같은 자가 되었다. 인간은 신의 모양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인간은 자기의 믿고 사모하는 것을 보고자하는 자연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볼 수가 없다.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를 이해함에는 그와 동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신을 조금 이해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신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신은 사랑인고로 인간에게 자기와 같은 사랑의 동질성을 부여하였다. 이 인간이 가진 사랑의 요구가 만족되기 위하여 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체를 취하였다. 그래서 내가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고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인간으로 있을 때 나는 아들이라 불렸으나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아버지이다.

10. 나와 아버지와 성신은 하나이다. 마치 태양 중에 열과 빛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열은 빛이 아니요 빛은 열이 아니다. 그 나타남은 다르나 근본은 하나이다. 그와 같이 나와 성신은 아버지께로서 나와서 세상에 빛과 열을 준다. 불 세례를 주는 성신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악을 태워 없이하고 그들을 순결하고 거룩하게 한다. 참 빛인 나는 모든 암흑과 악한 요소를 쫓아버리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며 마침내 영원의 본향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개의 다른 몸이 아니요 하나이다. 마치 태양이 하나인 것과 같다.

11. 신앙이 믿음으로 나타나지 않고 죄에 의해 부서지면 의심으로 모양이 변화한다. 사람들은 이 의심이 풀리면 믿을 수 있다고 여기나 의심은 믿음이 먼저 있어야 풀린다. 의심은 인간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일이기 때문에 신을 믿을 때 그의 감화로 의심이 풀리는 것이다. 상처가 나아야 통증이 가시는 것처럼 믿음이 있어야 의심은 사라진다. 하나님을 믿지 못해 생기는 의심은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 죄로 인해 인간과 신과의 연락이 끊어진 때 영의 통증인 의심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신과의 연락을 갱신할 때 마음에는 의심 대신에 평화가 깃 든다.

12.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자기의 모든 피조물과 인간에 사랑의 성질을 부여하였다. 우리에게 생명과 이성과 사랑을 주신 이유는 이 모두를 바로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사랑이 하나님과 그의 뜻대로 사용되지 않으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으로 변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 또 사람과 피조물 사이를 불화시킨다. 나는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이 다 이웃이지만 특히 가까이 생활하는 자들이 이웃이다. 이 이웃을 잠시 사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으나 날마다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이기면 자기와 같이 남을 사랑하기는 쉬운 일이다.

13. 내 말은 나의 현존과 같다. 진심으로 나를 구하는 자에게는 내 말을 통하여 나를 나타낸다. 이는 마치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내가 인간의 육체로(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난 것과 같다. 내 말은 사람의 언어로 나타나기에 사람들은 인간적인 이성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내 말은 영이요 생명이기에 성령의 영감에 의하지 않고는 육체로 나타난 나를 이해 못하는 것같이 내 말도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두뇌와 지식은 나에 대해 희미한 빛은 얻을지언정 나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육체의 작용에 불과하기에 그러하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나를 알아볼 힘이 없다. 생명은 영에 있고 영은 영으로 분별한다. 진실로 내 모습을 보고 내 말을 이해하려는 자는 영에 의해 움직이는 마음(육에 영향 받지 않는 마음)으로 느끼고 만지고 지각하여야 한다. 이와 같이 성서의 의미도 영적이다.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모국어인 성신의 감동으로 씌여져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믿음을 이성의 빛으로 만들어내려 하나 그것은 생명 없는 육체의 작용일 뿐이다. 믿음은 영의 기능이고 생명은 영에 있다. 정신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14. 자연도 나의 의해 쓰여진 언어이다. 그것도 하나의 성서요 계시이다. 나는 자연 가운데 내 자신을 자유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자연을 읽는데도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영의 눈이 열리는 자는 자연 가운데서 나를 만난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만 사는 자는 마치 소경이 손끝으로만 더듬어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것과 같아 이로서는 현존하는 세계의 참 형상을 알 수 없어 모든 것이 의혹 투성이다. 이런 자가 세상을 평하는 것은 아직 미완성인 그림이나 건축을 보고 그 결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

보이는 세계보다 안 보이는 세계가 더 본질이다. 보이는 모든 것은 안 보이는 세계로부터 온다. 안 보이는 세계는 내 뜻과 내 마음으로부터 지어졌기에 나를 만나는 자만이 그 세계를 볼 수 있다. 세상에 고통과 슬픔이 있는 이유는 전 창조물이 아직 완성을 향하여 진행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신은 하루에 이 모든 것을 지은 것이 아니요 또 하루 사이에 완성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인간이 저 멀리 앞에서부터 신과 같이 결점 없는 장래의 완성될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면 그는 신 앞에 꿇어 엎드려 오히려 신을 찬양할 것이다.

15. 사람의 영혼이 육체 중에 머물러 있는 것은 병아리가 껍질 속에 알로 있는 것과 같다. 껍질 바깥에는 모든 세계가 있으나 그 껍질을 깨기 전까지는 도무지 그 세계를 알지 못한다. 또 병아리의 눈과 날개는 그 세계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니 때가 오면 볼 수도 있고 날 수도 있으나 껍질을 깨기 전에는 그 용도를 알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신이나 보이지 않는 세계나 미래에 대하여서도 그러하다. 그 이유는 그 껍질과 같은 육체를 초월하여 높이 볼 수 없고 날개 같은 고상한 사상도 두뇌의 작은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의 약한 눈과 이성은 신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준비한 영원히 썩지 않는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보려면 육체로 있는 중에 신앙에 의하여 성령으로부터 생명의 힘을 받아야 한다.

16. 죄는 사람이 자신의 요구를 만족케 하여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신의 뜻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와 같이 행하는데서 참 행복을 가질 수 없다. 죄는 그 자신 독립적이지(그 스스로는 존재 못하고 타의 존재 곧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못하기에 창조물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상태나 조건의 이름이다. 하나님은 선이시기에 선만을 창조하신다. 사단은 그 무엇도 창조할 수 없다. 그는 이미 피조된 것을 악하게 할 뿐이다. 죄는 다만 존재의 허위요 선이 없는 기만적 상태일 뿐이다. 예컨대 빛은 실제 존재하는 어떤 물체이나 어둠은 물체가 아니요 빛이 없는 상태일 뿐이다. 선이 없는 이 악의 암흑상태는 가장 무서운 것이다.

만약 내가 인간을 일률적으로 기계와 같이 지어 타락을 막았다면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아담과 이와는 죄 없는 상태에 있어 거짓과 속임(이는 사단 속에만 있었다)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 까닭이다. 이 거짓과 속임 역시 사단 이전에는 없던 것으로 바로 사단에 의해 처음 생기게 되었다. 사단도 교만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은 사단 이전에 교만이 없던 까닭이다.(우리는 미지의 세계의 모든 사물을 잘 알 수는 없으나 빛만을 붙든다면 어둠 속에 빠지지는 않는다) 사단과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했을지라도 신은 가장 존귀한 결과를 취하셨다.

17. 사람이 죽는데는 모든 지체가 다 약하거나 무용하게 되어 죽는 것은 아니고 어느 한 부분이 병들었든지 혹은 정신이나 뇌에 타격을 받으면 그것으로 생명을 죽이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한 죄의 악독한 결과는 생명을 파괴한다. 또 이 죄는 한 가정, 한 국가, 한 민족을 파멸시킨다. 이의 대표가 아담의 죄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나의 한 마디 말은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

18. 혹시 금수나 조류가 인간가운데 오래 길들인 후에 자기 종족에게 돌아가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것은 악인이 성도나 천사들이 사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 같다. 신이 죄인을 지옥으로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의 거룩한 환경이 그들과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도 선인의 무리에 들기 싫어하였는데 어찌 하늘에서 영원히 함께 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생애를 마치기 전에 천국이나 지옥 중 어느 편에 접근한다. 그의 선악에 따라 그의 심중에 천국이나 지옥이 건설된다. 이 땅에 있을 때 주님의 말씀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인 영의 몸이 형성되고 성령에 의해 생기가 전해져 선을 행할수록 그 몸은 점점 아름답게 완성을 향해 지어져 간다.

19. 나비나 벌레들은 불을 보면 자신이 타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만 그 환한 빛에만 미혹되어 뛰어들다 죽는다.(이런 현상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뜻을 가르친다) 사람도 죄의 파괴적 세력은 주의하지 않고 그 화려한 향락에만 도취되어 멸망한다. 죄는 한 망상이나 상상물이 아니고 인간의 악한 의지의 활용에 의하여 일어나는 영적 암흑상태이다. 악의 씨는 그 영에 스며들어 마치 천연두가 단 시간 내에 사람의 미를 추악(곰보)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 영을 멸망케 한다. 신이 악을 짓지 않은 것처럼 병이나 고통도 짓지 않았다. 고통이나 병은 상상물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죄나 그가 일원으로 속한 가족의 숨겼던 죄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난 열매요 표상이다.

20. 인간의 두뇌에서 나오는 정신과 이해의 눈은 참 빛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고 오직 영에 의한 마음의 작용만이 인간을 깊은 데로 이끌 수 있다. 마음은 신의 궁전이기에 이곳에 신만이 왕으로 모셔질 때 우리의 이성과 지혜는 독립적으로 빛을 찾는데서 벗어나 마음의 깊은 움직임과 함께 작용하게 된다. 이 세상의 깨달은 자들이 참 빛은 받지 못한 채 이성의 빛으로만 모든 것을 바라보니 영의 일을 육으로만 풀려하여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는 마치 어둠 속에서 뱀을 잘못 쥐는 것과 같다.

사단이 이와를 꾀인 때도 동물 중에 제일 영리한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 이와가 마음에 계신 하나님을 찾기보다 자기 이성의 빛으로만 판단하도록 유혹하였고 또 그의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여 지식의 눈은 밝히고 마음의 영적인 눈은 어둡게 하였다. 오늘날도 사단은 철인의 지혜를 쓰고 박학자의 학문을 이용하고 신자의 이성과 지식만을 이용해 자신의 뜻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과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하여 여기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마음의 선이 따라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나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고 했던 것이다.

21. 사람의 영혼은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이 영혼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육체 내에 있기 때문에 마음과 두뇌에 있는 잠깐 동안의 죄의 행복에 취하여 참으로 무서운 미궁에 처하여 있는 줄 모르고 있다. 사단은 그를 삼키려 하고 죽음은 악어처럼 그를 먹으려 입을 벌리고 죄의 벌레는 육체와 정신의 뿌리를 갉고있는 사이에 영혼은 지옥의 영원한 밥이 되려고 한다.

22.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그는 참 평안과 구원과 영생의 확증을 마음에 인식하지 못하고 항상 허전함 속에 산다. 그 모든 것은 인간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게(주님) 있어 나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자가 얻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최고의 극기와 선을 하면 참된 기쁨과 만족이 마음에 흐르리라고 여기나 도무지 그럴 수 없다. 본디 인간 속에는 그런 것을 얻을 수 있는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청년이 나에게 와서 어찌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도 이런 이유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으로는 말씀대로 살았다고 자신을 여겼으나 마음은 늘 평안이 없기에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에 대한 최초의 사상이 틀렸다. 그는 나를 메시야로 보고 온 것이 아니고 훌륭한 선생중의 하나로 여겨 선한 선생이라고 나를 불렀다. 하지만 세상에 선한 자는 없다. 심지어 선생이라 불리우는 자들도 회칠한 무덤과 같을 뿐 그 속은 사악하다. 그런데 그 청년은 나를 선한 선생이라 부르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선한 분은 아버지밖에 없고 그 청년이 선하다고 생각한 것은 메시야로서의 내가 아니라 선생중의 하나로 보는 그의 선생들에 대한 인식이기에 나를 왜 선하다고 부르느냐고 했던 것이다. 그 청년의 잘못은 인간의 힘으로 선을 이루어 참된 평안과 구원을 얻을 수 있기를 배우려함에 있었다. 이런 잘못은 바울이라는 청년도 저질렀다. 그러나 앞서의 청년이 슬퍼하며 나를 떠난 것과는 달리 바울은 나를 만나 일체를 버리고 나를 쫓아 만족을 얻었다.

23. 기도는 다만 하나님께 구하여 필요한 것을 받으려는 노력뿐이 아니라 생명의 창조자이신 분을 붙잡고 생명을 보존코저 하는 노력이다. 사람은 기도를 통하여 그들의 필요 뿐 아니라 생명의 근원인 그를 발견하고 친밀한 교제로 인해 은사 충만한 영적 생명을 받는다. 이 기도로 인해 신령한 은혜를 받으면 자연히 물질적 은혜에는 생각이 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사물에 마음이 끌려 이것을 사모하게 된다. 기도는 신의 뜻을 움직여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숨은 뜻을 발견하여 변하여지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사람의 마음속 밀실에 신은 자신을 계시하고 그와 교통하며 그의 보배롭고 은혜로운 뜻이 계시될 때 인간은 불만족하게 여기던 의혹과 곤란은 영원히 떠나게 된다.

24. 기도는 성령 안에서 영이 생명을 위해 호흡하는 것이다. 그 중에 신은 성령을 부어주어 산 영이 되게 한다. 기도하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 그것은 기도 중에 성령이 인간의 영적 폐부 속에 들어가 영이 숨을 쉴 때마다 그 영을 건강과 능력과 무한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경히 여겨 전혀 기도에 힘쓰지 않는다. 공기, 열, 물, 빛이 사람에게 필요하듯 기도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는데 이보다 금, 은을 더 귀중히 여긴다. 이런 자는 그 육체가 주리거나 마음이 갈할 때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25. 이 세상은 영적으로 볼 때 넓은 바다가운데 사람이 빠져 살고있는 것과 같다. 이들은 바다 속에 사는 생물들이 때때로 해면에 나와 호흡함으로 다시 물 속에서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인생의 바다에서도 그 표면에 나와 밀실의 기도로서 생명의 성령을 호흡함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류는 비록 그 생애를 짠물 속에서 보내지만 그 몸이 짜지 않은 것은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까닭이다.(생명에 의해 짠기가 몸에 배이지 않는다) 기도의 사람도 죄 많은 세상 중에 살면서 죄에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해 기도로 생명을 호흡해야 한다. 바다의 짠물이 뜨거운 태양에 쪼이면 염분은 밑에 두고 증발하여 높이 올라가 천천히 구름이 된 후 아름답고 순수한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진다. 그처럼 기도는 의의 태양에 쪼이어 더러운 죄악을 버리고 높이 올라 하늘에서 큰 구름이 되고 은혜의 소낙비가 되어 내려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한다.

26. 배는 바다가운데 쓰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졌으나 구멍이 나서 바닷물이 들어오면 침몰한다. 신자도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나 기도로 계속 생명을 유지하지 않으면 세상 세력이 그 마음에 들어와 멸망한다. 사람의 마음은 신을 위하여 보존되어야 이 세상에서나 다음 세상에서 평강을 맛본다. 사람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으나 물에 잠겨도 죽는다. 세상 물건도 삶에 필요한 것이나 그에 빠지면 멸망한다.

27. 태양의 열과 빛은 모든 식물을 생육하고 아름답게 하나 반대로 시들고 말라죽게도 한다. 세상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모든 필요를 채워주지만 기도가 없어 영적 생명이 쇠하면 세상은 오히려 해를 준다. 우리는 세상에 있으나 세상을 초월하여 살아야 한다. 그래야 세상은 우리에게 해를 주지 않고 영적 생명의 진보를 돕는다. 어느 극히 더러운 장소에 꽃이 필지라도 그 꽃이 태양을 향해 있으면 빛과 열을 받아 향기가 더러운 냄새를 가시게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같이 신자도 기도로 나를 향해 있으면 나에게서 빛과 따스함을 받아 이 악한 세상의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영생의 꽃을 피울 수 있다.

28. 사도들은 내가 죽은 후 즉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기도로 준비한 후에야 비로소 성령의 넘치는 은혜를 받았고 또 그전에 주어도 받을 수 없었다. 만약 특별한 준비가 없이 은혜가 내린다면 사람은 그 가치를 모르고 이를 존중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이를 잃지 않고 길이 보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울 왕은 그가 집을 떠날 때 성령과 왕위를 구하고 나온 것이 아니요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나온 것이다. 그는 구하지 않았는데 이를 받았으나 홀연히 잃어버렸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신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든지 우리의 필요를 알지 못하기에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도는 우리 신앙의 자세가 신이 주고자 하는 축복을 받기에 더욱 합당한 자세로 변화시킨다.

29. 기도의 사람이라야 신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받이꽃과 같이 예배시간에만 근신하여 머리를 숙이나 예배당만 나오면 경건을 잊어버리고 전과 같게 된다. 신자도 기도를 게을리 하여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죄 가운데 멸망한다.

30. 학이 못가에나 논뚜렁에서 부동의 자세로 몇 시간이든지 서 있는 것을 보면 마치 신의 영광이나 맑은 물에 대해 묵상하고 있는 듯하나 실은 수면에 개구리나 송사리를 순식간에 잡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기도와 명상을 하긴 해도 신의 무한한 대양의 언덕가에 앉아 있으면서도 신의 존엄, 사랑 또는 죄에서 깨끗케 하고 기갈을 만족케 하는 신성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다만 이 아침이슬 같은 세상의 문제와 기쁨과 희락에 더 관심이 크다.

31. 물이나 휘발유는 다 땅에서 나오는 것으로 외형은 같으나 성질은 달라 하나는 불을 일으키고 하나는 불을 끈다. 사람들이 이 세상과 세상의 것으로 영혼과 마음의 극히 평온한 기쁨을 얻으려는 것은 일어나는 불을 끄려고 휘발유를 뿌리는 것과 같다. 또 아이가 파껍질을 벗기고 그 속에서 무슨 선물을 얻어보려 하지만 껍질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함과 같다. 사람이 영원의 기초를 얻기까지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공에 불과한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그 마음과 갈망을 지으신 신으로야만 참 만족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나에게 오는 자는 다시는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얻는다.

32. 세상은 신기루와 같다. 진실한 구도자가 그 영혼의 기갈을 만족케 하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나 만나는 것마다 실망뿐이다. 생명수는 인간이 만든 통이나 기구 중에는 없다. 그러나 나는 활천의 근원이기에 내게만 참 기쁨과 만족이 있다. 순결한 마음의 기도로 나에게 나오는 자는 그것을 발견할 것이다. 한 어린아이가 어미 품을 떠나 벼랑에 있는 꽃을 꺾으려다 굴러 떨어졌다. 유혹하는 꽃은 이 땅위의 짧은 향락들이다. 이를 위해 내 품을 떠나는 자마다 멸망으로 굴러 떨어진다.

33. 어린아이가 젖을 직접 빨지 않고는 젖을 먹을 수 없듯이 나의 자녀도 구함이 없이는 영혼의 양식을 받지 못한다. 아이가 젖 먹는 것이 본능이듯 세상의 철학이나 지식으로 배우지 않고도 나의 자녀는 본능으로 내게 기도한다. 나는 본디 인간성 속에 기갈을 두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이 큰 자요 신인 듯 생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마음의 기갈로 말미암아 인간은 신을 찾고 하루 하루가 그 조물주에 의해 지탱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사람은 인간의 결함과 필요를 깨닫게 됨으로 인하여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는데서 얻는 행복과 희열을 영구히 맛보게 되는 것이다.

34. 기도는 나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교제하여 내 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나와 같게 변화하는 것이다. 생물들이 보호색을 띄듯 기도로 나와 교제하는 자는 나의 성질의 분량을 가지며 나의 형상을 모방하여 나와 같게 된다.

35. 한 번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기 위해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나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내 영광의 몇 분을 보이자 그들은 마음이 끌리어 그곳에 거처할 장막 셋을 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니 만약 오래 바라던 천국에서 무수한 성도들과 함께 완전한 나의 영광의 몸을 받고 영원히 변치 않는 기쁨으로 사는 자의 행복은 얼마나 놀라웁겠느냐. 기도의 사람은 나와 함께 있으며 나의 성도들이 저와 함께 영구히 있을 것이다.

36. 자연력을 지배하는 기적의 능력보다 세상과 사단과 자기의 욕심을 정복하는 힘이 더 큰 능력이다. 만일 이것을 이룬 자가 있다면 그는 지상에서 나와 함께 천국생활을 하는 것이다. 기도 속에는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으나 바로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이런 자는 사단보다 월등히 높아져 사단이 주는 두려움을 능히 물리치고도 남는다. 사단과 자기와 세상을 제어하는 사람은 자유로이 영원한 천국생활을 지금부터 할 수 있다.

37. 벌이 각처에서 각색 꽃의 꿀을 모아 밀방에 저축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람은 피조물의 모든 부분에서 그것을 지은 신의 아름다운 사상과 감정을 모은다. 그는 세상을 달리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창조자와 교통하는 가운데 심중에 진리의 꿀을 받아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신이 함께 하는 평화와 기쁨의 꿀을 맛볼 수 있다. 기후에 따라 식물의 자라는 습관과 꽃의 모양, 빛깔이 다른 것과 같이 나와 교통을 계속하는 자는 영적 습관, 용모, 거동에서 낡은 옛사람을 벗고 나의 영광으로 썩지 않는 모습으로 동화되어 간다.

38. 때때로 사람들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나 내 안에 있지는 않는다. 그들은 내 이름을 입과 혀로만 나타내고 마음과 생활로는 하지 않아 기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이를 모르고 계속 같은 식으로 기도한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기도하려면 기도하는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평소 그들 신앙의 자세 곧 그들이 내 안에 있고 내가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얻을 것이다. 참 예배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그의 영안이 열려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쫓아 기도하게 되어 결과로 과거의 위선자라도 그 영안이 열려 참 신자가 되고 진실한 형제가 되어 심중에 희열이 가득하다. 그러나 입술로만 예배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간혹 기도하되 그 마음에 진실함이 없고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지도 않는다.

39. 기도는 모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한다. 과학적인 사람들은 모든 사물에 법칙과 질서를 정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법칙에 붙들리지 않고 법칙을 지배하는 주재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위대한 법칙의 부여자의 뜻은 알기 어렵다. 신의 의지와 목적은 만물의 축복과 번영에 있는 까닭이다. 이를 깨닫기 힘든 것은 영의 일은 영으로나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적을 경험한 자는 다른 모든 것이 가능케 된다. 거듭나서 기도 중에 그 영적 생애를 보내는 자와 세상의 물질 생활에만 몰두한 자와는 큰 차이가 있다.

40. 기도로서 영적 생애의 축복을 신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자는 의심 없이 순종하여야 한다. 한쪽 손 마른 자가 나에게 왔을 때 나는 그에게 손을 펴라고 명하였다. 그런즉 그는 믿고 순종하였다. 그 때 그의 손은 다른 손같이 완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즉시 순종하기 전에 이론을 하였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내가 손을 펼 수 있습니까? 만약 손을 펼 수 있다면 왜 당신을 찾아왔겠습니까? 먼저 내 손을 고쳐주시오 그러면 나는 손을 펼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은 말은 그럴 듯 하지만 그러나 그의 손은 펴지지 못하고 말 것이다. 손을 펴는 것은 사람의 일이다. 이는 믿음으로 해야한다. 그에게 영적 생명을 주는 것은 나의 일이나 이는 인간의 의지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식물의 참 생명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서 오지만 식물이 보이는 세상에서 물과 햇빛을 받아먹지 못하면 그의 외부 생명도 끝이나 버린다.

41. 신은 인간들이 신의 도움 없이는 존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아무도 단독으로 살 수 없고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 남을 위한 봉사는 곧 자기가 사는 길이지 신을 위한 봉사라 생각지 말라. 바로 네가 서장에서 경험한 것과 같이 어느 몹시 추워 얼어죽을 것만 같은 날 한 사람이 눈 속에 묻혀 죽게된 것을 보고 너는 그 곳에 가서 그를 일으켜 업고 갔다. 그로 인해 네 자신의 몸이 더워지고 그에게도 온기가 통하여 둘 다 살아나게 되었다. 사람이 신께 받은 재능과 힘을 신과 사람을 위하여 봉사하기 전에는 신이 주는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인간 자신이 본분을 다할 때 신은 그것을 완성시킨다.

나사로의 무덤에서 돌을 제거하는 일은 사람의 몫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일은 나의 일이다. 돌을 옮기는데 신의 특별한 힘은 필요가 없다. 나는 사람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나의 능력을 나타낸다. 나사로의 수의를 풀어주는 것도 인간의 일이다. 죄로 죽은 자들도 이와 같다. 생명을 주는 것은 나의 일이나 이에 장애가 되고 곤란이 되는 것을 제거하는 일은 사람의 일이다. 또 영적 생명을 받은 후에도 어떤 이들은 묵은 습관과 악한 영의 세력에 묶여있는 경우가 있다. 이를 끊어버리고 자유를 주는 것은 내 자녀들의 책임이다. 이와 같은 봉사는 그에게 끊임없는 각성을 준다. 빛을 비추이는 것은 나의 사랑이 하지만 그 빛을 인간이 자유의지로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는 계속 어두울 수밖에 없다.

42. 성신은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내린다. 수영을 잘하려면 설명과 교훈만으로는 안 된다. 친히 물에 들어가 연습하고 자주 숙달해야 한다. 처음에는 얕은 물에서 점차 깊은 곳까지 들어가 마침내 기술상 달인이 된다. 실제 신학교인 나와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 신앙의 비결이다.

43. 어떤 이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하나님의 일에 겁을 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능력이 약한데서 강한 모습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 사람은 병이 낫고 자양분을 먹으면서도 허약한 병신 같은 사람이니 이는 적당한 운동과 활동을 하지 않은 까닭이다.

44. 고통은 인간의 사곡한 반역적 성질에서 일어나 온다. 차고 더운 것은 지구가 태양에 대한 관계에서 일어난다. 그같이 사람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신과 조화 혹은 부조화의 상태를 가지게 된다. 신의 도리는 인간에게 영적 건강과 행복을 주려는 것이나 인간이 신에 배반하면 영적 고통과 번뇌가 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신은 그 뜻에 반역하는 모든 상태를 제거하는 대신에 인간으로 하여금 이 지상은 길이 살 곳이 아니요 이방 땅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다.

45. 이 세상은 영원의 본향에 가기 위하여 준비하는 곳에 불과하다. 종종 일어나는 타격과 번뇌가 그의 영혼을 각성케 하고 돌이키게 하여 하늘을 향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무심하고 부주의하여 진리에서 떠나 이 망하여 가는 세상과 함께 파멸할 것이다. 그는 이 고통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와 마음을 바치게 되고 이 유수 같은 생애의 고통과 비애를 해탈한 후 영원의 행복과 평화가 충만한 하늘로 가는 것이다. 고통과 번뇌는 독과 같이 쓰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독을 소독하는 것도 독이다. 그같이 나도 내 자녀의 영적 건강과 힘을 증진케 하기 위하여 고통과 번뇌를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들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고통은 없어진다.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이것으로 내 유일의 목적인 그들을 영원히 선하게 만들려는 까닭이다.

46. 아기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우는 것은 극히 필요하다. 그때 호흡이 시작되고 폐는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만약 울지 않으면 울기까지 두드려 주어야 한다. 나도 나의 자녀들을 고통과 번뇌의 매로 때려 울게 한다. 이는 그들의 기도를 통한 호흡이 영혼의 폐를 통하여 자유로이 사용될 때 그들이 새로운 힘을 얻고 한없는 생명을 얻어 살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필요를 느끼지 못해 울지 않는 자는 자신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7. 이 세상에서 내 안에 있는 자에게 나는 십자가의 고통을 안겨준다. 비록 그들이 피조물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들은 한 몸이다. 마치 육체와 영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나 육체 중 가장 적은 부분이 상처를 입으면 영이 곧 그것을 느끼는 것같이 나는 내 자녀들의 생명이요 영이며 그들은 내 지체와 같은 자들이다. 나는 그들의 모든 기쁨과 번뇌와 고통을 담당하고 또 적당한 때 그들을 구원해낸다.

48. 만약 세상이 너를 욕하고 박해해도 놀라지 말라. 이 세상은 안식할 장소가 아니요 전장인 까닭이다. 세상이 너를 칭찬할 때 화로다. 대개 그것은 네가 이 세상 어그러진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할 수 없다. 신을 버린 세상이니 너를 치욕스럽게 하기란 당연한 것 아닐까.

49. 신자와 불신자의 생활은 그 시초는 같으나 종말은 전혀 달라서 배암과 누에와 같다. 배암은 여러 번 그 껍질을 벗고 변하나 역시 배암으로 아무 변화가 없다. 그러나 누에는 보기 싫은 껍질을 벗어버리자 새로운 생명이 되어 아름다운 나비와 같이 공중을 날아다닌다. 그같이 신자는 이 육신을 벗어버린 후 영계의 영광 중에 들어가 영원히 천계를 날아다닌다. 비록 누에가 고치 속에 갇히어 압박과 부자유 중에 있는 것이 십자가에 비할 수 있으나 이 분투와 곤란의 상태가 그 날개에 힘을 주고 장차 오는 세상에 적당케 된다. 그같이 나의 자녀들도 육체에 있을 동안 영적 분투와 고통 중에 있어 탄식과 갈망으로서 그 구원을 바라나 그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중에 얻어 생활할 무한한 생명을 위하여 충분한 준비가 되는 것이다.

50. 순교는 오히려 쉬우나 매일 그 몸을 산 제물로 받치는 것은 어렵다. 죽기는 쉽고 살기는 어렵다. 그것은 신자의 생활은 나날이 죽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고통과 곤란, 비애와 번뇌가 구름같이 일어나서 눈앞의 의의 태양이 숨기워 지는 것 같을 때에도 혼란스러워 말라. 재앙의 구름은 드디어 은혜의 단비가 되어 네 머리 위에 내려올 것이다.


51. 천국과 지옥은 영계에 있는 두 개의 상반된 경지다. 이는 인간의 마음에 그 기원이 있고 그 기초는 세상에서부터 정해지는 것이다. 사람은 영혼을 볼 수 없고 또 그 영혼 가운데 있는 천국과 지옥의 모양도 볼 수 없으나 그 징조를 조금은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매를 맞은 후 그 타격으로 받은 상처가 점차 더하여 마침내 죽음과 파괴에 이르기 전 먼저 통증을 느끼는 것과 같고 또 과자를 먹은 후 이것이 소화되어 마침내 힘을 더하기 전 먼저 단맛을 느끼는 것과 같다. 이같이 한 깊은 죄행의 고통과 선행의 행복이 곧 어느 정도까지 이 세상에서 보응 되나 죄의 결과나 선의 결과는 마침내 영계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완전히 들어 나게 된다.

52. 사람이 한 가지 일로 언제까지든지 만족할 수는 없다. 항상 경우와 환경의 변화를 요구하여 세상에서 만족을 못 얻는다. 사람은 자아의 취미와 요구를 만족케 할 그 무엇을 구한다. 무상한 이 세상에서 사람은 불변의 확실성 있는 실재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만이 실재가 되기에 내게 와서야 사람은 만족을 얻게 된다. 그때는 변화에 대한 욕구는 없어지고 신과 인간의 교통 속에 받는 행복으로 피곤함을 잊어버린다. 이것이 영육의 유일한 목적이다.

사람이 혹시 그 마음에 아무 요구가 없는데도 문득 어떤 기쁜 생각이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천계나 음부의 영계에서 오는 감응이다. 저 세계로부터 오는 방사 감응을 받는 그의 마음은 점차 영적 습관이 되어 그 중의 어느 하나를 자기 마음에 적합한 것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같이 하여 천국과 지옥의 기초가 지상 생활에 있을 때부터 벌써 그 마음가운데 자리하게 된다. 그래서 사후 그가 세상에 있을 때 마음에 준비한 바대로 요구와 희망 곧 영혼의 성질에 따라 적합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53. 기갈이 있는 것은 이를 고칠 물이 있다는 증거다. 그같이 영혼의 요구가 있는 것은 참 행복과 평화가 있다는 보증이다. 영혼은 그 속에 갈망을 부여한 하나님을 찾아낼 때에 영혼의 만족 곧 천국을 얻는다. 세상의 사람들은 사랑의 대양 중에 있으면서도 마치 바닷물이 짜서 마시지 못하고 갈증으로 인해 죽는 것같이 신의 순수한 은총의 물은 그들의 반역과 죄로 인해 써서 마시지 못하고 갈증으로 죽게된다. 그러나 죄를 회개하고 나에게 돌아오는 자는 그 쓴 사랑의 대양이 달콤한 물로 변하여 만족을 얻게 된다.

54.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이 놀랄만한 평화가 나의 마음속에 있어 내 가슴을 헤치고 이를 보이고 싶다. 그러나 이 나라는 숨긴 나라라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 놀랄만한 평화를 지닌 사람이 죽은 후에 그의 가슴을 해부하고 그 안에 무엇이 있나 검사해 보아도 아무것도 없다.

55. 사람을 신이 자신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할지라도 그 품성, 감정, 능력은 인간마다 다르다. 이는 세상 꽃의 자태와 향기가 모두 각기 다른 것과 같다. 의의 태양이 이 지상과 천계를 비칠 때 신자는 신이 부여한 그 품성을 통하여 무한한 신의 영광과 사랑을 발휘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 중에 그들은 내 안에 있어 영구의 희열을 맛본다.

56. 사람의 마음에 이는 희열과 위안은 내가 임재함으로 일어난다. 이와 같은 영적 희열을 상상이라고 보는 것은 나면서부터 눈 먼 자가 겨울날 태양을 향하여 따뜻함을 받으면서 말하기를 이 따스함은 태양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 몸의 열에서 생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다. 나는 사람이 성신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창조하였다. 이래야 사람은 하늘의 생명과 희열을 받을 수 있다. 석탄은 자연적 불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산소가 없으면 불은 옮지 않는다. 그같이 성신의 산소가 인간의 영혼 중에 입구를 발견하기까지 사람은 암흑에 잠겨 영속적 평화를 즐길 수 없다.

57. 인간의 사상과 마음을 조화시키는 것은 성신의 자극적 고취가 필요하다. 이것이 있을 때 마음에 천적 분위기와 희열적 조화가 일어나는 것은 이 세상에서나 천상에서나 한 가지다.

58. 인간에는 간간이 평화와 행복이 떠난 듯한 때가 있다. 이는 혹시 불순종에 기인하지 않는가 잘 살펴야 한다. 그 때 나는 그들을 떠난 듯하고 그들은 불안과 적막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그들은 참으로 약한 자요 마른 뼈다귀와 같은 자신을 깨닫게 된다. 그런고로 그들은 자신의 근본적 허약함을 잊지 않고 교만에 빠지지 않는다.

59. 혹시 내가 신자들 마음 가운데 성신의 충만함으로 들어갈 때 그들은 비상한 행복과 희열에 넘쳐 기절하거나 혹은 무의식 상태에 빠지는 일이 있다. 그것은 혈육이 하나님 나라를 이을 수 없고 일시적인 것이 영구한 것을 받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때는 고통과 비애와 신음과 번뇌와 죽음은 다 없어진 채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것이 성신 안의 희열이다.

60. 우리가 실재에 대한 명상과 기도를 통하여 내적으로 깨닫고 느낀 모든 것을 속속들이 그대로 표현하기란 불가능하다. 영혼이 엄숙한 순간에 느끼는 일들을 우리의 언어를 가지고는 전부 나타낼 수 없다. 이 같은 진리는 말을 통하지 않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에게는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실제 언어는 참된 이해보다도 오해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61. 하나님은 그의 창조력으로 무생물을 만들어내고 그것에 생명을 불어 넣으셨다. 우리가 피조물로부터 받는 행복에는 한계가 있고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창조했으나 사람이 이를 얻지 못한다면 이는 그들이 죄악 가운데 있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보이는 것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은데 이들 무수의 종족은 하나님의 무수한 속성을 일일이 나타내고 있다. 모든 종족은 각자의 양에 따라 하나님의 성질을 어느 만큼 반사하고 있다. 죄인을 통해서까지도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었다.

62. 영이 어릴 때는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나 성숙해지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화신이며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게된다.

63. 사람은 말로서 자기의 인격을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 육체도 또한 인격의 본질인 영혼의 성질이나 능력을 충분히 표현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인격에 스며있는 많은 부분은 이 세상에서는 숨겨져 있으며 적은 부분만 표면적 바탕 위에 나타나 있다. 영적인 존재물은 영계에서만 완전히 드러난다. 그 때가 되면 외부는 내부와 같이 되어 상응된다. 이러할진대 영원한 말씀이 하나님으로서 그 성질을 육체를 통해 나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하라. 그러므로 그의 참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하늘에서 뿐이다.

64. 사람들은 볼 수도 없고 충분히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실재를 믿을 수 있는가 라고 의문한다. 나는 실재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실재를 믿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식으로 실재를 알기보다 실재와의 교제로 지식을 얻는 것이 올바르다. 전자는 외적 지식으로 실재의 겉모습만을 알뿐이지만 후자는 참된 실재요 참 지식인 것이다. 곧 누구나 자신의 심장이나 뇌수를 보지 못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또 지식으로는 모르지만 느낌으로는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영이 열려 실재와 교제가 이루어지면 실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우리 육체의 어떤 기관은 우리의 시야에서 감추어져 있다. 이를 보는 것조차 힘들진대 이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주 힘들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어떤 식물의 잎이나 꽃은 태양이 서쪽으로 지면 절로 오므리고 또 아침이 되어 햇빛이 그 위에 쪼이면 다시 열리는 것이 있다. 그들은 저의 성장과 존재를 위해 필요한 열과 생명을 태양으로부터 흡수하는 것이다. 우리도 기도에 의해 의의 태양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암흑의 위험과 어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충만히 될 때까지 성장한다.

66. 기도로 하나님의 계획을 변경할 수는 없다. 기도하는 사람이 변화되는 것이다. 수증기는 태양의 열에 의해 땅으로부터 증발하여 올라가 다시 비되어 땅을 적시며 윤택케 한다. 참된 기도도 성령의 불로 하나님에게까지 상달되어 죄악과 싸워 이기며 내려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땅위를 충만케 한다.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은 악마의 내습, 죄의 폭풍, 세상의 환란을 예지 하면 곧 신의 사랑의 깊은 바다 속으로 잠기어 영원한 평화와 조용한 가운데 지내게 된다.

67. 이 세상의 지혜로 실재를 알 수 없고 오로지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실재를 알 수 있다. 기도 중에 놀랄만한 평화를 느끼는 것은 기도 중 자신의 사색이나 상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혼에 임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작은 힘밖에 없고 큰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만약 우리 마음이 때때로 기쁘고 우수에 잠기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위치가 이리저리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상과 기도로 항시 하나님께 마음을 두면 계속 밝음을 마음에 유지할 수 있다.

68. 자연의 법칙은 인류와 다른 피조물의 진화와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때에 따라 역사 하실 수 있는 수단으로 있게 한 것이며 기적은 결코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높은 자연의 법칙이 있어 기적은 이 법칙에 의해 행해진다. 이 법칙은 기도하는 중에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최고의 기적이란 우리 영혼에 놀랄만한 평화와 기쁨이 충만 하는 것이기에 누구든지 이를 얻으려 애써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고통과 죄의 삶 속에 그런 평화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 아예 찾으려 하지 않고 있다. 사과는 더운 나라에는 나지 않고 망고는 눈 내리는 추운 나라에는 나지 않으나 조건만 잘 갖추어주면 상식이 바뀌어질 수 있다.

69. 누구든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수동적인 영이 되어 있다면 복음 전파는 필요 없을 것이나 그렇지 않기에 설교자가 필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기도에 의해 설교보다 더욱 뛰어난 일이 이루어진다. 한 사람이 동굴 속에서 기도하는 일이 많은 사람을 돕는다. 그로부터 감화력이 나와 멀리까지 퍼지는 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70. 때로는 물도 없고 비도 내리지 않는 곳에 싱싱하게 나무가 자란다. 잘 살펴보면 이들의 뿌리가 땅속으로 흐르는 물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기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세상의 비애와 죄악을 이기고 기쁜 빛으로 열매를 맺는 것은 그들 신앙의 뿌리가 기도에 의해 생명수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나무뿌리의 끝이 예민하여 메마른 곳과 돌멩이를 피하듯 기도하는 사람도 잘못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의 능력이 있다.

71. 두뇌는 미묘하고 예민한 기관이며 명상 중에 보통사람의 사상을 훨씬 초월한 보이지 않는 영계의 소식이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두뇌는 영적인 높고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의 통신을 받아 사람에게 알기 쉬운 상태로 번역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이는 이 같은 경험을 꿈이나 환상 또는 깨어있거나 명상 속에서 얻는다. 기도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와 영혼의 가장 깊고 민감한 부분인 양심이나 도덕적 의식을 비추어주나 사람은 이를 육으로는 느끼지 못한다.

72. 푸짐한 색채, 아름다운 음악, 놀라운 광경과 음향 등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부터 와서 두뇌 속 깊은 부분에 울린다. 시인이나 화가들은 그들에게 오는 보이지 않는 충동의 근원을 모르면서 무의식중에 그 얻은 것을 시나 그림에 나타내려고 한다. 그러나 명상하는 사람은 그것들 실재의 내심에 닿을 수 있어서 그 명상의 세계가 바로 자신의 영혼이나 영이 실제로 사는 세계인 것처럼 느끼며 실재와 축복을 생생히 즐길 수 있어 그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서 살게된다.

73. 우리들이 가끔 새로운 곳에 갔을 때 이전에 와본 일이 있는 것처럼 느끼고 웬일인지 그 곳과 자기와의 사이에 미쳐 몰랐던 관계가 맺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일이 있다. 이는 첫째 누군가 그곳을 방문한 후 그곳 일을 회상하는 경우 신비적으로 그 사상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어딘가 그곳과 흡사한 다른 장소를 본 일이 있기에 유사한 기억이 하나의 새로운 모양을 이루어 마음에 나타난 것이다. 셋째 보이지 않는 영계의 반응이 우리들 마음속에 내려온 것이다. 원래 우리의 영혼은 그 세계와 아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등사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영계의 일이 인간이나 자연을 통해 물질적인 형체로 표현된 것이 이 세상이다. 우리 마음은 이 두 세계 사이에 있어 끊임없이 양자와 닮게끔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가 명상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 양자의 관계는 보다 뚜렷이 지각된다.

74. 깊은 명상에 들어갈 때 영혼은 어느 덧 그 진상(실제 모습)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이를 감지할 수 있다. 우리의 사상, 말, 행위가 결코 외부로 나타나지 않고 마음속에서 생각으로만 그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소멸되지 않고 저마다 혼에 인 쳐져 박혀지고 생명의 서에 기록되어 남는다.

75. 하나님은 무한하며 우리는 유한하여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대양은 망망하여 그 전체의 넓이를 볼 수 없으나 적은 혀끝으로 바다가 짠물이란 것을 안다. 이같이 하나님에 대한 적은 부분을 우리가 앎으로도 그가 어떠 하시다는 것을 웬만큼은 이해할 수 있다.

76. 공포, 노여움, 또는 미친 상태에서 사람은 놀랄만한 일을 한다. 이러한 힘은 원래 인간에 주어진 것이나 그 힘은 한 가지에 정력이 집중될 때에 나타난다. 인간의 힘은 명상을 통해 하나님의 힘으로 강해지며 큰 일을 할 수 있다. 마음이 한 가지 생각에 집중되어 있을 때 설사 눈을 뜨고 있다해도 꽃의 향기나 음악의 매력이나 자연의 미에 마음이 끌리지 않는다. 그때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다. 이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영적 실재는 존재해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사람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77. 어느 날 나는 꽃을 보고 그 향기와 아름다움에 대해 깊게 생각하다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만들어진 만물의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나의 영혼 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나는 더욱 기뻤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로부터 시야로는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영의 임재로는 한없이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78. 그리스도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제자들에게도 그의 교훈을 기록하기를 부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인 까닭이다. 생명은 생명 있는 자에게만 주입 할 수 있고 책의 페이지에 주입할 수 없다. 또 세상의 선생들은 모두 사라져 감으로 그의 제자들은 책을 통해서 교훈을 받도록 되어있다. 이는 살아있을 때의 말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그 제자들만을 우리 옆에 남기고 자신은 사라지기를 원치 않는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산 음성과 임재는 영원토록 가르침을 준다.

79. 이 세상에 욕구가 있다는 것은 그 충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마름은 물이 있다는 것의 증거이며 굶주림은 음식이 있다는 것의 증거다. 영원을 향해 살고 싶다는 것은 그것을 얻을 길이 있다는 증거다. 더욱이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만족할 수 없는 보다 높은 영의 요구를 가지고 있다. 물질계는 이에 대해 만족을 못 주고 영계만이 이를 해결한다. 영혼의 참된 요구는 이를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요구 속에는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요구도 부여되어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모양을 닮아 사람을 만드셨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원하는 영적인 성질을 주셨다. 동류가 서로 그리워하며 찾는 것은 존재의 법칙이다.

80. 마음의 창조주가 아니고 누가 병들어 깨어진 마음을 고칠 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를 빼고 누가 죄인을 성자로 고쳐 만들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다. 공간에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중력은 영적인 중력이 물질계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력은 사랑이며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다. 하나님의 인내는 육중한 중력만큼이나 무한하다. 인간은 적은 솥과 같아 조그만 악에 대해서도 금방 노여움이 끓어오르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81. 만약 두 사람이 같은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서로 싸우고 질투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면 그들은 서로 시기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자기들 외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게 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 나온 사랑과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진 사랑의 차이점이다.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동일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용량에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들 마음속에 계실 때 우리들 전체는 그리스도처럼 화하게 된다. 소금이 물 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보이지는 않으나 그 물을 맛보면 소금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처럼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가 우리에게 주는 사랑으로 사람들은 그를 똑똑히 알게 되는 것이다.

82. 사상은 그저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오는 외측의 현상에 대한 반응 뿐 아니고 영적 감각을 통하여 오는 현상에도 응답하는 것이다. 즉 사상은 내외의 세계 모두를 연결하고 있어서 사상 속에는 육체의 일들 뿐 아니라 영의 일들도 혼합되어 있다. 사상이 일어나는 마음이 완전을 향해 전진하는 것은 내적 사정과 같이 외적 상태에도 관계가 있다. 외측의 감각을 통하여 외적인 세계를 알며 내적인 감각을 통해서 내적인 영계를 안다. 마음속에 사상이 일어나는 것은 그저 생각하는 마음의 기능만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며 그 사상의 대상물의 존재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 사상은 어떤 사물이 우리의 마음에 던져질 때 그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향기 그윽한 곳에는 꽃이 없으면 안 된다. 비록 그 꽃의 모양이나 색깔이 우리의 눈에 숨겨져 있는 경우에도 향기는 꽃의 존재를 증거 해준다. 그처럼 사상은 목적물의 존재를 의미한다.

마음은 그 앞에 다가온 어떤 존재에 의해 반응을 일으키는데 이는 흡사 거울과 같아서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 앞의 실체가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거울이 좋든 아니든 비춰진 모습은 그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거울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실체를 그 속에 다만 투영시킬 수밖에 없고 또한 그 모습을 창조할 수 없으나 마음은 생명을 갖기에 사상을 만들어내고 그 만들어진 사상에 따라 대상물이 실제로 존속하는 것이다.(사실은 존재에 따라 사상이 일어나는 것이 순서이나 마음은 사상을 변화시킴에 따라 존재를 갈아치울 수도 있다. 그러나 거울은 그 앞에 선 존재만을 투영할 뿐이다.) 다른 면에 있어서도 마음은 거울과 흡사하다. 그 속에서 외측의 사상을 반영하고 때로는 무의식중에 그 자신이 반영하는 추상적 사상은 실재의 불로부터 튀겨나는 불꽃과 같이 근원의 존재를 표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 속의 회상은 언제나 실재와 일치한다고 볼 수 없다. 즉 마음은 허위를 반영할 수도 있다. 그것은 각 사람에 따라 다르고 수용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상은 현재 아주 불완전하나 끊임없이 그 앞에서 생활하는 동안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참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83. 인간의 지식으로는 실재를 알 수 없고 한 가지 사물도 완전히 알 수 없다. 한 가지 일을 완전하게 아는 일은 전 우주를 아는 일이며 어떤 한 가지 일은 다른 모든 일과 관련되어 있으므로 그 일을 전부 알기 위해서는 관계 있는 모든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재 앞에 무릎꿇고 엎디어 참된 신앙을 가질 때만 진보하게 된다.

84. 직관은 손끝처럼 예민하며 곧 그 접촉에 의하여 실재의 존재를 느낀다. 그것은 논리적인 증명을 줄 수 없지만 나는 만족하다고 밝히는 그것이 논증이다. 이런 평화는 오직 실재에서만 오는 것으로 마음(직관을 느끼는)은 두뇌(지식을 저장하는)가 모르는 이론을 갖는다. 예를 들면 꽃에 대해 배우려면 많은 시간을 요한다. 그러나 향기를 즐기는 일은 순간에 할 수 있다. 직관도 이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85. 자연의 법칙에 의하면 완전에 도달하는데는 순서를 따라 조용히 성장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우리는 성장하며 목적에 적응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할 수 있다. 갑작스럽거나 조급한 진보는 우리를 허약하고 불완전하게 만든다. 환경이 좋은 가운데만이 완전한 것이 된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안전한 환경에 들어가기 전에 불완전한 환경을 통과해야 한다. 그 속에서 노력하고 분투하여야 강하게 된다. 이는 누에가 고치 속에서 고투하여 아름다운 나방으로 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완전에 이른 후 뒤돌아본다면 우리를 방해했던 것들이 우리를 도와 완전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6. 이 세상의 정부는 단지 하나님을 왕으로 하는 하늘나라의 정치모형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선과 질서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없다면 즉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행정자나 또는 지배를 받는 모든 인민들을 전체 지배하는 하나님이 없으면 이 세상의 정치는 멸망으로 나아갈 것이다.

87. 그리스도는 치욕의 십자가를 영광으로 바꾸셨다. 지난 과거의 십자가는 치욕과 죽음을 의미했으나 그것이 지난 지금은 승리의 생명을 표현한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자는 그 십자가가 그를 받쳐 안전하게 그의 목적을 이루게 하는 것을 경험한다.

88. 어느 목자가 한 마리 양의 다리를 분질렀다. 이유는 그 양이 다른 양을 절벽으로 인도하고 목자가 먹을 것을 줄 때면 손을 물려하기 때문이다. 그 뒤 그 양은 아주 잘 훈련되어 목자를 기쁘게 했다.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를 비애와 고통을 통해 고치신다.

89. 음악, 향기, 맛, 온도 등 이러한 것은 만약 우리들이 적당히 쓰기만 하면 즐거움이 된다. 이들이 충분치 못하거나 지나치면 괴로움을 느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외의 감각을 주셨다. 우리는 이것에 의하여 앞에 오는 위험을 경계하며 참된 행복으로 인도된다. 고통은 우리의 육체나 마음의 어느 쪽에 나쁜 부분이 있다는 징조이다. 안식과 행복은 실재의 법칙에 따라 순종한 결과이다. 고통이 우리 육체의 각 기관에 대한 위험경보인 것같이 영혼의 고통과 불안도 죄로부터 둘러싸여 있다는 경고다. 육체의 촉각처럼 양심도 위험과 멸망이 가까워짐을 경고하고 우리로 하여금 발을 돌이키게 한다.

90. 인간은 우주의 한 부분이며 또 그것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인간을 보면 우주를 짐작할 수 있고 나아가 우주를 만든 하나님을 그려볼 수 있다. 이는 피조물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을 닮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서는 인간만이 피조물을 해석할 수 있다. 자연은 그저 침묵으로만 말한다. 대신에 사람은 자연의 언어이다. 인간은 자연의 침묵에 의한 속삭임에 대하여 말을 불어넣는다. 자연은 말할 수 없기에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다. 이는 사람만이 자연의 마음을 알고 그 상태를 알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91. 인간은 제한된 피조물이므로 그 내외의 감각도 제한되어 있다. 인간의 능력은 모든 피조 세계의 극히 적은 부분을 알아내는데 지나지 않으며 그 전부를 알기 위해서는 무수한 감각이 부여되어야 한다. 감각은 제한이 있으나 마음은 끝없이 넓은 세계를 무한히 날 수 있을 정도로 제한이 없다. 감각은 이런 제한이 있으나 마음은 지식에 의하지 않고 지식이 이해하지 못하는 실재를 알아낼 수 있다. 사람의 눈은 아주 작으나 자신의 발이 이를 수 없는 먼 곳의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눈은 몇 백 만리 저쪽에 있는 별을 보며 그 운행을 알고 빛을 즐긴다. 이같이 마음의 눈도 무한한 하나님의 깊이를 판별해 알며 마음의 요구에 만족을 주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논증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사람들을 권고한다.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마음 속에 있는 세계는 무한히 크다.

92. 인간은 죄에 빠져 더럽혀 지더라도 진리를 존중히 여기는 것을 좋아한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자기는 거짓을 말하지만 남이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또 자기는 악행을 할지라도 남이 악을 행하는 것을 싫어한다. 이것은 인간이 무의식중에도 진리와 정의를 구하고 또 그것을 존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을 창조한 이가 그러한 마음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리를 거역하며 산다면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는 신이 지어주신 자신의 본성과 상반되기 때문이다.

93. 진리의 형상은 여러 가지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양에 따라 진리의 다른 각 국면을 볼 수 있다. 하나의 나무를 보면 어떤 이는 열매에 다른 이는 그 꽃에 마음을 둔다. 사람들은 나무가 자기에게 주는 감상에 따라 제각기 평가한다. 철학자, 과학자, 시인, 화가, 신비가 등 모든 이는 그 수용 량과 감수성에 따라 진리의 다른 면면을 구별하고 묘사한다.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알아내기 위하여 다른 여러 방면에서 관찰하여야 한다. 전심 전령을 가지고 찾는 자가 실재를 만나 진리를 알게 된다. 이는 그가 진리를 구하기 전에 실재가 먼저 그를 찾아서 축복된 교통을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94. 양친의 병이 어린이에게 유전하는 일은 있을 수 있지만 부모가 수족이나 눈을 잃었다해서 어린이가 절름발이나 장님으로 태어나는 일은 없다. 원죄도 그와 같아서 선악의 모든 성질이 양친으로부터 어린이에게 유전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이의 성격은 그가 자각하여 행한 행위의 결과에 기인한다. 능력이나 성품은 적은 부분을 부모로부터 이어받는 것이지만 그들의 성장과 발달은 대부분 그들 자신의 노력에 따르는 것이다.

95. 원래 있던 어떤 사물에 의해 생긴 그림자 때문에 우리가 어둠 속에 있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지만 우리 속에 솟아오르는 악의 구름에 의해 우리가 의의 태양을 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96. 의지가 약해지며 무력화되는 것을 사람들은 자신의 본래의 성품으로 돌린다. 그러나 그것은 죄라는 것 때문에 일어남을 사람들은 모른다. 곧 죄 문제가 해결된다면 마음은 강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죄가 공격해 오는 것을 보며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당하기만 한다. 적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여기 있다. 눈이 많이 쌓이는 곳에서는 짐승, 새들이 흰옷으로 자신을 감싸 주위의 자연과 같이 보호색이 되어 적의 공격을 면한다. 우리도 주님의 품에서 변화되어야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보호받을 수 있다.

97. 인간이 무서워 할 적은 단지 범이나 호랑이같이 큰 동물만이 아니고 미세한 균도 대상이 된다. 우리 영혼의 적도 큰 죄뿐이 아니고 작은 죄도 그 대상이 된다. 이는 나타난 죄보다 나타나지 않고 언젠가 나타날 죄가 더 근본이고 또 죄의 기원이 되는 속에 있는 악념이 더욱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악념은 마음속에 역사 하여 전 영혼을 멸망시킨다. 자기의 악한 생명을 죽이기 위해 독이나 무서운 기구 등의 고행을 사용하는 대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기도를 사용해 보라.

98. 우리는 나를 위해 사는 길이 나를 살리는 길이라 여겨 내 중심적으로 산다. 그러나 나를 돕기 위해서는 남을 돕는 수밖에 없는 것이 하늘 나라의 법칙이다. 스스로 나를 살리는 길은 나를 상해하는 길이요 나를 살리려면 먼저 남을 살려야 기쁨이 그 속에서 나와 우리를 살린다. 모든 죄와 그 결과들인 고통이나 불안 두려움 등은 자기중심으로부터 생긴다.

99. 죽음이 오는 때에 우리의 의식은 죽는 것이 아니고 또 먼 곳으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이 시작되며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모태에서 나와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새롭게 시작하는 장소도 이전 세상과 별반 다름이 없는 분위기이다. 육체를 나온 후의 영이 거하는데는 육체가 살던 세계와 같다고 할지라도 전보다는 훨씬 뛰어난 영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태 속의 어린이와 육체중의 영혼은 다같이 미래의 상태에 관해 무지이다. 이것들은 그들의 눈에 숨겨져 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온 어린이는 그들이 나온 태를 볼 수 없듯이 육체를 떠난 후의 영은 어떤 조건 하의 경우 외에는 그가 나온 육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유는 그는 항상 영계에 살며 육의 세계는 거치른 물질을 영속에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아는 탯줄을 끊고 모체로부터 떨어지듯 영은 은줄을 끊고 육체로부터 떠난다. 어린이에 있어서의 모태나 영혼에 있어서의 육체는 다 같이 미래를 위한 준비의 장소이다. 영은 육체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거기서 참된 목적과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100. 만일 우리의 지식이 무한하다면 신앙이 없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 보잘 것 없어 거의 없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앙이 없으면 죽어 있는 상태를 살아있다고 여기는 우를 범하게 된다. 또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의 지식은 무한한 것이 못된다. 신앙에 의해 우리는 성령의 불 세례를 받는다. 물세례(지상의 의식과 사물의 외관, 인간의 지식 등)만으로는 겉만 깨끗해질 뿐 속의 순결과 구원을 위해서는 충분치 못하다.



101. 성령을 받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전 생애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따랐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위대함과 신성은 이해할 수 없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3년 간을 생활했다.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병을 고치고 복음을 전파했으나 그리스도가 죽자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자 엄청난 힘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었다. 지금시대는 그리스도를 따르면서도 그의 능력과 신성을 경험하지 못한 신자가 많다. 이는 회개와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102. 교만하게 되면 절로 자기도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 멸망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남보다 진보하였다 할지라도 다이아몬드가 석탄과 같은 원소로부터 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이아몬드가 아무리 값비싸다 해도 석탄과 같이 완전히 타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들 서로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103. 우리가 절벽 위에서 밑을 볼 때는 현기증을 느끼지만 하늘을 쳐다볼 때는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위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밑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발견하고 마음이 안온하지만 얼굴을 하나님으로부터 돌릴 때는 실재로부터 떨어져 내려가 산산이 부서질 위험이 있다.

104. 참된 시간 즉 실재와의 관계에 있는 시간 그것은 영원이다. 세상의 시간은 참된 시간이 지나가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과거나 미래가 없고 모두가 현재이기 때문이다. 지혜에 있어서 무한하신 실재자 앞에는 과거나 미래가 함께 그 앞에 서있다. 그러나 우리 감각에 있어서 현재는 존재치 않고 그저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모든 순간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미래에서 과거로 옮아간다. (실재자는 변화를 모르나 피조물은 계속적인 변화가 있다)

우리는 현재에 산다고 하나 사실은 미래로부터 과거로 지나가는 정점인 현재는 우리에게 잡히지 않으므로 인식되지 않고 과거나 미래도 또한 우리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범위에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제에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다. 우리가 잠에서 깨었을 때에 잠 속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으나 실제로는 오랜 시간을 지낸 것처럼 느껴지며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에도 슬픔과 고통 중에는 하루는 1년과 같이 여겨지며 기쁨 속에서는 1년은 하루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시간은 이처럼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시간은 실재가 아니다. 실재에 있어서는 모든 경우가 참된 현실이다. 우리는 영원한 실재를 위해서 만들어졌으므로 시간에 대한 감각을 느낄 수 없다. 실재는 시간이나 거리가 아니고 상태의 변화일 뿐이다.

105. 시간은 공간에서 생긴 일이나 사물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이것을 공간 속에 내어놓을 때 생기는 상태의 변화가 시간을 만들어낸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을 때 그것이 실재다. 변화가 끝났을 때 그것은 과거다. 변화가 일어나려고 할 때 그것은 미래다. 사물이 변화할 때에 시간도 또한 그것과 더불어 미래나 과거 속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실재는 그 자신에 있어서나 그것과 결부되어 있는 영원에 있어서도 변화하는 일이 없다. 시간은 변화하고 망각 속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 속에서 행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 속에 흘러들어 간다.

106. 그리스도의 능력과 임재는 이 세상의 철학과 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참된 기독자의 생활과 경험에 의해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 모두 신에 의해 만들어진 자며 그 자녀이지만 양쪽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쪽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며 이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으로서 그의 모습을 닮아 동화되고 생명과 영원의 축복을 이어받는다. 그러나 불신자는 무지한 까닭에 진리의 암영 속을 걸으며 자기의 의지가 요구하는 것만 좇아 참된 것으로부터 떨어져 방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끊고 산다.

107. 진리를 추구하는 자는 그 종교적 성정의 요구를 채우기까지는 결코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 깨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진정하려고 하여도 그 평안을 얻으려는 강력한 욕구를 누를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마음의 요구를 죽이며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한 자는 어느 정도 평안한 듯 하나 그것은 죽은 평화이다. 평화를 구하는 영혼의 욕구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족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108. 선다싱은 예수를 알기 전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으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어느 날 주 예수께서 일순간에 그의 마음을 변화시켰으며 불안한 영혼에 참된 평화를 주시어 많은 사람이 자기 몸을 괴롭게 하면서 까지 얻으려 하다가 실패한 그 평안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세상의 논리를 초월한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지혜이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여 고행으로 육체의 요구를 억제하려는 것은 그 마음은 가상하나 그로 인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필요한 때는 은혜로 얻은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육신을 훈련시키는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다.

109. 인도의 영적 지도자인 ‘간디’ 조차도 고백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는 실패하고 있다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며 오직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되실 뿐이기에 굳이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랑으로 알 수 있는 분이다. 간디는 아직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그러나 그를 구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자신이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이처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그의 끊임없는 고민이라고 어느 날 고백하였다.

110. 어느 구도자는 동굴에 영원히 유폐하여 산다. 그는 말하기를 “제가 이렇게 사는 동기는 무엇을 얻고자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제 모든 요구를 오히려 버리기 위해서 입니다. 즉 괴로움이든 평화이든 그 모든 것의 느낌과 요구의 멸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암흑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이 종말이 올 줄 모르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지금의 제 부족함 곧 미완성의 부분은 재생할 때 전해져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요구와 감각의 기능을 가지고 출생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런 요구들이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것을 없이하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면 그는 그런 것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구를 죽이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자살이다. 하나님은 선의 하나님이기에 우리가 괴로움을 겪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대신 평화를 얻기를 원하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화를 얻으려 요구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괴로움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평화가 없는 상태로 우리 스스로가 처해진 상황일 뿐이다.

또 만약 요구를 버리려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요구를 죽이려는 자체가 벌써 하나의 요구이기 때문이다. 좋은 요구는 말살시키는 것보다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나 어떤 것이 참으로 나에게 참된 기쁨을 주는 요구인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111. 어느 기독교 단체에 속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 중에는 다름 사람보다 훨씬 큰 일을 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보통 신자가 갈 수 없는 곳에 더욱 그러하다. 요한도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는 것을 보고 자기네들을 따르지 않기에 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라고 하셨다.

112. 세상에는 드러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비록 대중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고백을 하지 않으나 자신들끼리는 고백을 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게 일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은밀히 해야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우리 몸을 보면 각 기관들이 있어 서로 한 몸을 위해 각자가 맡은 일이 다르다. 크리스천은 모두 소금과 누룩이어서 소리 없이 다른 것에 맛을 내고 불게 만든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 부르셨다. 어부는 그물을 던질 때에 소리나지 않게 해야 고기가 도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일을 위해 소리 없이 드러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113. 두 설교자가 설교하러 시장에 나아갔다. 먼저 설교한 자는 현명하고 웅변도 좋았다. 그가 말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한 사람이 질문하였다. 설교자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대답하였으나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자연히 사람들은 옆의 다른 설교자에게 눈길을 돌려 그 대답을 원하는 눈치였다. 다른 설교자가 일어서 대답을 하려하자 그 질문자가 막으며 정중한 경의를 표하며 군중을 둘러보며 말하였다. 나는 이 분에게는 질문할 것이 없다. 그것은 내가 그의 생활을 알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는 것을 보고 그를 통해 구원의 도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설교자에게서는 이러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입으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말을 듣고 난 그 웅변가는 조용히 돌아가 회개하여 그 후 참되게 하나님을 믿고 전하는 자가 되었다.

114. 구하는 자는 찾아내며 찾아낸 자는 다시 그 이상을 구하는 법이다. 파스칼이 말하기를 “네가 만약 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를 찾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라면 그는 하나님을 이미 찾지 않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임재에 대한 지각을 이미 주셨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계시지만 그를 붙잡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주의하여 하나님께 연결이 되어야 한다. 공중에 전파가 아무리 많이 날아다닐지라도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115. 우리는 주님을 왜 믿는가. 우리가 헤어날 수 없는 곤경에 빠져있을 때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주었기 때문인가 아니 이보다 직접적인 경험에 의해 주님은 참된 우리의 구주시며 세상의 구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인가.

116.

117.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기 전에 새로운 피조물로 고쳐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죄에 더럽혀지고 타락한 낡은 인생은 그를 알 능력을 갖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그를 알기 전에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성질이 우리의 것으로 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그를 참된 하나님으로 알게된다.

118. 인간은 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했을 뿐 아니라 또한 죽은 것이다. 마치 공기를 보지 못하듯 그 주위에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자는 공기 속에 누워 있으면서도 호흡도 하지 않고 감각도 없듯이 죄로 죽은 자도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지 못하고 기도의 호흡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담에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셨을 때 그는 생령이 되었으나 죄로 그 생명은 죽었기에 주님이 다시 생명의 입김을 불어 넣으셔야 할 필요가 생겼다.

119. 우리가 태양을 보려면 태양 자체에서 나온 빛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보는데도 그냥은 볼 수 없고 주님에게서 비쳐지는 영적 빛의 조명을 받아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보려면 영적인 시력이 열려야 한다. 부엉이와 박쥐가 눈은 있어도 낮에 비추이는 태양으로부터 도움을 얻지 않아 볼 수 없듯이 장님과 영의 눈먼 자도 보려해도 볼 수 없는 것이다.

120.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영적인 지식은 이 세상의 지식과 다르다. 그것은 세상의 지식과는 다르게 논리적인 것이 아니고 직관으로 더욱 환하게 보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상이나 지식은 때때로 어리석은 이야기가 되어 내적인 소리를 침묵케 하고 거기에 기교를 섞어 오히려 사람들을 어리석게 한다.

121.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만의 경험을 많이 해야한다. 또 참된 영적 지식은 오직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만 온다. 하나님은 마음의 은밀한 골방에서만 사람과 이야기하시며 우리는 거기서 조용하고 잔잔한 소리를 듣는다. 이런 때 그의 자녀에게는 숨기지 않고 계시하신다. 이 세상 지식은 귀납법에 의하여 얻을 수 있고 영적 지식은 하나님의 빛을 받은 직관(논리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음)에 의하여 얻는다.

122. 해는 그 빛과 열로 수목의 성장을 돕지만 만약 나무에 병이나 결함이 있으면 같은 빛과 열은 오히려 그 나무를 죽인다. 이것은 태양의 잘못이 아니고 나무 자체의 상태에 따른 것이다. 그처럼 사랑의 하나님이요 생명의 빛 되시는 주님도 인간의 영적 발달을 위해 도움이 되는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인간 자신의 성질에 따라 생명 주는 빛을 변하게 하여 자신의 멸망을 초래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과 같게 만든 인간을 상하게 할 자는 인간 자신밖에 없다.

123. 하나님 없이 인간이 생활한다는 것은 벌써 그의 영적 지각과 감각이 둔해지도록 자신을 손상시켰다는 말이요 이때부터 남도 손상시킨다. 내 영적 감각이 죽으면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124. 우리의 내적 욕구를 만족시켜줄 사물이나 장소는 이 세상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욕구는 육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혼과 그 욕구를 만드신 자에게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재산과 많은 것을 소유하고 왕궁에 살지라도 행복이 없으며 그리스도인이 비록 빈곤과 곤란과 고뇌 속에서 가지는 것만큼의 행복과 평화를 가지지 못한다.

125. 물질의 특별한 용도는 우리의 영혼의 집을 보존하는데 필요한 만큼 정당하게 쓰이는데 있다. 만약 그 용법에 적당한 용도를 넘어서면 영혼을 제 2의 위치에 놓고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된다.

126. 많은 사람들이 그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있으나 모두가 좋아서 지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어서 짊어지고 있는 것이며 이는 구레네 시몬이 진 것과 별로 다른 바가 없다. 이들은 결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127. 주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승천할 때는 자기 있는 곳에 모든 사람을 이끌 것이라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무한한 사랑은 마치 자석과 같이 속에 끌리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인다. 주님의 요구는 그가 있는 곳에 그를 섬기는 자도 있게 하는 것이다. 세상 전체가 골고다 주님의 좌우에 선 강도들과 같은 모습으로 서 있다. 한 편은 주님을 시인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천국에 들어가지만 다른 편은 회개하지 않고 도움도 구하지 않아 멸망으로 간다. 이 강도들의 모습이 바로 세상의 양편으로 갈라진 사람들의 운명이다.

128. 물이 가득 있는 통 속에 컵이 담겨져 있고 그 컵 속에 또 물이 담겨있다면 물과 컵 중 어떤 편이 어떤 편 속에 있는 것인가. 이 관계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이다. 컵은 엎드려져도 자빠져도 통 속의 물 안에만 있다면 컵 속의 물은 쏟아지지 않는다. 우리는 주님 안에 살며 주님도 우리 안에 사신다. 또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우리도 또한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신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이다.

129.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지만 은총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하게 될 수 있다. 구원도 우리가 현재 온전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구원을 얻은 후 그 토대에 서서 드디어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육체, 무능력한 허약의 육체, 이미 죄에 의해 썩을 대로 썩은 육체 속에 유폐되어 있다고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육체에는 매일 많은 먼지가 끼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매일 목욕을 하면 그것은 우리를 손상치 못한다.

우리에게 부족함과 약점이 무수할지라도 생명의 생명이요 영의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 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해도 실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완전을 위한 싹을 가지고 있으며 장차의 완전은 이 위에 근거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녀로서의 모습으로까지 우리를 끌어올리신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때에 이르러 우리를 더욱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130. 위험은 항상 창조자에게 받쳐야할 마음을 피조물에 두기 때문에 생긴다.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모든 사물 속에서 창조주의 뜻을 찾고 그에 모두를 맡기고 신뢰할 때 평화가 오고 이를 어길 때 불안이 생긴다. 불안은 신과 무엇인가 어긋났다는 표시이고 평화는 신과 조화한다는 표시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치 물과 같아 인간이 그 물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지만 또한 그 물 속에 빠져도 죽게 된다. 이처럼 은총으로 주어지는 물과 같이 삶의 주류로 보이는 이 세상의 것들이지만 이것들에 인간이 하나님보다 더욱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은 오히려 독으로 변해 우리를 죽인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불안의 끝이 보이고 평화가 온다. 이 하나님은 예수의 삶으로 표현되었다 자기를 사랑하기보다는 남을 사랑하고 내어주며 희생을 기쁨으로 여기며 낮아지고 겸손하며... 그분의 생애는 이와 같았다. 그분은 이러한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우매한 인간은 존경받고 사랑 받고 자기를 높이며 모든 것을 가짐으로 평화를 누리려 한다.

131. 우리가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보이는 세계 속에 살기에 그들을 필요로 할지라도 우리에게 생명이 있는 진정한 목적은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물 가운데 배가 있을지라도 그 목적은 물을 싣는데 있지 않고 배를 물 가운데 띄운 자의 의중에 있는 것과 같다. 어찌하여 인생은 보이는 것만 그 마음에 퍼담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다.

132.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위에 표현하셨다. 그리하여 산이 있고 바다 꽃과 나무 이름 모를 새 여러 생물 하늘 구름 인간 등 보이는 것과 이 모두를 보호하고 다스릴 수 있도록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리셨다. 그리고 생기를 넣어 그 모든 것이 실제 살아나도록 하셨다. 이중에 인간의 아름다움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보살피고 지켜줄 수 있도록 더한 뛰어난 색채와 부드러움으로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돌보고 섬기는 자의 위치에서 빼앗고 누리는 자의 위치로 자신을 스스로 올려놓았고 모든 것의 혀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할 때 그의 혀는 침묵의 혀가 되었다.

133.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주님이 나타난다 면 자신도 바울처럼 변하리라 생각하지 말라. 인간의 속을 아시는 분은 인간 자신도 아니고 그를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신다. 단지 인간 개개인의 여러 조건에 알맞게 그의 상태와 필요에 따라 자신을 드러내신다.

134. 때때로 우리의 염원과 요구의 밑바닥에서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는 소리가 난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사는 자만이 이 소리를 용이하게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그의 종의 생애를 통해 세상에 빛나듯 성령께서 자신을 계시하는 그릇으로 성화된 생명을 쓰시듯 인간의 영혼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두뇌처럼 아주 미묘한 기계를 쓴다.

135. 그리스도의 종은 달처럼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서 그것을 간접적으로 세상에 비춰준다. 또 달은 때로 세상과 태양 사이에 와서 일식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이처럼 주의 종이면서 옳은 삶을 살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빛을 가리는 원인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 하는 자는 개인적으로 그 빛을 인식하고 경험한 자만이 할 수 있다.

136. 어느 추운 겨울 날 한 장님이 점자로 된 성경을 읽으려 손을 움직였으나 손가락 끝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화로 있는 데로 가서 손을 녹인 후에야 성경을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느끼고 알기 전에 이미 죽은 우리의 내적 감각이 새로운 생명으로 각성될 필요가 있다. 기도와 명상 중에 하나님의 불인 성령께서 우리의 얼어붙은 내적 감각을 따뜻이 한 후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듣고 볼 수 있다.

137.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지식이나 말의 도움 없이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지식이나 말은 외부적인 것이나 영의 말씀은 내부를 여는 것으로 이는 마치 어린이들이 쉽게 모국어를 이해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익숙하다. 영적인 사람은 진리를 말이나 지식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소경이고 귀머거리며 벙어리인 헬렌켈러는 인간은 인간의 지식에 의해 하나님의 이름을 알기 전에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이런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어디서 온 것인가?

138. 이 세상에는 밤이 불과 몇 시간 밖에 없는 곳과 몇 달 계속되는 곳이 있다. 그처럼 우리 생애에는 슬픈 때와 기쁜 때가 있다. 우리는 모두 필연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 생애에 있어서 십자가를 진 사람은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살고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나무가 겨울에 잎사귀를 잃고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 잎이 피어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도 박해를 받고 자신을 낮출 때면 죽은 자처럼 보이나 그 후 몇 번이고 새로워지는 것이다. 여러 가지 고통 속에 있음에도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숨기워 있는 것이다.

139.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곤란 속에 허우적거려 쓰러지기를 수 없이 하여도 결코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당하는 고통 속에는 이상한 힘이 있어 고통은 그대로인데도 불구하고 가냘픈 것처럼 보이는 기쁨이 솟아나며 그 엄청난 고통을 이기게 된다. 이는 고통이 끝난 것도 아니고 그것이 지난 다음에 기쁨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도 아니다. 거기에는 이 세상의 이치로는 측량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

이 세상의 기쁨과 같은 성질이라면 누가 그 기쁨을 흉내내보기도 하련만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은 신비로워 세상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수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가 주신 짐은 그 외적인 모습이 너무나 엄청나고 혹독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참모습은 가벼우며 그 멍에는 쉽다는 것을 증거 하였다. 참된 평화가 오는 것은 그들의 어깨에 그리스도의 무거운 짐이 올려져 있을 때이지 그 짐이 벗겨졌을 때가 아니다. 세상은 이 놀랄만한 기적을 경험하지도 못하니 믿을 수도 없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술에 취해서 슬픔을 잊으려 하며 또 잠깐 사이의 흥분과 기쁨을 취하려 한다. 물론 그것도 기쁨임에는 틀림없으나 모든 사물을 만드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기쁨은 그보다 훨씬 우월하고 오래 계속되리라는 점에는 충분한 음미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 기쁨을 한 번이라도 맛본다면 다시는 귀중한 시간을 피조물 가운데 있는 잠시동안의 기교적인 쾌락을 찾기 위해 소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140. 많은 시간을 주님을 위해 일한 한 신자가 병에 걸려 불구자가 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그러한 상태에 있으면서 남을 돕던 자신이 오히려 남에게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어 있는 것과 더 이상 주님을 향하여 봉사할 수 없음을 슬프게 여기며 기도로 하루 하루를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자각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삶은 그가 건강할 때보다 더 많은 감화를 사람들에게 주고 있었다. 그는 불구의 몸으로 자리에서 감미로운 향기를 내뿜는 꽃처럼 누워있었다.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의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맑고 아름다운 생의 환한 모습을 발견하고 돌아갔다.

이 조용한 감화력이 주위에 퍼져 많은 불신자들이 그의 삶 속에는 어떤 깊고 진한 진실이 있을 것이라 여겨 그에 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본 결과 그들도 점차 그의 신앙의 진실을 발견하고 감화되어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의 설교와 철학적인 논증과 이론을 들었으나 그의 삶 속에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생애를 보고 배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감화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건강이 필요했다면 건강을 주었을 것이나 현재와 같은 정도의 영향은 끼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연약한 가운데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봉사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누워있는 자리는 슬픔과 절망의 자리가 아니고 많은 사람을 향하여 지고있는 십자가의 자리인 것이다.

141. 선다싱은 보통 시크족이라 불리 우는 집에 태어나 인도교의 가르침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를 신봉하는 산 모범이요 충실한 대표자였다. 어머니는 매일 일어나 목욕한 후 ‘바가밧트 기타’와 다른 인도 경전을 읽는 것을 상례로 하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의 그 순결한 생활과 교훈에 감동되었다. 아침에 행할 제 일의 의무는 먼저 영적인 양식과 축복에 대하여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야 비로소 조반을 먹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그에게 마음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때로 이를 어길 때는 어머니는 사랑으로 또는 벌을 주면서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그 뒤 다른 것을 구하는 것을 마음에 새겨 주었다. 그 시절에는 그가 아직 어려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으나 그 뒤 깨닫게 되었다. 그가 그 일을 생각할 때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심어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품속은 가장 좋은 신학교였다.

후에 그의 어머니는 그를 한 인도 철학가와 시크족의 사두에게 맡기었다. 그들의 가르침으로 그는 어느 정도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늘 참된 평안을 얻지 못해 이에 대한 갈구는 해소되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영혼이 허덕이며 구하는 진리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야 어찌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그는 한 밤중까지 경전을 읽을 때가 보통이었다. 영혼의 평화가 그곳에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의 집에는 그를 즐겁게 할만한 많은 것들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의 고민은 새롭고 이상한 것이다. 그 고통은 그가 좀더 성장하여 영적 생활에 대해 보다 많은 경험과 지식을 얻으면 절로 없어질 것이라는 충고를 그는 들어야했다.

그러나 그는 생각하기를 어린이가 당장 빵이 없어 굶주리거나 물이 없어 고통 할 때 커서야 비로소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 어린이에게 무슨 도움이 있을까 반문하였다. 그들은 또 이 같은 영적인 깊은 진리는 하루아침에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성급히 굴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그의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어린 그가 아는 작은 지식이 그만큼의 갈증과 욕구를 일으키는데 커서 그 지식을 알수록 점점 그의 갈증과 욕구는 더하게 만들 것이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고 영혼의 갈증과 굶주림을 해소할 영적인 물과 빵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사두는 그에게 말하였다. “그것은 경전을 통해서 이제껏 네가 지닌 것이 불완전한 유한의 지식 때문이며 계속 정진하여 완전한 지식을 얻는다면 그때 이 욕구라든가 염원이 단순한 미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네 자신이 신의 일부분이므로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무런 욕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만약 신이거나 신의 일부라면 그에게는 당연 어떠한 미망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에게 미망이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신이 미망에 종속되고 미망이 신보다 강하여 미망이 실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는 인생의 심한 비애를 느끼고 어느 날 새벽 세시에 일어나 만약 하나님이(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님) 계시다면 자신에 나타나 구원의 길을 나타내 주기를 기도하고 이 응답이 없다면 날이 밝기 전에 철길에 나가 자살하려 하였다. 기도 중 그는 인도의 여러 신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였으나 그들 중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의 빛이 실내에 비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문을 열고 그 빛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살펴보려 했으나 밖은 어디나 어두웠다. 안을 바라보니 빛은 더욱 밝아지며 아주 강하게 지상에 임하여 둥근 모양을 이루었으며 그 빛 가운데 나타난 것은 그가 기대하던 모습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였으며 그는 자신이 죽은 자로 알고 있던 분이었다. 그때의 그 모습은 그가 죽게 된다해도 그 영광과 사랑이 가득 찬 얼굴과 말씀하신 몇 마디의 말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왜 너는 나를 핍박하는가 보라 나는 너를 위해 또 전 세계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이다” 이 말씀은 영광처럼 그의 마음을 불태웠으며 그는 주님 앞에 쓰러졌다 그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화로 충만하였으며 전 생애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가족과 친족에 의해 죽음에 임박할 정도의 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그 박해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않을 때에 가졌던 서글픈 불안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142. 기독 신자가 아니면서 진리를 탐구하려고 하는 자들은 고행을 아주 기쁜 마음으로 견디고 있으나 실제 기독인들은 주를 위해 그들처럼 고난을 겪으려 하지 않고 그들의 사랑이 참된 것이 아니라고 비난하기만 한다 이 점에 있어 기독인들은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143. 그리스도를 알고 또 그의 구주로 믿기 전에 주님은 마치 눈 속의 안약처럼 역사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몰랐다. 눈은 그 속에 있는 안약으로 밝아지게 되므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으나 그것을 볼 수는 없다. 그의 불안한 영혼은 그를 찾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가까이 계셨으나 그의 눈의 시야에는 숨어 계셨으며 그를 이끌어 오게끔 시도하셨다.

그는 마치 어린이가 뜰의 나무 그늘에 숨었을 때처럼 이 세상의 화원 속에 있었던 것이다. 어린 아이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으며 정원 가꾸는 사람이 달려와 과일을 주며 그를 달래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과일은 아랑 곳 없이 엄마를 찾아 울기만 했다. 드디어 어머니는 나무 사이로부터 나와 애를 들어 올려 입을 맞추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평안해진 어린애는 그가 요구하던 것을 찾은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우주적인 어머니는 때때로 그 모습을 이 세상의 동산에서 숨기는 때가 있다. 이 어린 아이처럼 어머니의 사랑 외에 아무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자에게는 어머니도 그를 지켜보고 그를 안아주며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143.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을 때에는 희망이 없고 미래 생활에 대해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스도 앞에 있으며 주님은 공포를 사랑으로 바꾸셨다. 공포는 잠깐이며 사랑은 영원하다. 신앙과 사랑은 영혼의 넝쿨이 되어 태양이신 하나님의 빛과 열을 받으면서 사랑의 주님께 매달려 하늘을 향하여 성장한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는 절망과 암흑 가운데 시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

144. 주님은 양쪽 세계에 거하신다. 주님은 이전에 육의 세계에 계시면서 동시에 영계에 계셨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을 때에는 창조자의 음성으로 나사로여 나오라고 말하였으며 그의 친구의 영을 육체로부터도 아니고 영계로부터 불러내신 것이다. 따라서 이 명령을 듣자마자 영은 영계로부터 무덤에 또 육체에 돌아온 것이다.

145. 그는 배고픔과 추위로 지치고 고통스러울 때 오히려 그의 마음은 놀랄만한 평화와 기쁨으로 차 있으며 유혹을 이기고 한밤중이 되도록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는 가정을 가지고 안락하게 지낼 때 이 놀랄만한 평화에 대해서는 조금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평화를 찾아냈다. 그것은 세상이 주거나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46. 하나님의 약속이 채워지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약속을 등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에 결함이 있거나 주님이 그들을 위하여 더 좋은 일을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147. 우리 속에 굶주림이나 갈증이 있다는 것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음식물과 물이 있다는 증거다. 이 세상의 길고 긴 세월 속에서 단순히 상상만으로 주림과 갈증을 만족시켰다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오직 영의 기갈을 창조하신 자 안에서만 영구히 누릴 수 있다.

148. 사람들은 끊임없이 예배의 형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교파가 생겨나고 있는데 그것들의 하나 하나가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참다운 요구는 새로운 형식을 채용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수가 신자 속에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산맥 속에서는 물이 절로 길을 만들며 흘러가기에 운하를 만들 필요가 없지만 계곡을 흐르는 물이 평원에 이르면 사람들은 물이 흐르도록 운하를 판다. 이처럼 물이 여러 종족 사이를 흐를 때 여러 개의 운하를 만들 듯 여러 형태의 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때가 되면 교파는 없어지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149. 칭찬은 영적 진보를 방해하나 비평은 이런 위험이 없다. 참됨은 지나친 칭찬 속에도 또 지나친 욕설 속에도 없고 그 중간에 있다. 성자와 평범한 자와 다른 점은 성자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다른 이는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성자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구원에 대해 관심이 없다.

150. 만약 속의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 눈동자가 병들면 눈 속에 어두움이 생길 뿐 아니라 온 누리가 캄캄하여진다. 잠수부는 물 속에서는 호흡을 멈추고 죽어있는 상태가 된다. 또 숨을 쉬기 위해서는 공기 관을 통해 공기를 호흡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한다. 또 기도의 관을 통해 성령을 호흡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물을 벗어난 고기와 같고 물 속에 들어간 새와 같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 사랑의 대양 속에 있게 되고 이 세상에 있지만 하늘 나라에 있는 것이다.

151. 모든 피조물의 생명은 보이지 않고 숨겨진 실재다. 외부에 나타나는 생명은 생명의 활동이며 그 한 부분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생명의 본질을 이해 못하고 그저 물질에 귀착시켜 버린다. 생명 그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 생명의 근원을 바라보아야 한다. 누구도 피조물은 참된 내적 생명을 자연적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다. 이유는 생명이 그 물체 자체의 부분적인 표현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진상은 물질계에서는 표현하기가 불충분하고 영계에서만 가능하다.

152. 우리는 동물을 알아도 외적으로만 알뿐이고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없다. 짐승은 온도와 운동과 성장 그리고 생명의 외면 현상을 가지고 있으나 이는 외부에 나타난 표시에 불과하다. 그것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저 밖에서 보고만 있다. 만물의 근원이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우리의 필요와 수용에 따라 그 피조물의 정체를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앎으로 그 모양에 닮게 만들어진 우리 자신과 그 성질을 알게 된다.

153. 모든 만물을 하나님을 벗어나 자신에 고정시킬 때 이는 실재를 알게 되는 것을 방해한다. 신과 그를 경험하는 깊은 부분은 설명하기 참으로 곤란한 일이지만 그것을 즐기며 행위 속에 넣을 수는 있다. 명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면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이 세상에서도 하늘 나라의 큰 기쁨의 광맥이 도처에 널려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를 경험한 사람도 그것을 표현할 길이 없기에 세상은 이를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다.

154. 그는 하늘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바랐으나 육체는 병들어 영과 육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영은 가는 것을 요구하고 육체는 뒤로 끌어 다녔다. 그러나 영으로 육을 이겼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 속에 무슨 큰 것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이처럼 그는 말로는 그 무엇을 설명할 수 없었으나 몸으로 그것을 표현하여 알려줄 수 있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바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 말한 의미이다.

155. 곤충이 그들의 안테나를 가지고 주위의 것을 느끼며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구별하듯 영적인 사람은 그들의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판단한다. 영혼이 그 자신에게 돌아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임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적으로 거꾸로 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많건 적건 간에 내적인 수용력이 있어 진리를 지각할 수 있으나 그들은 이것을 모르고 오히려 이를 어떤 특수한 사람들의 일로 안다.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은 논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직관을 필요로 한다. 알게 하는 이로 말미암아 그냥 터득하는 것이 직관이다.

156. 살고자 하는 의지는 생명을 완전한 상태로 촉진시키려는 하나의 충동이며 그 목적을 위해 합당한 상태로 만들어 간다. 그 의지를 통해 생명은 완성되는 것이다. 이 때 그는 하나님 안에 있으며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에 이른다. 하나님 안에 있지 못한 자에게 생활은 무거운 짐이 된다.

157. 고생과 근심 때문에 피곤한 삶을 보내는 자가 ‘살려고 하는 의지’를 억제하여 자살할 수는 있다해도 그는 ‘믿으려고 하는 의지’로부터 놓여날 수는 없다. 그들은 영이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이라 믿고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 우리는 우리가 확실하지 못하다는 것조차 확인할 수 없다”고 인간의 불확실성을 고백한다. 내적 생활이나 사람의 인격은 너무도 확실한 것으로 이는 장소를 옮기거나 죽는다 해도 변하게 할 수 없다. 오직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음으로 즉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것으로만 변하게 할 수 있다.

방황하는 자들은 그들의 내적 요구를 창조자 가운데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삐뚤어진 방법으로 채운 결과 행복과 만족을 얻지 못하고 불쌍한 존재가 된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행복에 대한 수용량 까지 잃고 죽게된다. 만약 그가 범죄의 감각을 잃어 양심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영적인 자살을 행한 자이다. 그는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죽였을 뿐 아니라 가능성을 가진 영혼마저 죽인다.

158. 참된 기쁨과 만족이 물질에 있다면 세상의 모든 부자는 행복하고 만족해하며 살았을 것이다. 또 불타와 마하비라 등의 귀족은 그들의 왕국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참되고 영원한 것은 우리가 새롭게 거듭날 때 마음 속에 모셔진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축복에 찬 생활의 비밀과 사실은 그 속에서 받고 살며 경험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 누가 지식에 의해서만 이를 이해하려 한다면 죽기까지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이 나라이다. 한 과학자가 새를 붙잡아 그 속 어디에 생명이 있는 가를 알려고 새를 해부했으나 허사였다. 이처럼 내적인 것을 단순히 지식만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분석의 결과 있던 생명까지 꺼져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결과 해부 당한 새는 죽어버린 것이다.

159. 이 큰 세계에 비하여 인간의 마음은 하나의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그처럼 큰데도 작은 인간의 마음 하나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에서 눈을 돌려 언제까지나 성장해 가는 영혼과 그 수용량을 위해 무한하신 하나님께로 달려가야 평화를 얻는다. 물질적인 육체는 영혼과 영구히 함께 있을 수 없으며 어느 기간 동안 세상의 일을 위하여 영혼의 그릇으로 그 목적을 다한 후 육체는 그 연약함과 노쇠 때문에 쇠태 하여 끊임없이 전진하는 영혼과 함께 있는 것을 거부한다.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을 수는 없다해도 함께 있던 기간 동안 이룬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 이 일을 주의하여 육체로 거하는 동안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자유는 인간이 그 마음으로 선과 악 어느 것이든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에 악에 끌려가는 것은 그것의 노예가 됨을 뜻하고 결과 자유와 생명을 잃어버린다 죄를 버리고 진리를 추구할 때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맛본다.

160. 주안에서 죽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님은 죽는 자의 주님이 아니고 산 자의 주님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의 의미 또한 주님의 일 가운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주님은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하셨다.

161. 선한 생애와 악한 생애는 금강석과 석탄과 같은 상이점이 있다. 그들은 동질인 탄소로 되어있지만 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금강석은 빛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햇빛을 반사하지만 석탄은 햇빛 속에서도 칙칙하고 어두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같이 의의 태양은 선인이나 악인 어디든지 빛을 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에 따라 반사하는 것이다.

162. 인간의 상태는 지구와 같다. 우리는 해가 저물어 우리로부터 사라지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지구가 움직여 태양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만약 지구가 태양에 의해 끌리지 않는다면 지구는 공간 속에 잃어졌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의 태양도 또한 그 사랑의 인력으로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끌고 계신 것이다.

163. 몸 안에 있는 한 지체가 아플 때 전신이 그것을 고치려고 분주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우리 안에 있다면 그는 신으로서의 생명력을 가지고 우리의 죄와 상처를 고치고 영적 건강의 기쁨으로 우리를 충만케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받은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는 고난과 유혹으로부터 해방을 받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은 이 생명을 받음으로 이제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벗어난 것뿐이지 이전보다 더 많은 싸움과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변한 것이 있다면 이전에는 그 고난이 고통으로 느껴졌으나 지금은 그것이 축복이요 기쁨이라는 것이다.

이 싸움은 우리의 숨은 능력과 상태의 진보와 완성을 위하여 필요하다. 주님은 이 거룩한 싸움에서 우리가 이기도록 도울 것이며 세상과 사탄과 죽음을 이김으로 그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사물의 큰 것은 작은 것의 연속이고 그 집합체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 되야 이미 그 작은 것의 승리 속에 큰 것에의 승리도 놓여있는 것이다.

164. 이 세상에서는 외적인 생활과 내적인 생활의 차이가 근소한 것 밖에 보이지 않으나 이에 답답해 하지말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 얼마 후에는 내외의 생활이 영구히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가 올 것이다. 외부는 바르게 내부에 응하며 내부는 바르게 외부에 적합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될 것이다.

165. 1921년 히말라야 산 중에 큰 산불이 일어났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 와중에 물건을 꺼내기 바빴으나 몇몇 사람은 우두커니 서서 나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의 새가 아주 괴로워하며 둥지 위를 분주히 떠돌고 있었다 몇 초 후에 불은 더욱 번져 새 둥지에 옮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미 새는 그때까지도 날아가지 않고 오히려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덮고 있었다 한 순간이 지난 다음 불쌍한 새들은 불에 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이상스러운 사랑이었다.

사실 그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고 그의 사랑이 보이는 것이다. 그 어미 새의 사랑은 하나님께 있던 그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 놀라운 사랑을 하찮은 새에게까지 부어주셨다. 이 무한한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게 하고 우리를 구원키 위해 우리의 죄 속에서 생명을 내어 죽게 한 것이다.

166. 어느 나이 어린 소녀가 불교 노승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 했다. 그러나 노승은 그가 어리기 때문에 그 믿음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소녀는 이에 아랑 곳 없이 말하였다. “나는 나의 부모를 알기보다도 그리스도를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도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내 밖에 살아 계시나 그리스도는 내 속에 살아 계십니다. 부모는 내 외적인 것을 기쁘게 하여주지만 그리스도는 내 속을 기쁘게 하여줍니다. 참된 것은 내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주거나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노승은 그 어린 소녀로 24시간 동안 고난을 겪게 한 후 다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 소녀는 마음 속으로 일어나는 참된 평화 속에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조금도 피로하거나 미움과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노승이 소녀에게 고백하였다. “너는 나의 선생이다 나는 늙었고 너는 13세 밖에 되지 않았지만 나는 너의 제자이다. 너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 그 소녀는 설교는 할 수 없었으나 노승이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었다.

167. 어느 추운 겨울 날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밤새도록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지샐 때 사단은 따스한 집과 그리운 가족 생각으로 그를 유혹하였다. 그래서 그는 기도하였으며 기도 중에 깨어 기도하라는 영음을 들은 후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평화와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동굴에서 나와 한 나무에서 약간의 잎새를 뜯어먹었다. 그 잎은 딱딱하고 맛도 없는 것이었으나 실제 느끼기에는 아주 맛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였다는 증거다. 그는 사단에게 그리스도는 항상 내 안에 계셔 나와 함께 하신다고 체험적으로 확신 있게 외쳤다.

168. 그는 가정에서 편한 환경 속에 있을 때는 결코 편안하지 못했으나 이제 주님을 알고 주님을 따라 고난 중에 있을 때가 더 행복해 보임을 그의 아버지는 이상히 여겼다. 그것은 이전에 모르던 주님과 그 나라를 보고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를 원하면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알려하는 자는 기도를 해야한다. 많은 무신론자들과 이교도들도 성경을 읽으나 기도 없이 지식으로만 깨달으려 하기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 진리(지식)은 필요하나 이 문을 여는 것은 기도이다. 잃어버린 우리의 구주를 찾는 것이 인생의 급선무이다. 그를 찾아 당신만이 지금과 과거와 미래에 나의 구주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한다.

169. 많은 사람들이 천부에게 이런 저런 일을 구한다. 우리의 주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건만 우리는 그와 달리 기도하여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한다. 또 우리는 혓바닥을 통해서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만 실제 우리의 마음과 행한 일은 그 반대를 기고하고 있던 것이 우리의 마음의 깊숙한 본질이었다고 마음의 위장을 증거 한다. 더구나 우리는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금방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입장이시다.

170. 어떤 이가 죽으면서 말을 남겼다. ‘내 일생은 외적으로 보면 고난과 괴로움의 연속이었으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감사한다. 긴 세월 동안 고난 속에서도 나는 놀랄만한 행복을 지속해왔다. 이 기쁨은 왕이 그의 화려한 궁전 속에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아주 쇠약해 보였으나 그 얼굴은 천사처럼 빛났고 그 눈에는 하늘 나라가 비치어 나왔다. ‘아마 잠시 후면 사람들이 내가 죽었다고 할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죽은 것이 아니고 이제부터 참된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을...’

171. 날 때부터 앞 못보는 장님이 추운 겨울 날 양지에 앉았다. 그는 태양으로부터 나오는 열을 받고는 그 열은 자신의 상상의 결과 몸 속에서 열이 순환하기에 생기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그동안 그 따스함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어도 그는 태양을 본 적이 없어 불덩이가 허공 중에 걸려 있다고는 믿을 수 없었다. 신자들이 맛보는 기쁨과 희열은 마치 이와 같아 그것을 겪은 자 외에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 경이로움을 알 자가 없다.

172. 어느 사람이 문둥병자를 위문하였다 ‘참 안되었습니다. 당신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사뭇 아픕니다’ 그런데 그 문둥병자의 대답이 이러했다. ‘당신이 내게 대해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신 마음이 선하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하지만 세상은 신비로워 저와 같이 몹쓸 병을 얻은 자가 반드시 괴로움 속에서만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속에 있는 놀랄만한 평화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문둥병이 오히려 내게 친근하고 삶의 기쁨이 이 속에 있다면 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만약 내가 건강해 있다면 나는 살인을 했거나 도둑질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문둥병으로 인해 영혼의 문둥병을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이 육체의 병이 낫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는 내 영적인 문둥병이 고침을 받아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이 다른 모든 고통과 슬픔을 오히려 감사로 바꾸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저를 위로하러 오지만 저보다 더 큰 즐거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흔하지 않을 것입니다’

173. 이전에 사막을 여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피곤하고 갈증을 느끼다 서편 먼 곳에 호수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척 기뻐했다. 그는 희망을 걸고 그곳을 향해 장시간 걸었으나 그는 호수를 찾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신기루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실제 아무 것도 없었는데 태양 빛의 반사에 의해 물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영혼도 만족을 위해 세상 이곳 저곳을 방황하고 다닌다. 그러나 신기루와 같이 보이는 샘물이 있어 사력을 다해 그것을 움켜쥐어 보면 그것에는 영혼의 갈증을 풀어 줄만한 참된 샘물은 아니었다.

육안으로 보이는 이곳 어디에도 그의 갈증을 풀어줄 한 방울의 물도 얻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갈증으로 죽으려 하였을 때 그의 영안이 열려 생명수가 샘을 이루며 주님의 옆구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제 이 세상이라는 사막을 지날 때 이 물을 마시고는 결코 목마르지 않는 자가 되었다. 이 주님과 함께 있다면 감옥도 지옥도 그 어느 고통스러운 곳도 우울한 곳도 다 하늘로 변하여 기쁨으로 충만해진다.

174. 벙어리가 과자의 단 맛을 이야기할 수 없듯이 구원을 받은 자라도 그 입으로 주님이 계시다는 존귀한 사실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 이 천적평화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의 말이 아니고 하늘의 말뿐이다. 바다 물이 아무리 짜다해도 그 속에 사는 고기의 살맛까지 짜지는 않는다. 이는 그에게 생명이 있는 것 때문이다. 만일 그 고기가 짠맛이 난다면 그것은 죽어 짠기가 배어있음에 틀림없다. 세상은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살아있다면 영혼이 그 가운데 빠져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한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아도 세상 것이 아니고 이 세상과 하늘나라에서 어느 곳이든지 우리는 늘 주님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175. 그리스도 신자가 이 존귀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성경과 두뇌 속에서만 살아있고 그 마음 속에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마음을 주님께 받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다. 마음은 왕의 왕인 주님의 보좌이다. 하늘의 주부는 주님이 통치하시는 마음인 것이다 그의 사랑을 얻으면 세상을 향한 사랑이 쫒겨난다.

176. 그가 히말라야의 한 고산에서 길을 잃어 방황할 때 적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에게 고의로 위험한 길을 가르쳐 주었다. 방황하다가 강을 만났을 때 밤은 오고 사방에 맹수는 들끓어 그의 목숨은 경각에 달렸다 그때에 강 건너에 한 사람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녹이고 있다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내가 구해 줄테니 걱정 마시오’ 그 사람은 아무 두려움도 없이 강을 건너와 그를 등에 업어 날랐다. 강을 다 건너 그가 감사하려 하니 그는 그곳에 없었고 모닥불도 흔적조차 없었다. 아아! 이는 주님이시다. 그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 없는 사랑으로 그를 지키고 계셨다. 변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변하는 것이다.

177. 주님의 십자가에서 사람들은 죄의 용서만을 바라보고 이를 구원이라 여긴다. 죄가 용서된 후에도 우리는 자신의 죄에 의해서 죽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죄가 용서된 후에도 그들의 죄 가운데 죽어간다 구원은 단순히 죄의 용서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해방인 것이다. 용서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를 빌어 죄를 씻는 것만이 구원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스도의 피를 믿노라 하면서 자꾸 죄를 범한다면 그 죄 가운데 죽게 될 것이다. 범한 죄의 사함 받음이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 된 성질이 고침을 받는 것이 주께서 주시려는 구원인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이 오셨다.

하나님은 우리 죄의 용서라는 한 사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의 참된 본질 여하에 따라서 이에 맞는 삶을 하늘에서 보내도록 하신다. 죄의 성질이 고쳐지지 않은 상태는 저곳에서도 변하여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형성된 영혼의 아름다움의 상태에 따라 그 영혼의 본질 그대로의 삶이 위에서도 계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바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이곳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의미이다.

178.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번뇌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크다. 그것이 죄의 결과라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며 준비된 내적 평화를 주실 계기를 마련하신다. 고통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적 생활과 진보와의 사이에 본질적이며 필수적인 요소이다. 참된 신자라면 그 길을 반드시 가야한다는 뜻이다. 고통과 번뇌가 피조물 누구에게든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없애버렸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정도가 지나치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따를 자가 세상에 없다. 지금의 고통이라 보이는 것이 먼 후일의 참된 축복의 전조였던 것을 유한한 인간은 미리 계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알의 종자가 성장하여 햇빛을 받고 아름답게 자라기 전에 한 참을 어두운 곳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후 정해진 시기에 싹을 나게 하고 열매를 맺는다.

179. 하늘나라는 미래의 나라가 아니며 이 지상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가장 작은 하나의 죄라도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다. 작은 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마치 작은 세균이 병을 일으켜 덩치큰 사람을 죽게 하는 것과 같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세균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고 있듯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죄 때문에 화를 입고 있다. 우리가 평화를 경험하는 것은 죄 가운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때이다. 만일 그러하지 못하고 늘 긴장과 불안 속에 산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내 편에 영혼의 고장난 부분이 있다는 경고이다. 구원의 증거는 과자를 먹으면 단 맛을 느끼듯 내적인 신비로운 평화를 지니며 산다는 것이다. 열대에 사는 사람들이 겨울에 내리는 눈을 알지 못하여 눈이나 얼음에 상하여 동상에 걸린다는 사실을 모르듯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죄가 고통의 근원이라 생각지 못한다.

180. 전도를 위하여 여러 마을을 돌 때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은 신비하게도 고통이라기보다 기쁨이었다. 그는 그때마다 지옥 속에 있지 않고 천국 속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의문을 남길 수 없는 명백한 방법으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신자가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고통이었고 지옥의 느낌 속에 살았으나 회개한 후부터는 고통은 여전히 역사 하였으나 그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지상의 천국 속에 사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181. 1914년 7월 7일 험한 여행으로 지치고 극도의 굶주림과 강풍 속에 언덕길을 오를 때 무서운 돌풍이 불어 그를 언덕 밑의 한 동굴 속으로 처박아 넣었다. 그는 그 높은 곳으로부터 떨어졌는데도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 동굴은 하나님의 애무로 변하였다 그곳에 상처 따위가 있을 수 없는 낙원이었다. 돌풍은 사랑의 큰 여울이 되었고 폭우는 은혜의 비로 변하였으며 기갈은 만족으로 피곤은 평화로 변하였다. 또 십자가를 진 예수의 여러 모습이 환상으로 그 앞에 나타났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시는 모습과 굶주리고 목말라 하시는 모습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이 씌워져 피를 흘리시는 모습 그리고 그런 고난에도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골고다 길에서 넘어지시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오! 이에 비하면 자신의 십자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가 당하는 고통은 오히려 감춘 만나였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는 그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십자가는 고통이 가득 찬 곳에서 평화의 물결 속으로 인도해 가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자를 천국으로 인도한다.

182. 그는 투옥되는 것을 겁내지 않았다. 그의 그리스도는 그를 감옥 속으로부터 해방하지 않지만 죄와 사탄으로부터 놓여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언제라도 또 감옥 속에서도 자유로웠다. 비록 그의 발에 족쇠가 걸리었다해도 그는 자유였다.

183. 한 수렵가가 사냥을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갔다. 한 나무에 꿀 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총을 밑에 두고 올라가 꿀을 핥기 시작했다. 꿀의 단 맛 때문에 그곳에 위험이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호랑이가 다가왔다. 이제야 그는 자기가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조금 있으면 호랑이가 가버리겠지 하며 또 호랑이가 덤비면 옆의 강으로 뛰어내리면 되겠지 생각하며 계속 꿀을 핥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강에는 악어가 살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이 궁지에 빠진 것을 인식할 때 구원의 길이라고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위험은 곧 닥쳐왔다. 내려다보니 들짐승들이 나무 뿌리를 갉아먹어 이윽고 그 나무는 옆으로 쓰러졌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입장이다.

184.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행위가 생명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으로 우리는 저 세상에서도 살게 된다. 착한 생명은 천국에서 악한 생명은 지옥에서 영원을 보내게 된다. 인도교에서는 착한 일을 많이 하면 만사가 잘된다고 하지만 기독교는 우리가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 착한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착한 일을 할 수 있다.

185. 자연을 넓게 보면 자연의 몸짓거리와 그의 얼굴이 보이고 그의 소리가 들리고 그의 기쁨과 신음을 느끼고 그가 하나의 커다란 몸체를 가진 진정한 모습인 그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인생을 너무 작게 보기에 밤낮으로 되풀이되는 세계 속에 답답함과 지루함이 인간을 아주 작게 만든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너무도 크게 만들었다. 그의 진정한 모습을 보면 그는 하나의 거대한 형체이고 그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 자연과 육체 속에 한없이 작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고 자연보다 넓고 큰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너무 작은 세계에서 산다 마음을 열면 큰 세계가 보인다. 자연과 세상의 사건은 비록 그 몸체가 커다랗게 보일지라도 어린 아이와 같아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 영적 힘으로 자신들을 돌보아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186. 어느 날 그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에게 그는 저항 없이 온 몸을 맡기자 그는 오히려 그에게 감화되어 그를 돕는 자로 변해버렸다. 이것이 바로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다는 의미이다.

187. 어떤 날 기도와 명상 가운데 그리스도가 임재한 것을 강하게 느꼈다. 그의 마음은 하늘에 오를 듯한 기쁨으로 충만해 있었다. 슬픔과 괴로움이 가득 찬 세상에도 큰 기쁨이 숨겨진 무진장한 광맥을 보았다.

188. 주님이 이제까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주님의 계시를 받을만한 준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을 그가 모르고 있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 영으로 인간의 마음에 찾아오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보인 외적인 나타남보다 더 근본적이다.

189. 이제 주님을 만난 자는 보트를 타고 홍수로 휘몰아치는 물결 위를 떠가는 것과 같다. 이런 가운데 주님의 은혜를 잃지 않는다면 누가 빼앗을 수 없다. 보라!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190. 만약 사람이 자신을 안다면 하나님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주의나 이론, 학문이나 지식은 내적인 소리와 감각을 말살시키며 기교적인 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참된 지식은 기도와 명상에 의한다. 이 세상의 지식은 교수에 의하여 얻어지며 영적인 지식은 하나님의 빛에 의하여 직관으로 얻어진다. 영적 지식과 내적 감각과 영혼의 힘은 죄로 인해 죽어버렸다. 빛은 이를 다시 살려준다.

191. 어느 한 소경이 점자로 성경을 읽으려 하였으나 추위 때문에 손가락이 얼어 한 자도 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불 옆에 가서 손을 녹인 후에야 읽을 수 있었다. 이처럼 기도와 명상에 의하여 의의 태양의 빛과 성령의 불이 마음에 힘을 주고 눈을 뜨게 하여야 비로소 우리는 하늘 나라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192. 중생을 한 후에 성령은 이 세상의 말로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아도 직접적으로 영적 생명의 숨은 뜻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하신다. 영에 의하여 거듭날 때에 영적인 말이 우리의 모국어가 되고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자연히 배우는 것처럼 주님의 생각과 뜻을 힘들이지 않고 배우는 것이다. 이 세상의 말은 그저 외적인 뜻을 전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그런 말없이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 이 영적인 말은 육체의 귀에 들리지 않고 마음의 귀에 들리는 것이다.

해를 그 자체의 빛에 의하여서만 볼 수 있듯이 의의 태양도 오직 그 자체의 빛에 의해서만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영적인 시각을 필요로 한다. 이는 소경은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임을 아는 것은 참된 뜻에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성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미 그 속에 죄가 깊고 타락하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로 인해 공기처럼 어디든지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죽은 사람이 그 주위에 충만한 공기를 느끼지 못하고 호흡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193. 죄로 죽은 자는 하나님을 모르고 기도의 호흡도 기쁘게 여기지 않으며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으나 생령이 죄에 의해 죽었기에 주님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사람에게 불어넣는 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것이 영원의 생명이다.

194. 하나님을 찾기 위해 제 자신과 모든 욕망을 버리는 자는 하나님을 찾고 요구하는 것도 얻지만 자기를 버리지 않는 자는 스스로 영적 자살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상하게 하는 자는 탕자와 같이 제 자신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는 자신이 남까지도 해치게 되나 이것도 모른다. 이 같은 연유로 살아있다는 것은 남을 위해 선과 자비를 베푸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195. 인간의 영혼은 육체보다 훨씬 뛰어나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데 기계 역할을 하는 두뇌를 통하여 스스로 일할 수 있다. 이처럼 중생한 영혼이 주의 뜻을 따라 남에게 봉사하려 할 때 성령은 그들의 생명을 통하여 역사하며 자신을 나타내신다.

196. 의의 태양도 인격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달이 태양으로부터 빌어온 빛의 반사로 어둠을 비추는 것이지만 어떤 때에는 태양과 지구와의 사이에 있어 어둠을 끼치는 것처럼 주의 종들도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있다.

197.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바다 속에 잠입하여 잠시동안 숨을 멈추고 있지만 맑은 공기와 연결되어 있는 관을 통하여 물 위의 공기를 호흡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이 세상 가운데 있어도 세상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성령을 호흡함으로 영원한 세상을 지금 살 수 있다.

198. 눈에 보이는 푸른 나무 잎들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계시의 책장들이다 강, 개울, 샘, 산과 들, 과일, 꽃 등은 완고한 마음도 녹이며 그들의 귀도 열리게 한다. 피조물 전체는 소리 높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인 피조물도 웃음과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는데 긴 혀가 주어진 인간은 묶긴 채로 침묵만 계속하고 있다.

이 존귀한 자연의 책이 그 저자를 그(선다싱)에게 소개한지 25년이 되지만 그동안 그는 언제나 자신의 구주는 이 책 속에 소개된 그분과 꼭 같다는 것을 누구에게 배우지는 않았으나 영적인 감각으로 알고 있었다. 자연은 자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말할 줄 모르고 표현하지도 못하지만 이로 인해 조금도 그 진리는 감추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을 주는데 영향을 방해받지 않았다. 그것은 이 자연의 영적 언어들이 주님의 말씀같이 영이요 생명인 까닭이다.

199. 어떤 사람이 중병에 걸려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독사가 가까이 와도 도망할 수 없고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드디어 그것에 물려 죽었다. 그리스도인도 생명은 있으나 자신을 구원하는데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죄로부터 도망할 수 있도록 풍부한 생명을 주셨다. 이 생명의 공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200.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기에 죽은 사람의 마음을 살린다. 이 세상에서 영원의 생명을 가지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소망은 없다. 주님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에게 천국의 영생과 같은 생명을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참신자의 마음을 낙원으로 만든다. 우리의 이런 마음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된다.

 

< 인도의 사두 썬다싱의 명상 3 >

201. 만년의 눈으로 덮혀 있는 히말라야 산중을 여행할 때 어떤 이가 그 산중에 온천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였다. 그는 온천물에 손을 대어보기 전까지는 그 물이 따스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다가 대어보고야 시인하였다. 그는 경험을 통하여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지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다. 경험은 기도를 통하여서도 우리에게 얻어진다.

202. 어떤 사막지대에 물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한 그루의 나무가 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까닭을 알아보니 그 나무는 긴 뿌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이 땅 속 깊이 숨겨있는 물줄기에까지 닿아 있었다. 기도는 감추어진 샘인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는 숨은 뿌리인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힘이 붙어진다.

203. 요단 강가의 맑은 물은 사해로 끊임없이 흘러가건만 그 바다는 짜기만 하고 언제나 죽은 상태이다. 그것은 들어온 물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로운 물이 흘러들어 오는데도 죽은 신앙의 상태에 있다면 이는 남에게 주지 않기 때문이다.

204. 나의 주되시는 하나님이여! 나의 전부의 전부이시며 생명의 생명이시고 영의 영이신 주님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하소서! 그것은 내 마음은 당신을 두고 따로 다른데 바칠만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모든 은총을 베푸시는 주님 외에 내 마음은 다른 세상의 보물이나 그 무엇도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만을 구하고 사모할 뿐입니다. 당신이 계신 곳 그곳이 천국입니다. 이 같은 마음의 기갈을 채워주실 분은 이 요구를 주신 당신 외에는 없나이다. 오! 나의 주님이시여! 당신은 내 마음을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만 만드셨기에 내 마음은 당신 안에 있지 않으면 휴식이나 평안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 속에 당신을 거역하는 것은 모두 떼어버리고 당신만이 영원히 나를 지배하시기 바라나이다.

205. 주님이 인간에게서 오랜 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는 어떤 계시를 받을만한 준비가 그에게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주님은 늘 그와 함께 계셨다. 주님이 사람의 마음과 영에 자신을 나타내는 계시는 그의 외부적 현현보다 더 본질적이다. 많은 재난을 당한 슬픈 사실까지도 주님이 그를 특별한 방법으로 준비시킨 것이며 슬픔과 고통의 수단을 통하여 진리 탐구자는 주님에게 나오게 되며 영적 수용량은 확대되고 또 주님의 임재로 그 눈이 떠져 놀랍고도 신성한 축복의 자각과 희열에 들어가게 된다. 고통과 번민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결점을 인식케 하며 필요와 만족을 구하여 마침내 주님에게로 와서 그 요구를 만족케 된다.

206. 조용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침묵 가운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역사 하신다. 하나님을 닮은 인간도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고 결심하는 것이 침묵 속에서 행해진다. 육신의 형벌로는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함으로 그 마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다. 성인들은 기도로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군중 속에 있는 듯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큰 일은 침묵 속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실 때 인간의 도움을 구하지 않으셨고 묵묵히 홀로 모든 것을 만드셨다. 그러나 인간이 방황할 때 그 필요에 의해서 예언자나 사도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때가 이르러 그 자신이 육신으로 나타나 인류에게 이야기하고 구원 사업을 끝내셨다. 세상을 등진 채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외톨이의 고립적인 신앙이라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신성한 진리의 진주를 따기 위해 바다 속의 잠수는 필요하며 이는 남도 부요하게 만드는 일이다. 이 세상의 소요로부터 잠기기 위해서 곧 보이는 것과 들리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기도로 성령을 호흡하는 길밖에 없다.

207. 하나님을 알기 전에 자신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자기의 모습대로 인간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식과 이해보다 초월해 있기에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만일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신이 아니다. 우리가 불 속에 손을 넣어보면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 듯이 하나님의 달고 오묘한 사랑의 교제에 들어가 본 영적 경험이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208. 우리는 이 세상의 외적인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을 느끼고 알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모습을 내적인 눈으로 볼 수 있고 그 아름다운 임재를 기뻐할 수 있다. 벙어리고 귀머거리며 소경이 외적 세상에 대한 지식은 불충분하여도 하나님을 눈으로 보듯이 선명히 느낄 수 있다.

209. 세상을 버릴 수는 없다. 세상을 버린다는 의미는 세상 속의 악을 버린다는 뜻이다. 인간은 영이기도 하지만 육체이기도 하기에 세상과 자연을 버리는 것은 죽기 전까지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외적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지상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기에 올바로 물질과 신체를 사용하기를 원하시고 이로서 천국에 이르기까지 예비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욕으로 자극할지라도 주님은 우리가 그 세상과 싸워 이기기를 원하신다.

210. 성자가 다른 이보다 다른 점은 성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나 다른 이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또 성자는 자신이 연약하고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다른 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성자는 항상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이지 이미 성자가 된 성자는 없다.

211. 깊은 영적 경험은 영적 용어로만 표현할 수 있고 그 밖의 충동이나 감정은 인간의 어법이나 말재주로 나타낼 수 있다. 짐승은 혀가 있어도 말할 수 없다. 짐승은 본능대로 행동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 꿀벌들이 꿀을 모으는 것은 배우지 않고 깨닫지도 않지만 인간은 배우고 생각하고 의지하여 행동한다. 이것은 인간은 계속 긴장과 곤란과 노력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성장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닮아가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끝없는 기쁨을 누리기 때문이다.

212. 아무리 무능한 자라도 제 집에서는 왕이다. 문제는 그 집 곧 외적인 형태를 집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집으로 여기는 자가 현명하다. 사람은 각기 제 자신의 경우에 따라 행복을 느낀다. 돈이 있다고 구차한 사람보다 행복이 더할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부자보다 행복 될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구차한 사람은 부자보다 불행 된 것을 참고 지내기 쉽다. 우리는 항상 주님께서 허락하신 이 처지에서 행복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한다. 참으로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평화를 가진 자가 행복한 자이다. 왕국의 호화보다 오막살이의 단순한 소찬을 감사하며 맛있게 먹는 것이 행복이다. 고통의 학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아무리 긴 지상의 고통도 영원의 기쁨을 보면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의 죽음의 날짜는 정해져 있다. 어느 날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 밀알이 썩어 며칠 내 싹이 나오듯 육체는 죽고 그 영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난다.

213. 어느 왕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와 같이 방정하고 선량하였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과 떨어져 왕궁에 살았기에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몰랐다. 그가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어 세상을 통치할 때 아버지보다 더 잘 다스리기 위해 변장을 하고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살아 그들의 생활 상태와 노고를 알아보았다. 그가 변장한 왕자라는 것을 수행하는 측근 몇 사람 외에는 알지 못했다. 그는 허술한 집에 살며 비밀리에 여러 번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그는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아버지의 도움이 그의 힘의 근원이었다) 무죄한 양민들을 불쌍히 여기며 도움을 주었고 그의 사랑과 근로 생활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아버지에게 알려졌다.

그는 한 사람의 상인으로 생활하는 중 여러 사람들과 교제하며 그들의 성질을 파악하고 그들의 사정에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이는 그의 직접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그는 늘 그들의 악을 제거하는 일에 몰두하였고 자신을 속이고 학대한 자들에게 진정한 신분을 나타내 보복하지 않았다. 언제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이 선량히 되기를 기도하며 법을 지키는 시민이 될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누구일까. 이가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였다.

214. 의인이 받아야 할 축복을 악인이 받고 악인이 받아야 할 저주와 불행이 착한 사람에게 임하는 사건에는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섭리가 숨어있다. 불합리한 듯이 보이나 이 세상은 짧고 일시적인 곳이다. 외관상으로는 하나님이 그릇된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전체 계획 중 하나님의 지혜와 계획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과 행복을 구하지 않는 악인에게도 주신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신다. 그러므로 나중에 저들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러 저러한 좋은 것을 주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없다.

이와 달리 선인은 세상에서 조롱받고 빼앗기고 고통 당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들의 유익을 위해 베푸시는 역사인 줄 알고 오히려 감사하며 인내로 싸워 이기려 한다. 이로 인해 그들의 영적 병은 죄의 원인으로부터 치료되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 알의 씨가 햇빛 가운데 나오기까지 어두운 땅 밑에서 차갑고 답답한 가운데 참고 지내야 하는 것과 같다. 인간도 의의 태양 빛 가운데 들어오기까지 슬픔과 고통의 긴 터널을 통과하는 중에 무의식적으로 그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이다. 선은 조만간 좋은 열매를 맺어 풍성하게 되는 것같이 악도 조만간 악의 열매인 멸망을 가져온다. 우리 죄는 확실히 우리를 찾아내고 죄인은 그 자신이 죄에 의해 죽지 않으면 안 된다.

21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만물을 만들었고 인간을 자기의 형상과 같이 지으셨다. 이는 사람이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고 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랑의 가치를 알고 그 사랑에 의해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함을 얻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제 일로 사랑하고 그 후 전 인류와 자연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오기에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움으로 그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버리고 인간이 죄로 피조물을 사랑하기에 고통과 번민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랑의 흔적이 있는 이유는 이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사랑이 불충분함을 깨닫고 사랑의 원천인 하나님에게로 나오게 하기 위함이다.

216. 창조자의 사랑이 없으면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하고 이별과 불안과 슬픔의 그늘을 가져온다. 그러나 인간이 그늘을 피하여 양지로 옮기기만 하면 따사로운 볕을 받을 수 있듯이 신은 결코 인간을 떠나지 않으시며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며 변함도 없고 시간과 장소의 제한에도 지배되지 않으신다. 하나님과의 교제 중에서는 참된 행복이 어디든 어느 경우든 계속된다.

217.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 외에는 채울 수 없는 본능과 욕구가 있어 이 세상에서 잠깐 시련과 준비를 마친 후 하늘에 올라 더욱 향상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의 만족과 그 가운데 있는 것을 추구하면 그 자신을 위하여 하는 노력은 마침내 실망과 파멸을 가져온다. 세상만을 바라보는 것은 덧없는 꿈과 같아 새로운 무덤 속에 사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은 악하나 그와 동시에 여러 방면에 위대하고 무한한 조류의 흐름이 있어 사람을 죄와 고통과 그 조건에서 건지려는 무한한 사랑과 생명의 큰 물결이 흐르고 있다. 이 큰 물결은 단지 기도하는 자에게만 건강과 기쁨과 평화를 준다. 그것은 마치 적도를 따라 흐르는 멕시코만의 대조류가 북극의 얼음을 풀어 북방 나라들의 주민을 극심한 추위에서 건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준비한 이 무한한 사랑의 물결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항상 안전하고 혼란치 않으며 남의 선을 위해 노력하고 악을 받아도 복수하지 않고 선으로 갚는다.

218. 사람들은 죄의 끈에 자신이 묶여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에 세상이 밝은 줄로 알고 웃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신앙에 서면 죄악의 끈이 보여 이때부터 이 끈을 풀기 위한 고통의 몸부림으로 웃음이 사라지며 늘 우울 속에 지내는 시기가 오나 참고 견디면 언젠가 이 사슬을 풀고 자유의 창공을 훨훨 날게 된다. 사람은 본디 외부의 모든 조건이 좋아도 그는 육체가 사람이 아니요 영혼이 사람이기에 영혼의 죄가 풀리지 않으면 참된 평화는 얻을 수 없고 마침내 어둠의 영원한 고통에 처한다.

219. 14년 전 그가 코트갈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문득 영안이 열려 하늘의 영광을 보았다. 그때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너무도 생생하여 그는 지금 죽어서 영혼이 하늘의 영광 중에 들어온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어 그의 생애를 부요하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은 그가 원하여 되는 것이 아니다. 대개 기도 중이나 묵상 중에 이루어지고 어떤 때는 한 달에 8-10회로 되기도 하고 한 번에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정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스런 지역을 구경하고 천사나 성도들과 담화하기도 하였다. 이 영의 교통에서 얻는 말할 수 없는 입신의 즐거움이 영원히 그들과 함께 살고싶은 욕망을 갖게 하였다.

교령술은 저급령이 사는 암흑계로부터 오는 암시나 소식인데 그것은 전부가 속이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대개는 단편적이요 똑똑치 못한 것이다. 이것은 진리를 떠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그의 입신 중에는 영계의 영광스런 상태를 세밀하고 생생하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 속에는 해결이 어려운 문제에 대한 똑똑하고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220. 영들은 선과 악 두 가지 구별이 있는 상태에 있는 존재를 말하는데 이는 죽은 뒤 천계와 지옥의 중간 상태에 있는 존재들이다. 성도는 이 상태를 지나서 영계의 더 높은 곳을 올라가 특별한 봉사를 하는 자요 천사는 여러 가지 영광스런 사업에 봉사하는 존재로 그 중에는 우리 지구와 함께 다른 여러 세계에서 온 많은 성도들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한 가족처럼 살고 있다.

221. 오직 하나 생명의 근원이 있는데 이는 무한하고 전능한 생명이시다. 그 창조적인 힘은 모든 생물에 생명을 주고 피조물은 그 안에서 살고 그 안에 있어 영원히 그 존재를 계속한다. 피조물의 생명은 변화하나 소멸하지는 않는다. 비록 존재의 이 상태에서 저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죽음이라 부르나 죽음은 결코 생명의 종극적 소멸이 아니고 다른 생명에의 가입이나 혹은 거기서 무엇을 빼어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물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진 것이 아니요 다른 모양과 다른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전 우주의 어떤 존재라도 이는 소멸되지 않는 것이요 누군가가 소멸시킬 수도 없다. 하나님도 그 생명을 소멸시키시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말과 비유로는 영계의 모든 진상을 표현하기가 불가능하다.

222. 어느 날 그는 기도 중에 문득 많은 영적 실재자의 무리에 둘러싸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영안이 열리자 많은 천사와 성도가 모인 그 앞에 엎디어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처음 그는 저들의 영광과 빛난 얼굴을 보고 자신의 부족한 상태를 깨닫고 조금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저들의 진실한 사랑과 충만한 친절을 보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

223. 죽음은 잠든 것과 같다. 조금 육체의 병이나 정신적 조건을 제하면 이것을 넘는데 아무 고통도 없다. 몹시 피곤한 사람이 깊이 잠드는 것과 같이 죽음의 잠이 인간에게 닥쳐오는 것이다. 대개 죽음은 누구에게나 뜻밖에 오는 고로 죽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 있는 것을 깨닫기 힘들 정도이다. 그는 환경이 새롭고 아름다운 모든 것을 보고 자신이 지상의 어느 다른 곳에 온 줄로 생각한다. 그들은 충분히 가르침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죽은 줄 알고 자기 몸이 육체가 아니요 영이며 물질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옮겨온 것을 알게된다.

224. 보통의 죽음의 경우에는 육체가 점점 감각을 잃어버리고 아픔도 없고 다만 졸음과 같은 상태에 덮인다. 혹 몸이 몹시 쇠약하였든지 무슨 뜻밖의 변사를 당하여 죽은 영혼은 육체가 숨 떨어지기 전 무의식 상태에서 영혼이 그 몸을 떠나는 일이 있다. 이처럼 영계에 들어갈 준비나 생각 없이(주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 문득 영계에 들어온 영혼은 몹시 놀래며 당황하여 자기 운명이 어찌 될 것인가 큰 고민에 빠지면서 상당히 오랜 동안 낮고 어두운 중간 상태에 머물게 된다.

이와 같은 낮은 범위에 사는 영들은 지상에 사는 영들을 몹시 괴롭게 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러나 이들이 괴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저들처럼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의 의지로 저들의 마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자들에 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그 보호 중에 있어 안전하다. 악한 영은 자기 성질과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만을 해할 수 있기에 그 영향이 제한되어 있다. 때때로 그 악령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의해 의인도 괴롭게 할 수 있는데 이는 욥기에서와 같이 그 백성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유익되게 하는 것이다.

225. 불순종한 영혼들은 장차 죽게될 때 무지각 상태에 빠지게 되고 자기 주위에 가득 모여든 사납고 무서운 악마들의 얼굴을 보고 공포에 질린다. 그러나 신자의 죽음은 그를 맞으려고 오는 천사나 거룩한 영들을 보고 극도의 행복을 깨닫게 된다. 그 때 먼저 죽은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의 임종에 와서 그 영혼을 영계에 모시고 가는 것을 허락하신다. 영의 세계에 들어가자 즉시 마음이 평안한 것은 주위에 그의 친구들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곳이 땅 위에 사는 동안 늘 믿고 기도하며 바라던 참 본향이기 때문이다.

226. 인간의 영혼을 지상에서 안내하여 가는 것은 천사의 직무이다. 그리스도는 영계에서 항상 자신을 나타내시는데 이는 각자의 영광의 도수에 따라 곧 그 영혼의 발달된 정도에 응하여 강하고 약하게 자기를 계시하신다. 또 어떤 때는 주께서 직접 그 종의 죽음에 임하셔서 저를 맞이하고 사랑으로 그 눈물을 씻어주시고 그를 낙원에 인도하신다. 영계는 마치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모든 필요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것처럼 그곳도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227. 죽은 후 영의 세계에서 영혼은 자신의 발달된 마음과 성질에 비슷한 영과 함께 암흑이나 영광 중에 살게된다. 이 영계는 아무도 육체로 들어갈 수 없는데 다만 그리스도와 에녹 엘리야만이 육체가 썩음을 입지 않고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어 들어갔다. 또 어떤 이에게는 살아있을 때 영의 세계와 천계를 볼 수 있도록 허락된다.

228. 그는 각 방면에서 몇 천 몇 만의 영혼들이 천사에 옹위되어 항상 영계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선한 영들은 천사나 다른 선한 영들과 함께 옹위되어 있기에 악령들은 멀리 서서 주시하고만 있었다. 악인이 죽을 때는 악한 영들이 모여 그를 괴롭게 하지만 천사들이 이를 막아주고 있기에 곧 악령들은 저들을 데리고 어둠 가운데로 이끌고 가버렸다. 악인도 자기를 괴롭히는 악령들을 버리고 천사에게 올려해도 그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그들의 의지가 벌써 천사들이 악령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차라리 악령들을 따라가고 천사들도 그들의 자유의지를 간섭할 수 없기 때문이다.

229. 사람의 영혼은 영계에 오자마자 선과 악이 곧 분리된다.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혼합되어 있으나 영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빛의 아들들이 영계에 들어오면 먼저 감촉으로는 알 수 없는 공기와 같은 투명하고 맑은 바닷물에 목욕하여 거기서 튼튼해지고 원기를 얻어 새로워진다. 그 영이 이 이상한 물 가운데로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것은 마치 문 밖의 공기 중을 다니는 것과 같이 결코 그 물 속에 빠지지도 않고 젖는 일도 없다. 영은 그 속에서 신기하게도 깨끗하고 신선하고 순수하게 되어 영광과 빛의 세계로 더 높이 올라간다.

230. 악한 생애를 보낸 영은 저들과 달라 그들은 영광의 빛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평온 대신 고통을 느끼고 그 불결함과 더러워진 성질이 명백히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여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려 애쓴다 영의 세계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는 더러운 냄새나는 검은 연기가 일어난다. 악한 영들은 이곳에 자기 몸을 거꾸로 던져버린다. 그 속에서는 통회하는 울음소리와 고민하는 아우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영들에게는 이런 소리가 들리지 않고 연기도 보이지 않는다.

231. 영계에는 어린 아이를 위해 특별히 지정된 곳이 있다. 여기서 천사들은 그 영혼에게 천국의 필요한 모든 하늘의 지식을 배워주어 어린 아이는 차츰 자라 천사와 같이 된다. 이 천사와 같이 된 어린 아이의 어머니가 죽어 영계에 올 때 그는 허락을 받아 자신의 육체의 어머니를 만나 반갑게 맞이하게 된다. 그 아들은 어머니를 부르며 붙잡고 기쁨으로 흐르는 어머니의 눈물을 씻어준다. 이는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이 주위의 아름다운 광경을 설명하고 정한 기간동안 중간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그 어머니와 함께 있으며 더 높은 곳에 올라갈 준비를 돕게 된다.

더 높은 곳은 여러 가지 놀랄만하고 기뻐할 만한 사물이 있고 셀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자들이다. 그곳은 아름다운 산천과 화원이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과 꽃들이 가득하여 마음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다 거기에는 존재하고 있다 땅 위의 모든 사물은 그 참 세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지상에서 인간이 알 수 없는 무수한 종류의 존재가 있으나 이 영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232. 철학과 과학 등의 논리적 지식으로 사물을 규정하는 것으로 영계의 이치를 규명할 수 없다 영계는 육체의 눈과 이성으로는 보이지 않고 오직 영의 눈이 열린 자는 누구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적 활동이 아니라 영적 이해력이 필요한 것이다. 물질적 사실을 취급한 우리의 두개골과 뇌수는 땅에 파묻고 영계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사랑에서 나오는 영적 지식만이 필요한 것이다.

233. 논리적 지식으로 일관한 생애 중 그 사람 전체의 생애가 악하였다면 그는 곧 어둠의 영들과 함께 할 것이고 만일 그가 그런 가운데서도 도덕적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였다면 그는 그 철학적인 머리를 쪼으면서 중간 상태의 낮은 곳에서 극히 오랜 동안 맹목적으로 방황하며 자신의 미련에 지쳐 마침내 회개에 이르는 것이다.

234. 어떤 의미로 말한다면 무한한 공간의 전부는 하나님의 현재로 충만한 영계이다. 다른 의미에서 말하면 세상도 또한 영계이다. 세상의 주민은 몸을 입은 영인 때문이다. 중간 상태인 영들의 세계는 죽어서 몸을 벗은 영들의 일시적인 거주처이다. 가장 높은 영광의 세계와 가장 낮은 지옥과의 중간의 세계이다 그 중에도 여러 가지 세계가 있어 각자는 땅에서 진보된 정도에 따라 합당한 세계로 들어가서 천사들에 잠시동안의 교육을 받고 영적 사회로 가게 된다. 선령은 더 큰 광명 가운데로 악령은 더 큰 암흑 가운데로 각자의 내적 성질과 정신적 경향에 따라 나아간다.

235. 이미 죽은 친족이나 사랑하는 자나 성도들도 지상에 사는 우리를 돕기 위해 가까이 오는 때가 종종 있으나 대개는 천사가 이 직무를 행한다 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고 지각할 수 없는 가운데 우리에게 거룩한 사상의 감화를 주어 하나님께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나 특별한 경우에 따라 그 모양을 나타낼 때도 있다. 성령은 우리 마음 속에 있어서 영적 생활의 안정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취시킨다.

236.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지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유용하게 될수록 위대한 사람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하여 봉사할수록 그는 큰 자인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는 자신의 생애를 갱신하는 일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된다. 성령이 직접 그를 가르칠 뿐 아니라 지상의 가까운 성도들과의 교제 중에 은밀하고 보이지 않는 중에 진리와 선의 방향으로 이끌림을 받는다. 그러나 기독 신자도 믿지 않는 진리 추구자와 같이 대개는 진리에 대하여 그릇되고 편협한 견해를 가진 채 죽게된다. 그러나 저들이 만일 영의 세계에서 자기 의견에 완고하지 않고 교정 받기를 기뻐한다면 교정된다. 영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은 그의 지식을 바꾸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237. 영계에 들어온 한 우상숭배자가 있어 즉시 자신의 신을 찾기 시작했으나 성도들에게 한 분 하나님의 나타내심이 되시는 그리스도 외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성도로부터 듣고 몹시 놀래었으나 저는 정직한 진리 탐구자였으므로 자기의 잘못됨을 인정하고 진리의 올바른 견해를 가지려 애쓰며 행여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을까 찾는 중에 그리스도는 저에게 가는 빛 가운데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저의 정도로는 그리스도의 강한 빛으로 나타나시는 영광의 모습을 견딜 수 없기에 가는 빛 가운데 주님을 뵙는 것이다. 주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큰 까닭에 천사라도 이것을 보기 곤란하여 그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것이다.(사 6:2)

그러므로 주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때는 그 영혼의 진보된 정도에 따라 혹은 어렴풋하게 혹은 영광 중에 각자가 주를 보기에 감당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자신을 계시하신다. 주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빛의 강약을 통하여 영들은 생명을 받는 정도가 다르다. 이 빛으로부터 무한한 기쁨과 평안과 진리와 사랑의 힘을 얻게 된다. 또 이 생명을 주시는 빛의 방사와 끊임없이 주께로부터 흘러나와 저들을 넘쳐흐르는 생명을 주는 광선과 사랑의 큰 물결에 목욕하여 모든 잘못은 씻겨지는 것이다.

238. 생애를 통하여 매일의 양식을 얻기에만 전력하고 다른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의심하고 생각지도 않는 완고한 자가 죽으면 영의 세계로 들어오자 몹시 번민한다. 그들은 영의 세계 아래층 어두운 곳에 오래 동안 머물도록 지정되는데 그들은 이 고통 중에서 도와주기를 구하며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래서 천사와 성도들이 사랑과 동정으로 어떻게 하면 이 영광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을까를 가르치기 위해 그를 찾아갔으나 그는 이와 같이 번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가 저의 전 인격을 의심하게 하고 삐뚤게 만들어 그곳을 나오려 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 그냥 살기를 원하였다. 이미 그의 죄성으로 마음이 악에 지배되어 있기에 악한 것이 진리로 보이고 선한 것이 오히려 악과 거짓으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성도들은 그의 장래를 위해 '하나님이여 원하오니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할 뿐이었다.

239. 어떤 사람이 자기의 방안에서 죄를 짓고 있었는데 그 방안에는 많은 천사와 성도와 사랑하는 자들이 함께 있는 것을 그는 볼 수 없었다. 그 모든 영들이 그를 염려하여 그의 부끄러운 행위를 보고 걱정하였다. 그들은 그를 도우려고 왔으나 저의 마음이 악하여 지각할 수 없는 중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오히려 그들은 나중 심판 날에 저의 죄를 증거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 영들은 '바라건대 이 사람이 회개하여 장차 올 형벌에서 면하기를 원하노라'며 그곳을 떠났다.

240. 어느 때 영의 세계에서 한 영이 원통히 울부짖으며 미친 사람 모양 뛰어 다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그는 땅 위에 있을 때 회개하고 믿을 기회가 많았지만 번민이 생기면 언제나 술을 먹고 이를 넘겨 마침내 재산을 탕진하고 가정 파탄으로 자살을 한 것이다. 그는 그 잃은 기회를 원통히 여겨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저를 도우려 하나 저의 삐뚤어진 성격이 회개를 방해하고 있다. 저 마음은 언제나 죄의 기억이 새로우나 그 마음은 이미 죄로 굳어져 있어 회개가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지상에 생을 사는 신자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일이다. 죄를 자꾸 허용하면 그것이 죄인 줄 알고 마음이 괴로우나 진정한 회개를 하려해도 되지 않는 것이다. 죄의 파괴력은 이와 같아 처음부터 가느다란 죄라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얼마나 많은 죄가 저질러지고 있는가 하고 나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죄의 유혹 앞에는 인간의 힘은 아주 무력한 것이다. 이것이 죄의 권세이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여 깨어있어야 한다 죄로 굳어진 그 마음은 다른 악령들과 함께 어두운 곳에 자신을 숨김으로 어느 정도까지 빛에서 오는 고통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241. 하나님은 참으로 사랑이시다. 그는 사람을 자기와 함께 영원히 행복된 교제 가운데 살게 하려고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완고한 마음과 자유의지의 남용으로 그 얼굴을 하나님께 돌리고 지옥을 자기 집으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나 지옥에 넣기를 기뻐하시지 않는다. 사람이 스스로 죄에 얽매여 자신을 위하여 지옥을 만든다 하나님은 결코 지옥을 만들지 않았다. 악한 자가 빛으로 충만한 천국에 이르면 선인과는 달리 스스로 불안을 느끼고 천국의 빛이 그의 더러워진 생애를 환히 비추어 들어낸 때문에 저는 제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여 도망하며 중간 상태인 영의 세계에도 있지 못하고 그곳을 지나 거꾸로 무저갱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때 아름답고 황홀한 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보라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무도 여기 오는 것을 금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도 이 사람을 막은 사람이 없고 아무도 여기서 나가라고 명령한 사람도 없다 이 거룩한 곳에서 도망하게 만든 것은 그 사람의 불결한 생애이다"

242. 지옥으로 내려가는 자 중에는 이런 자도 있다. "당신의 깨끗하고 사랑스런 생애를 만약 생전에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눈이 어두운 때문에 당신의 참된 영적 생명은 육체에 가리워서 그 속의 아름다운 것을 볼 수 없었던 것이 후회스럽다 내가 당신을 죽였기 때문에 당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줄 수 있었던 축복과 유익들을 빼앗아 버렸다 이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죄인이요 형벌 받기에 합당한 자이다 나는 내 몸을 어둠 가운데 숨기는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나는 이 빛에 견딜 수 없다 이 빛 가운데서는 내 마음이 괴로울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나의 죄 깊은 생애를 보고 있는 것이 괴롭다"

이때 성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 오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의 어린양이 자기의 깨끗한 피로서 씻어주실 희망이 있다 그러면 그대가 새 생명을 받고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받고 우리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죄인이 다시 말하였다 "내 죄는 다 들어 났으므로 벌써 고백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는 숨길 수 있었으나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당신과 같이 하늘에서 성도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지만 영계의 가는 빛에 내 몸을 비치는 것도 견디기 어렵거든 꿰뚫는 영광의 빛이 환히 비치는 그곳에 들어가면 어찌될 것인가 나의 가장 큰 장애는 죄 때문에 양심이 무디고 굳어져 내 성질은 하나님을 등지게 되었고 회개가 되지 않는다 내 속에는 벌써 회개할 능력이 사라진 것 같다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고 영구히 이곳에서 나를 몰아내는 길밖에 없다 아! 나는 불행한 자이다"

그때 한 천사가 말하였다 "보라 여기서는 아무 형벌도 선고할 필요가 없다 어떤 죄인이든지 그의 생활이 그의 죄를 증명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까지 세상에 있을 때부터 죄인의 마음에 죄의 형벌은 시작되는 것이고 이곳에 와서야 그 충분한 결과를 맛보는 것이다"

243. 세상에 있을 때 거짓이 습성이 되어 죽어서도 거짓을 하려했으나 저가 말하기 전에 저의 생각이 모든 사람에게 다 드러나는 바람에 퍽 부끄러워하였다. 거기서는 마음의 어떤 상태든지 숨길 수 없고 겉으로 드러나기에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모든 죄가 새겨진 대로 하늘의 빛 가운데 다 드러난다. 거짓하는 사람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인식력을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를 죄인으로 선고하고 위선자로 심판하는 것은 진리이다.

244. 간음자의 모습은 마치 목말라 지친 사람 모양으로 혀를 드리우며 콧구멍은 붓고 몸 안에서 불이 붙어 올라오는 듯 손뼉을 치며 가슴을 긁고 있었다 모든 사치품과 감각적인 것은 세상에 두고 온 때문에 지금은 미친개와 같이 돌아다니며 부르짖는다 "이 생을 저주하라 여기는 고통을 끝내는 죽음이 없구나 이 고통은 세상에서의 고통보다 많이 크구나 나는 어쩌면 좋은가!" 다른 여자와 음행하는 것 뿐 아니라 자기 아내에 대해서도 너무 과도한 동물적 욕구에 잠기는 것도 이 죄에 포함된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는 것은 육체욕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서로 돕고 합하여 그 자녀들과 함께 인류와 하나님께 그 생애를 바치기 위함이다 간음을 크게 보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욕망을 채우는 것도 이 죄에 포함된다

245. 도적질을 일삼던 사람은 영계에서도 도적질을 하려한다 그러나 천국의 모든 물건 그 자체가 저의 불의를 말하고 책망하는 듯한 느낌에 놀래었다 지상에서 포악을 행하다가 저 세상에서도 그 성질을 버리지 못하는 자가 여러 시대를 두고 고통하든가 영원히 고통할 것인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죄인의 영혼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고통이 끝이 없다 빛이 없는 일종의 불이 끊임없이 붙어 저들을 괴롭게 하고 영혼은 죽지 못하고 불은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이 마지막에는 깨끗케 하는 불꽃이 될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246. 육체의 죽음은 끝이 아니고 영계의 탄생날이다 전심으로 주를 섬긴 참 신자가 죽기 조금 전에 주께서 그 영안을 열어주셔서 아직 육체를 떠나기 전에 영계를 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가 죽어 자기 영체를 보니 빛나고 또 묘하여 추잡한 육체와는 아주 달랐다 그가 육신의 껍질을 완전히 벗은 직후 그는 영으로 자신의 죽어있는 육체를 볼 수 있고 자기 방과 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천사들과 사랑하던 사람들에 싸여 주님 앞에 이르렀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의 기쁨에 참예하라 저를 위하여 태초부터 예비하여 둔 가장 영광스런 주택으로 인도하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땅에서 가졌던 생각과 같이 주를 등지고 천사와 같이 가는 것은 주를 모독하는 일이 아닐까 하여 주저하다가 드디어 얼굴을 주택쪽으로 향한즉 놀랍게도 어느 쪽에서도 주를 볼 수 있었다 거기서는 낮은 자도 높은 자를 시기심으로 보는 일이 없고 높은 자도 낮은 형제에게 봉사하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있다

하늘에는 곳곳마다 굉장한 공원이 있어 언제나 모든 종류의 아름답고 달콤한 과실이 열리고 영적 식물이 있으며 여러 꽃이 피어 시드는 일이 없다 과실을 먹을 때는 기이한 맛과 상쾌한 감각을 느끼며 그것이 아름다운 향기로 화하여 몸의 기공을 통하여 발산하여 주위의 공기를 청량하게 한다 빛깔이 화려한 새들의 아름다운 찬미와 천사와 성도들의 찬미 또한 어울려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한다 이것이 주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한 낙원이다 거기는 죽음의 그림자도 없고 잘못이나 죄나 고통도 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평화와 기쁨만 있다

247. 하늘에서는 모든 물건이 영적이요 영안은 중간 물체를 꿰뚫고 한없이 먼 거리까지도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영혼의 상상력이 믿는 것은 모두 다 갖추어져 있고 그것들은 그를 위해 봉사하려고 준비되어 있다 이웃은 그와 비슷한 영혼의 상태를 지닌 자들이 살고있어 늘 즐겁게 교제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기다리는 영광스런 미래인 것이다

248. 천국에서도 교만은 주를 보는 일이나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을 막아버린다 이 교만의 치료법은 지상에서와 같이 겸손이다 지상에서의 기도와 겸손의 생활은 영계에서 삶의 질적 향상을 가져온다 또 신앙으로 죽음을 준비해온 자는 중간상태를 그리 오랜 동안 거치지 아니한다

249. 천국에서의 선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고 더욱 진보하여 그칠 줄 모른다 그것은 지상에서처럼 저들의 진보를 방해할 죄가 깃든 육신이나 세상의 유혹이나 악의 무리가 없고 오직 모든 사물이나 다른 성도들이 그를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의인의 영혼이 도달한 선의 정도는 그의 얼굴 전체에서 방사하는 광채로서 알 수 있다 사람의 품성과 성질은 큰 영광으로 나타나 무지개와 같은 여러 가지 광채로 그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주님의 선한 빛 아래 모든 것이 그 진정한 모습을 숨기지 못하여 드러내고 있다

천국에는 질투가 없다 누구나 다른 사람의 영적 향상과 영광을 보기를 기뻐하여 이기적 동기는 조금도 없이 항상 충심으로 서로 봉사한다 한량없는 은사와 하늘의 축복이 모든 공동사용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 누구나 이기심으로 자기만을 위하여 쌓아두려 생각하는 자도 없고 만물은 모든 이에게 있어 흡족하게 풍부하다

250.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가장 높은 하늘의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의 인격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의의 태양이요 세상의 빛이요 사랑 자체이신 주께로부터 고치는 힘과 생명을 주는 광선과 빛과 사랑의 물결이 흘러나와 우주 끝의 끝까지 미치고 성도와 천사들을 통하여 흐르며 그 접촉하는 곳은(만일 이 빛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활력을 주어 충만하게 하는 것을 본다 간단히 말하면 하늘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소원과 욕구는 주안에서 충분히 성취된다

251. 성경에는 많은 말씀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 혼란을 일으키는 내용이 많다 이는 성경이 이 지상의 사람 뿐 아니라 천국의 사람도 읽기 위해 쓰여진 까닭이다 사람마다 영적인 이해의 차이가 있듯이 그들 각자의 정도에 알맞게 서로 이해의 빛도 달라 그 영적 의미도 수준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성경의 말씀에는 틀림없기에 서로 성경의 옳음을 가지고 주장하다 보니 한 성경에서 나온 말씀들끼리 서로 상반된 뜻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의 해결방법은 이해력이 높은 자는 낮은 자를 무시하지 않고 또 낮은 자는 그 수준에 머무르지 말고 더 높은 수준으로 정진해야 하기에 낮은 수준의 의미를 자꾸 탈피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나아가야 한다

252. 몇 달 전 그는 눈 안에 부스럼이 나서 너무도 아픈 때문에 혼자 방안에 누워 있었다 몹시 아파 아무 일도 할 수 없기에 다만 기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영계가 열리며 많은 천사들이 그 주위에 둘러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와 동시 그의 전 주의가 그 현상에 집중되어 아픔은 잊어버렸다

253. 천사들은 모두 새 이름을 받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님과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각 다른 시대에 다른 지방에서 주께 봉사하던 사람들이다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알 필요는 없다 또 전에 땅 위에 살던 이름도 알 필요가 없다 또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이름을 아는 것을 싫어한다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을 큰 자로 여겨 주께 돌릴 영광을 자기들에게 돌릴까를 염려함이다

254. 사람이 물에 잠기면 위나 아래나 다 물 뿐인 것처럼 영계나 지상에나 어디든지 하나님으로 충만하나 그중 영이 열린 자는 하나님을 보고 그렇지 않은 자는 보지 못한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그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요 또 그의 생명과 사랑을 이미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각 사람의 영적 진보의 등급은 각 자가 하나님을 알고 또 느낄 수 있는 도수에 따라 규정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의 수용량에 맞추어 자신의 영광의 모습을 계시하신다

신의 임재는 깨닫고 기뻐할 수는 있으나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과자의 단 맛은 먹는 자는 느낄 수 있으나 그것을 말로 아무리 잘 설명해도 실제 맛보는 그 기분은 전해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늘에서는 신의 임재의 기쁨 속에 항시 경험하며 살기에 그것을 말로 표현할 필요 없이 모두 이해하고 있다 바다 물 속에 많은 생물이 살고 있듯이 하나님의 존재 안에 무한한 종류의 피조물이 살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이요 우리는 유한이기에 유한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상 안에서만 볼 수 있다

255. 하늘에서는 누구도 거리 관념이 없다 어느 곳에 가려고 생각하면 그 즉시로 자신이 그곳에 나타난다 거리는 다만 물질 세계에서만 느끼는 것이다 만약 한 사람이 다른 지역에 있는 성도를 보기를 원하면 그 순간에 즉시 자기가 그곳에 나타나든지 멀리 있는 그가 자신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또 높은 곳에 사는 자가 낮은 곳에 내려오고자 할 때에는 일종의 영의 가림이 있어 그의 몸에서 나오는 광채로 인해 낮은 곳에 사는 자들이 불안을 느끼지 않게 하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자도 일종의 영적 가림이 있어 그곳의 빛과 영광에 견딜 수 있도록 한다

256. 만물의 창조는 다 목적을 가지고 있다 비록 예수께서 저주한 무화과가 즉시 말라 죽었다해도 창조주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생명의 주께서는 각 피조물을 향하여 어떤 특정의 목적을 부여하신다 그러나 만약 그 목적이 달성되지 못한 듯 보이는 것은 더 높은 의미상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 생명을 찾으신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 없이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것을 보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인 것이다

무화과나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일지라도 더 높은 인간에 의하여 그 생명을 잃는다해도 그것이 의롭고 가장 존귀한 봉사라면 한 그루의 나무가 그릇된 이스라엘을 경계하기 위해 희생되었다 해서 무엇이 의롭지 않겠는가 그리스도는 이 무화과나무로서 유대인과 전 세계를 향하여 열매 없는 생활과 창조 목적에 위배하는 자는 다 마르고 멸망한다는 것을 교훈 하신 것이다 만약 누가 열매를 찾을 시기가 아닌데 주님께서 저주하였다고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선행을 할 시기는 정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257. 하나님은 인간을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이 짓지 않으시고 항성이나 유성같이 일정한 궤도 밖에는 나갈 수 없는 운명으로 창조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인간을 자신과 같이 이해력과 결의와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자유의지의 능력을 가진 자로 창조하셨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보다 우수하다 자유행동자가 아닌 상태는 다만 기계와 같아 알지도 못하고 감각도 없어 무한의 공간을 감각도 없이 돌아다니는 별과 같기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인 기쁨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각하는 영혼이 있어 선택에 의한 기쁨으로 하나님의 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258. 인간과 만물이 허무에 끌려가게 된 것이 결코 영구히 계속되지는 않는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자신과 만물에 허무의 상태인 병과 고통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영적 고민에 의하여 그 영력은 십분 발휘되고 고통과 싸우는데서 완전에 이르는 필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어느 것이든 결국에는 악을 이기고 선으로 회복될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259. 하늘의 백성은 누구나 하나님은 사랑이신 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죄인을 구하기 위해 친히 사람이 되시고 그들을 속죄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 죽으시기까지 하는 놀랄만한 사랑인 것은 영원의 옛적부터 숨겨져 있었다 저는 허무에 복종하고 있는 인간과 만물을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 고통을 당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되는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랑스런 마음을 인간에 보이셨다 그렇지 아니하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그의 무한애는 영원히 나타나지 못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고로 만물은 열심으로 하나님의 뭇 아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때는 피조물이 다시 회복되고 영화되는 때다

그러나 지금은 저들이나 모든 피조물이나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지기까지 함께 탄식하며 고통하는 일이 계속된다 또 중생한 자도 심중에 신음하며 육체가 구속되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때가 와 전 창조물이 만사에 하나님께 복종할 때에는 파괴에서 구원되고 영원히 허무한 상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한없는 행복 속에 살 때 창조의 목적은 다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만물 중에 전체가 되는 것이다

260. 주께서 택한 세 사람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간 것은 다만 휴식하기 위한 것 만이 아니라 저들에게 영광스런 신성의 본체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저들이 주와 늘 접촉한 것은 이 계시를 위한 준비에 불과하다 저들은 주의 기적을 보고 놀랄만한 말도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저들이 존경과 경탄의 마음을 가지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일이다 복잡 다단한 나날을 떠나 인적이 고요한 곳에서 주의 신성한 인격과 초절한 영광에 대하여 고요히 묵상에 잠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때 저들의 영안이 열리지 않고서는 주님의 얼굴과 함께 한 모세와 엘리야의 얼굴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저들의 귀가 열리지 않고서는 주께서 당할 최후에 대한 말씀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또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도 못 들었을 것이다 결국 주와 교제하여 주를 보고 깨닫고 듣는 것은 명상에 의하여 우리의 영안이 열리고서야 가능한 것이다

261.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이 되고 그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세상의 어지러운 소리에서 떠나지 않고는 그리스도의 달고 오묘한 음성을 들을 수는 없다 우리가 전심을 기울여 그를 대망하기 전에는 그를 만나거나 친교에 들어갈 수 없다 이는 내가 잠잠하지 않으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없고 내가 주의를 집중하지 않고는 남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도 모든 정신과 감정을 집중하여 그 앞에서 고요히 기다리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전심을 기울여 그를 찾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262.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 나라에 들어갈 때 왕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던 두 제자와 같이 세속적 영달을 위하여 거룩한 교제를 원해서는 안 된다 마리아는 보좌 옆의 높은 자리를 원하지 않았고 주님 발아래 앉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생명의 말씀을 들었다 그의 좋은 위치를 빼앗기지 말라하신 그 자리를 그녀는 택한 것이다

263. 명상 중에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말씀하신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을 때 그것은 말이 아니요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넘치는 은혜요 그의 충만한 임재이다 샘이 흘러 넘쳐 그릇에 차는 것같이 성령과 참 평화는 마음을 낮추는 자에게 부어 넘친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은 곧 내가 내려가는 길이다

264. 이야기 가운데 한 푼 돈 잃은 것같이 그리스도를 잃었다해도 그를 찾으러 로마나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고 그의 집이요 보좌인 마음깊이 영혼 속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는 언제나 그곳을 비운 적이 없으시다 우리가 잃은 것이 있다면 그가 그곳에 계시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스도는 배 가운데 잠든 것같이 우리 마음에 잠들고 계신다 우리는 큰 기원의 소리로 잠든 그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 그러나 실은 그가 잠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잠들고 있는 것이다

265. 우리 마음 속에는 항상 격정의 폭풍우가 휘몰아친다 이것은 곧 욕망이라 불리우는데 우리 의지가 이 욕망으로 유혹하는 자를 거부하여 정글 속에서 샘터를 발견하기까지 기갈에 고통하는 사슴처럼 하나님께 대한 갈구로 강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는 견디지 못하게 된다 마음과 욕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의 만족은 채워진다 새 새끼가 입을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듯이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다 새끼들은 아직 눈이 뜨이지 않아 어미를 보지 못하는데도 어미가 가까이 오면 기척을 채리고 죽자사자 입을 벌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먹이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잠잠해지는 것이다

그 새끼들은 어미의 사랑에 대하여 조금의 의심도 가지지 않았기에 얼마 후에는 눈이 뜨여 어미를 보고 행복을 느끼며 어미 모양으로 튼튼히 자라서 오래지 않아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육체로 사는 인간은 이를 모르고 오히려 육체의 욕망을 차지하려 애쓴다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인간은 이 새보다 못하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존재와 그 사랑에 대해 의심을 갖고 가까이 하려하지 않는다 예수는 말씀하시기를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다

266.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지은 지옥을 두려워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런 마음의 예배는 마치 자신을 지옥 불에서 건져달라고 뇌물을 드리는 것과 같이 참되지 못하다 또 창조주와 그의 한없는 사랑을 저버리고 다만 그가 만드신 천국을 얻으려고 예배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지옥을 막고 천국을 얻기 위해 예배한다면 오히려 그 가운데 숨어있는 욕망에 빠지게 된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선을 사랑한다면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충만한 임재의 기쁨을 주실 것이다

267. 만일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피조물을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뿐 아니라 피조물도 잃을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만을 구하면 그와 함께 피조물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자아를 구하는 것은 필경에는 징벌과 비참한 종말밖에는 얻을 것이 없다 우리는 자신을 구하는데서 모든 것을 잃는 비참과 고통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면 하나님도 잃고 자신도 잃어버린다

268.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비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존재자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증명하려 하니 그것은 더 어리석은 일이다 미련한 자는 그 속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니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자는 이미 그가 소경이요 하나님을 알 능력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무신론자가 하나님이 없다고 소리치는 것은 마치 태양이 없다고 주장하는 곤충의 생각과 같다 태양이 있다는 것은 나면서 소경된 자 외에는 이론을 펴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269. 사람들 중에는 이쪽도 저쪽도 부인하지 않는 것을 현명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아니하는지 인간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이론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욕구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부여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내적 욕구 없이 창조되었다면 그것은 창조의 본의에 위배되고 그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어미에게서 아이가 낳아질지라도 그 아이는 또한 어미와는 다른 별개의 존재이다 아이는 자기 나름대로 어미를 사랑하나 어미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어미를 사랑하고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는 자랄수록 더 알게 되며 어머니와 친교에 따라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광대 무변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지식은 알면 알수록 끝이 없다 우리는 진보하는 정도에 따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 생명을 주시는 임재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현재는 충분히 모른다해도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빛을 따라 가기만 하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고 영원토록 이 일은 계속될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요 운명인 것이다

만약 현 단계에서 하나님을 완전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때는 하나님이 그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피조물이 실제로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충분한 준비를 하시기 때문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알기를 적극적으로 원하시기도 하신다 배우는 자에게는 단순히 듣기만 하는 자보다 적극적으로 찾아내려는 노력을 하는 자가 더 알게 된다 그러나 지식으로 아는 것보다 내 자신의 자각으로 경험에 의하여 아는 것이 보다 참되게 아는 것이다 또 믿기 전에 지식이든 경험으로든 알려는 것은 결코 참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즉 알기 전에 믿음이 필요하여 믿음으로 알게된다는 뜻이다 결국 먼저 믿음에 의하고 그 뒤 지식이 오고 다음에 산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순서이다

270. 인간은 신의 존재를 떠나서는 사물의 어떠한 것도 그 본질을 알 수 없다 인간은 사물의 외적인 특색은 조금 알 수 있겠지만 그 내적 생명은 조금도 모른다 신과 인간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을 알면 다른 한 쪽을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것만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되지 않았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열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신은 다만 신에 의해서만 알 수 있기에 신은 인간이 되셨다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그러나 신과 인간은 분명 다르다

271. 하나님은 진리를 찾는 어떤 사람에게도 그 신앙이 잘못되었다 해서 낙심시키지 않고 그 사람 자신이 그릇된 것을 알도록 점차 진리를 식별할 수 있도록 하신다 정글 속에서 아름다운 돌을 주워서 그것이 다이아몬드 인줄로 착각한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는 그것을 보석상에게 보였다 상인은 그것이 가짜인줄 알았으나 그가 실망할 것을 고려하여 그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에게 자신의 일을 거들도록 시켰다 결국 그는 지식을 습득한 후에 자신의 것이 다이아몬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주인에게 그동안의 배려에 감사했다 이 이야기에서 보석상 주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그릇된 길에서 방황하는 자를 참길에 인도하기까지 저들이 스스로 진리를 깨닫도록 오래 참으시고 오히려 은혜로 다스리신 후 전 생활을 바쳐 하나님께 봉사하도록 하신다

272.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상 받기 위한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은 배고픈 자신에게 빵을 주는 자를 향하여 감사하기는커녕 선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이 그에게 제공했다고 오히려 큰소리 칠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상 받을 일이 아니고 그의 은혜로 선을 행한 것이니 감사할 일이다

273. 창조주는 인간에게 지적인 감각과 의지를 주셨다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힘을 얻기 위하여 인간은 영적인 양식을 지혜의 이빨로 씹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 지혜를 세상의 일에 대해서만 사용한다 이는 마치 앙상한 뼈다귀를 발견한 개는 입이 찢어지도록 그것을 깨물어 자신의 입이 터져 나오는 피를 맛있게 먹는 것과 같다

274. 같은 땅에 원천을 둔 하천도 원래의 바다로 돌아가려면 여러 지역을 통하여 흐르기 마련이다 여러 지역을 통할 때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 소유를 주장할 자는 없다 그 물은 여러 곳을 흐르면서 모든 사람들의 기갈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물은 하나님의 광대 무변 한 대양으로부터 나와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의 수로를 통하여 모든 자의 갈증을 풀어주며 성도에게까지 이르는데 어느 성도가 그것을 자기에게서 그치게 한다면 나머지 그 물을 마시지 못한 사람들은 어찌할 것인가

275. 영적인 고통은 죄의 결과이고 신체적 고통은 병이나 상해에서 오는 것이다 모든 생물이 감각 기관의 발달 정도에 따라 고통을 받을지라도 인간처럼 고통이 심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감각과 한층 높은 지력이 고난에 대한 심도를 더하게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언제나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면 그 상상하는 정도만큼 실제 고통은 증가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이다 자연계(동물계)에 있어서 몇몇 사태를 제외하고는 보통 죽는 일이 그다지 고통 없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죽음에 당면할 때에는 독의 효력이나 상처의 충격으로 피해자는 반 무의식 상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제로는 우리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심하지 않은 상태이며 고통이나 고난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악에서 오는 결과이며 그 열매는 고민이다

276. 고통과 고난을 언제나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많은 물건 중에는 맛보기에는 쓰고 나쁜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들은 실제로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아주 유용한 것일 때도 있다 어떤 독이나 불유쾌한 괴로움도 일종의 약과 같은 효력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하나님은 본래 유해한 것이나 나쁜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올바르게만 사용한다면 하나님이 만든 어떠한 것도 해할 수 없다

고통과 고난은 사람을 영적 상태로 눈뜨게 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일 뿐 아니라 곤경에 있는 자를 돕고자 하는 선한 사람들에게도 힘을 더하여 준다 그들은 완전을 향하여 성장하는데 필요한 우수한 자질을 양성할 기회를 준다 참다운 우리의 나아가야 할 길은 고통이나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 그들을 감수할 때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기쁨으로 바꾸어 그들과 싸워 승리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기쁨과 평강의 참된 가치는 고통이나 고난을 알지 못하고는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다 단 것은 쓴 것을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알 수 없고 행복은 재난을 경험하지 않고는 제대로 진가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얻기 전에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는 것은 나중에 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지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이것이 천국적인 것과 지옥적인 것의 평정이다

277. 진주의 모양은 서서히 이루어지지만 그동안 진주조개는 각종 생물이나 기생충 작은 고기 모래알 등의 침입으로 큰 고난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진주는 고통과 고난의 산물인 것이다 고통을 겪으면서 태어난 진주처럼 영의 생명도 고통과 고난 없이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러나 이 가운데 주의할 것은 그 진주의 보관이다 아름다운 상태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겸손을 잃으면 그 높은 상태에서 떨어져 빛을 잃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278. 금강석이나 그 밖의 보석류는 아름답게 되기 전에 천연의 실험실 속에서 열과 추위 압력에 시달리며 몇 백천 년의 세월을 경과하였다 인공으로 만든 금강석이나 보석류에는 결점들이 있다 인간의 생애는 결점 투성이 일지라도 때때로 하나님의 연단을 받으면 그 임재 안에 들어갈 수 있다

279. 비나 폭우는 파괴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변장한 은혜이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치명적인 병균을 깨끗이 없애며 이곳 저곳을 청소하기 때문이다 또 태양의 열은 구름을 형성하기 위해 먼저 물 표면을 끓여 수증기가 되게 한다 물이 은혜의 소낙비 되어 지상의 많은 생물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 먼저 태양열에 데워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고난의 생명이다

280.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때문에 자살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평화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고난에 대하여 이해하며 인간으로서 자신이 직접 고난을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자들을 돕고 계신다

281.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당하며 살고 있다 악인은 착한 사람을 만나면 자기의 본성이 그들의 본성과 다르며 양립할 수 없기에 본성적으로 반대를 취하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도끼에 찍혀지면서 은은한 향내를 내는 백단목과 같다 고난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평하는 것은 진실과 주님을 부정하려는 자이며 세상을 가까이 지내려는 자이다

282. 어려운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일진대 우리가 왜 기피하려 하는가 우리 운명으로 하나님이 주신 그 상황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고난을 피하려는 우리의 뜻이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속에 절망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여유를 가져야 한다 그 시험을 통과할 때 기쁜 날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꿀벌은 그저 꿀만을 모으지 않고 침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미꽃도 가시를 가지고 있다 침이나 가시는 모두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우리는 그 속에서 표면만 보고 속의 깊은 뜻은 발견치 못한다 바울의 몸에 있는 가시도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283. 만약 사람들에게 버림과 쑤근거림과 창피를 당한다해도 그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거나 어떤 일을 벌이든지 우리는 전혀 개의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만이 우리의 뜻이요 관심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을 향하여 개들이 짖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낙심해서는 안 된다 개는 짖더라도 이방인은 갈 길을 가는 것이다 개는 얼마 동안은 따라 오지만 다시 돌아간다

284. 만약 장님이 길을 더듬으며 걸어온다면 눈 뜬 사람은 그와 부딪치지 않도록 길을 비켜주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장님이 갑자기 부딪쳐 왔다면 성을 내는 대신에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장님과 부딪친 것을 속상해 한다면 그는 장님보다 더 눈 먼 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와 불신자와의 관계이다

285. 눈이 많은 곳에는 곰이나 짐승들은 여름 한 철에 먹은 것으로 몸에 지방을 저축하여 겨울의 몇 달을 지낸다 우리도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양식을 취해 고난 때에 흔들리지 않도록 힘을 기를 수 있다

286. 자기의 결점을 보지 못하는 자들은 항상 남의 결점만을 들추게 마련이다 자기 결점을 안다면 어찌 남의 결점을 이해 못하겠는가 사람들은 저 자신의 결점은 보지 못하는 대신에 무엇이든지 보고 있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만 씻어주는 분으로 보지 말라 그는 죄를 짓지 않도록 힘까지 주시는 분이시다 이런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면 결코 보이지 않던 우리 자신의 결점을 볼 수 있도록 또 끊을 수 있도록 힘을 얻을 수 있다

287. 악은 비자연적인 것으로 존재 법칙에 상반되는 것이다 악을 행할 때의 심정은 그것이 악이라는 개념으로 싫어하기 보다 그것을 좋아하여 행하는 것이다 그는 그 악으로 자신의 기쁨을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선은 하나님의 속성이나 악은 아니다 또 악이 사단의 속성이라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사단도 죄가 없는 결백한 상태에서 만들어졌는데 현상으로 나타난 악은 자유의지를 쓰는데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악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마지막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에는 악은 선에 의해 소멸된다 악은 소멸적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지옥도 마지막에는 천국으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다

288. 히말라야 산 중에 어떤 굶주린 사람이 아주 맛있어 보이는 과일을 발견하였다 정신 없이 먹었으나 그것은 독 있는 것이었다 자기를 만족시키려던 굶주린 사람과 그를 괴롭히던 굶주림은 함께 죽음으로 영구히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의 기쁨을 죄악적인 것으로 만족시키려 하면 당장은 기쁠 수 있으나 결국은 우리를 해하고 만다

289. 참나무의 어린잎을 찌르는 곤충의 침은 그 잎이 성장하면 혹으로 발전한다 어느 때 주위의 악에 물들면 언젠가는 그 피해를 입게 된다 뱀은 자기의 독으로 저 자신은 해를 입지 않으나 다른 동물은 해를 입힌다 이처럼 악인은 자기와 성질이 같은 자들과는 다른 선한 사람들에게 더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쟈바의 우파스 나무나 미국의 독초는 수액이나 기름의 일종을 내뿜는데 그것이 바람을 타고 옮겨지면 그 영역 안에서 무서운 소모성 역병을 일으킨다 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에 의해 악인의 유독한 나쁜 영향은 여러 방면으로 넓혀져 많은 자들을 죽게 만든다

290. 가장 단단한 나무를 파먹는 벌레나 바위에 구멍을 뚫는 바다벌레는 아주 연약한 작은 벌레이지만 딱딱한 나무나 바위를 파괴한다 우리가 주의를 하지 못하는 작은 죄의 습관들이 우리를 죽게 한다 또 뱀이나 전갈과 같이 독을 가진 생물은 상대를 상처 낸 후 독을 주입함으로 죽게 하여 모두들 두려워 하지만 파리나 모기는 그다지 위험하다고 여기지 못하나 실은 병균을 이리 저리 옮겨 역병을 일으킨다 세상에는 겉으로 드러난 악인보다 숨은 악인이 더 지독할 수 있다

291. 덜 익은 과일에 구멍을 내고 곤충이 거기에 알을 까면 과실이 커질 때 과실의 바깥의 구멍은 채워진다 후에 알이 부화하면 작은 구더기는 과일을 파먹게 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맛있어 보이나 속은 벌레가 먹어 쓸모 없게 된다 우리가 어릴 때 접촉한 악한 사상과 습관은 착실하게 자라서 영혼의 도덕성을 썩게 만든다

292. 멕시코에 춤추는 콩이 있다 이 콩은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는 뒤틀리며 꿈틀대다가 서늘해져야 동작을 멈춘다 그 내막은 어떤 곤충의 요충이 그 속을 파먹다가 햇볕이 비치면 뜨거워 도망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사악한 마음에 의의 태양이 비치면 견디지 못하고 불안하여 암흑으로 도망하려 한다 그리하여 죄인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그의 사랑과 진리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293.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에 자신이 자유의지의 악용만 피한다면 그 어느 것도 그를 해칠 수 없다 우리가 죄를 범한다고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고 자신에게 그 해는 돌아온다 죄는 하나님을 보고 느끼는 그의 임재와 그가 주시는 평화를 깨뜨린다 즉 죄 때문에 우리의 기쁨은 잃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악을 행하는 때는 옆의 누가 피해를 꼭 입게 되고 선을 행할 때 역시 옆의 누가 기쁨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회개란 뉘우치는 것 뿐 아니라 이미 한 일에 대해 해 받은 자에게 갚는 것이다

294. 병의 치료를 위해 혈청을 주사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의 치료를 위해 주님은 자신의 피를 사용하셨다 전 우주는 하나의 몸이다 저마다의 지체는 몸 전체에 달렸으므로 한 부분에 고통이 있으면 전체가 고통하는 것이다 만일 혈청이 어딘가 특정한 곳에 쓰여졌다 해도 몸 전체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또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나아가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295. 제 아무리 위대한 마음이나 풍부한 감정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에 가진 사랑만큼 목적이 고귀하고 수단이 진실한 것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애를 거짓으로 돌릴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과연 누가 엮어내며 그 사상을 과연 누가 상상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나 뉴톤의 사상이 거짓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아니고서는 그러한 사상이 전하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역시 예수를 빼고는 그러한 사상이나 행적을 생각할 수 없다

296. 세상의 지식이나 교육이 우리에게 들려진다는 사실만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그것들은 유익하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그들로 인해 우리는 더욱 파괴적이 될 것이다 식물이 지상의 물과 태양으로 사는 것 같으나 실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생명을 인하여 사는 것이다 외적인 것은 수단에 불과한 것이고 참 본질 곧 그 원인은 속의 것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이성으로 얻는 지식으로 신앙을 유지하려는 것이 위험한 것은 그 속에는 참 생명이 없고 외적인 생명만 있기 때문이다 곧 그것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참된 힘은 되지 못한다 희미한 빛은 발할 수 있을지언정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생명력은 그 속에 없는 것이다

297. 부싯돌이 있는 곳에 불이 있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는 모정이 있다 이 염원은 죄와 무지의 소치로 숨겨져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사람과 접촉하든가 하나님의 영에 접촉되면 곧 불이 붙게된다 인간에는 이 세상이나 다음 세상에서나 그 속에서는 채울 수 없는 하나의 갈망이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은 이를 채우려 이리저리 번민하며 쫒겨 다니다가 끝내는 회개하여 돌아가는 곳이 하나님이다

298.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존재에 대해 한정된 지식이나 박약한 논리로 증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했다면 그 자신이 침묵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아무 때나 마음 속에 우리가 탄복할만한 지식을 주어 자신을 위한 증거로 삼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임재를 맛본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자신을 증거하도록 하셨다 개인의 경험은 이론보다 훨씬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증거할 때도 행위의 인격으로 보여주는 것이 설교보다 도 효과가 있다

이제까지 누구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모습을 보거나 음성을 들은 자가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러 경우에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마지막에는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인간의 소리는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소리는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보다 볼 수 있도록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 더 본질이다 말씀은 말이 아니고 행위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생애이다 또 사람들은 성경은 책으로 읽고 들으면서 그것을 말씀으로 간주하면서 자연이나 여러 창조물은 하나님의 보이는 말씀으로 여기지 않기에 읽으려 하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천박한 일에 매달려 천계의 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이 지상에 큰 글자로 쓴 자연의 대서사시에 눈을 돌리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다

299.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그 행위를 통하여 일종의 위안이나 또는 하나님을 향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자비의 하나님은 그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에 따라 위로를 주지만 그것이 위험한 것은 영적으로 전진을 못하고 그 피조물을 창조하신 배후의 하나님을 알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300. 인간이 아무리 사악한 생활을 할지라도 본성 중에는 결코 죄에 기울어지지 않고 하나님에 기대는 요소가 있다 인간의 양심과 영적 감수성은 둔하게 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에게 의지하려는 그 불씨는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흉악한 자중에도 선한 점이 발견될 수 있다 가장 포악하고 잔인한 범죄자 중에도 가난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기도 한다 그러기에 어찌 어떤 죄인이라도 그가 회개할 수 없다고 단언해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자가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말의 심정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불씨인 것이다 이로 인해 고통을 느끼고 고뇌한다면 그 고뇌는 언젠가는 그를 회복시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301. 사람은 자기의 존재를 완전히 파괴하여 신의 불씨마저 파괴(존재 자체가 완전 소멸되어버리는 것)할 만큼 저 자신을 끝까지 훼손할 수는 없다. 창조주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창조주도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지 않는다. 창조주가 그것을 완전히 파괴되도록 놓아둘 수 있다면 그것을 지어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창조하지도 않았고 파괴할 수도 없다.

302. 하나님은 모든 선의 원천이기에 그분은 모든 도덕의 기본이며 생명이 되시기도 한다. 하나님 없는 도덕생활은 아름답게 보일지는 모르나 돌멩이와 같아서 차갑고 생명이 없다. 하나님과의 접촉을 깨뜨리지 않는 것만이 진리요 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정체는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303.

304. 진정한 영적 아름다움은 한없는 사랑과 찬미와 선이다. 하나님은 항상 그 피조물에 임재 하시는데 하나님의 간섭 자체가 모든 형태의 자연계의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자연계의 아름다움은 내적이며 잠재한 영적 아름다움의 반영이나 그림이다. 모든 자연의 모습은 그 어떤 심적 상황에 상응하는 것이며 그 심적 상황은 자연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제시함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꽃이나 과실, 산, 호수, 시, 산문, 미술, 음악 또는 뜻 있는 활동 등 이 모든 아름다움에 속하는 것은 참과 선의 표현이다. 이런 아름다움이 우리의 잠들고 억압된 충동에 닿을 때 우리는 그 속에서 선과 진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그 진가를 음미할 능력을 갖는 한계에서만 그런 것이다. 예를 들면 음악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마음을 진리로 돌아가도록 인도하기에 하나님을 예배할 때 감수성이 있는 자들에 그 영감이 앙양되도록 도움을 준다.

305. 도덕과 아름다움과의 관계는 근본적인 것으로 진리는 양자의 원천이기에 양자는 그 속에 진리가 살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아름다움은 생명이 있는 것에나 없는 것에나 존재하기에 이것이 다른 피조물보다 속성이 뛰어난 사람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서글픈 일이다.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선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에 진리가 살고 있다.

306.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도 없다. 육체의 눈은 자연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볼 수 있으나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려면 영에 의하여 새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의 영은 그 속에서 역사하고 그는 거듭나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가 되며 낙원이 그에게서 시작되는 것이다.

307. 주님은 유다가 어떠한 종류의 인간이고 또 그가 주님을 어떻게 배신할 것인가를 알고 계셨을지라도 그를 호되게 취급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주님과 함께 지내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 지옥은 사람이 자유의지를 발동해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그 자신 속에 고통의 상황을 만들어낸 상태를 의미한다. 지옥은 어떤 장소가 아닌 이유는 그곳이 장소라면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지옥에도 임재하여 계시다는 논리가 성립되기에 이는 있을 수 없다. 지옥은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308.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나 하늘 나라인데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기로 하늘 나라 역시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상황이 괴로울지라도 그는 하늘 나라 속에 있음을 지각하고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주위 상황을 초월하기에 그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그 안에 있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309. 지옥도 하나님 나라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 자체 속에 있다. 그가 아무리 외면적으로 평안 속에 있는 것 같이 보여도 죄 속에 있다면 그의 마음은 지옥 속에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가 하늘 나라에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곳은 하늘 나라가 아니고 지옥인 것이다. 이는 하늘 나라나 지옥은 장소가 아니고 하나님 없는 마음에 일어나는 고통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310.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다. 또 하나님 나라는 눈물이 없고 고난도 없는 나라이며 끝없는 행복과 기쁨의 상태인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기에 참 신자는 상황의 고난 속에서도 기쁨과 행복을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 속에 있는 것이다.

311.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끝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일을 생물 속에서 끊임없이 행하여지는 혈액 순환이나 호흡에서 볼 수 있다. 또 우리는 그러한 일을 피조물의 운행 속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공기나 물, 지구, 태양, 별 등 창조주의 목적 속에 계속 불변하는 질서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 등이 그러하다.

312. 이브를 타락시킨 뱀은 지금도 손발이 없는 채 얼마나 기어다니고 있는가. 이와 같이 사단은 대의 명분을 잃어 그 힘을 빼앗긴 채 끊임없이 역사하고 있다. 그는 이미 손발을 잃었으므로 자신이 아무리 공포스럽거나 또는 달콤한 몸짓으로 다가올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는 위해를 가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께서 저를 이기셨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그의 커다란 몸짓에 정신을 잃고 만다.

313. 어느 가난한 프랑스의 조각가가 저가 만든 조각품이 춥고 습기 찬 까닭에 파손될 것을 우려하여 자기가 덮고 있던 모포를 둘러 조각품을 보호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아침에 자신은 얼어죽고 조각품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기가 손수 열정으로 하는 일이나 생명 없는 것에는 그 생애를 바치면서 하나님과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는 제 목숨을 아끼고 있다.

314. 소금 덩어리는 녹지 않고는 맛을 낼 수 없고 산 속의 눈도 녹지 않고는 메마른 평야를 적실 수 없다. 우리 인간도 의의 태양에 의하여 자기 부정과 희생으로 연단되지 않는다면 영적 기갈을 멎게 할 수 없으며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없다. 고난과 유혹을 겪지 않고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위해 일할 수 없으며 영적 진보도 이룰 수 없다. 고난과 유혹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자는 아무도 없으며 유혹을 받지 않는 자는 짐승이거나 하나님 그 어느 쪽에 해당한다. 새는 날개를 움직이지만 역으로 날개 역시 새를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신자가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때 십자가는 그를 보호하여 최후의 목적지까지 인도해 줄 것이다.

315. 경험으로 알 수 있듯이 남을 돕는 것은 나 자신을 돕는 것이고 남을 해하는 것이 자신을 해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사랑이라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법칙이다. 이 봉사의 법칙이 우리가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황금율이다.

316. 옛 사람들은 오늘날의 미개한 야만인과 같았다. 그들은 영적 욕구를 의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목적 의식만을 가져 하나님 대신 해, 달, 별 등의 피조물을 숭배하게 되었다. 히브리 민족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민족도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육체의 요구나 이익을 원하고 악을 두려워하는데서 보이는 것을 형상화한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그 후 저들은 신의 형상을 만들고 거기 제물과 희생을 바쳤으나 만족을 얻지 못하여 선 또는 악의 영과 조상의 영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들의 안계가 넓어짐에 따라 영과 육, 원망과 욕구 전부를 만족시킬 영적 실재자를 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저들의 영적 요구와 수용력에 따라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 분이 예수시다.

317. 옛 사람과 지금의 사람 사이에는 생활 방법의 차이가 있듯이 사고의 차이도 있다. 인간 본래적인 욕구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 욕구의 수단은 달라졌다. 신은 바로 이 부분을 만족시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점차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점점 더 뚜렷한 계시를 인간에 주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옛적보다 지금은 더 많은 선과 악의 혼란 속에서 구원을 얻으려는 시도가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기에 이는 곧 풍족한 지성과 그러나 더 부패한 인간의 심성 속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상황 속에 하나님으로부터 예전의 방법과는 달리 모든 사람과 모든 시대의 수용량의 발달에 따라 더 진보된 계시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저 옛날 선지자로부터 그리고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지금은 우리 속에 계신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비는 인간의 필요를 채워주었다. 그러나 진리는 실존자에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새로운 국민이 나타나도 실존은 그대로 존속한다.

318. 각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신앙 경험이나 지식으로 신의 실존을 이해하기에 남의 것이 합해져야 더 온전한 실존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실존의 모습은 여러 사람 중에 한 사람 또 여러 진리 중에 한 부분으로 제한이 되어 각 사람에게 나타나지만 그것을 받은 사람은 그것에 매료되어 다른 진리는 하찮게 취급되어 버림을 깨닫지 못한다. 한 진리는 그 근본에 있어서 항상 동일하나 각 사람의 상태나 신앙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여러 사람이 각기 여러 색깔의 안경을 끼고 사물을 볼 때 그 사물은 여러 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그들은 각자 보이는 대로 그 사물의 색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각자가 자신의 이성으로 신앙을 바라볼 때는 각자의 성질 여하에 따라 여러 빛깔과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나 그것의 원래 모습은 위로부터 참 빛이 비췰 때에야 비로소 그 형태는 어둠 속에서 일목요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319. 처음에는 우리가 멀리서 사물을 보듯 작고 어렴풋이 보여서 그 진정한 정체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참고 한 발자국씩 주님과 교제하며 그 앞으로 나아갈 때 아주 가까이서 사물을 똑똑히 보듯 이해가 증진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지식과 경험이 처음에 비해 많이 진보된 것이다. 우리는 어렸을 적에 멀리서 본 사물을 표현하느라 진리를 잘못 인식한 채 주장하는 어리석음의 때가 있었다.

320. 사과나무를 본적이 없고 오직 씨만을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작은 씨 속에서 그렇게 큰 사과가 열리리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 그러나 종자에 필요한 조건이 구비되면 자라서 숨어있던 참 성질이 나타나 완전에 도달한다. 신자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처음에는 숨겨져 있기에 모든 일에 불분명하나 점차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자라 그 속에 숨은 나라의 비밀이 겉으로 나타나는 생활에까지 자라난다.

321. 나무는 공간을 향하여 자라지만 중력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지혜나 이해력 등은 세상이라는 육체 속에 갇혀있기에 한계가 있으나 이 육체를 벗는 영의 세계에서는 무한대로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보다 저곳은 더욱 뛰어나고 완전에 도달케 되는 것이다.

322. 다른 사람을 떠나 고독 속에 홀로 활동하고 있는 사상가 중에는 종종 이미 그들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극히 국한적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극히 변화가 많은 박물과 같은 곳이어서 그 물건을 본 자마다 서로 자기의 관점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그 지적 시력에 결함이 있어서 영적 경험의 깊은 체험이 없는 채로 모든 것을 바라보기에 자기의 사상으로 진리를 색칠하여 그릇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전자와 후자 모두 목표로 삼는 실존은 한 가지이다.

323. 육체의 감각이나 영혼의 지각이나 그 본질에 있어서 양자 모두 영혼과 외부와의 통역자로 활동하는 것이다. 과자의 단맛이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것같이 감각이 느끼는 것도 감각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그 몸 자체로 사는 것이 아닌 이유는 두뇌와 신경 계통은 그 자체가 사상이나 이상을 지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관이라 부르는 이 기관의 활동은 다만 영혼의 도구로서 그 임무를 수행하는데 불과한 것이다. 사상은 손발이 있어서 우리의 생활을 변하게 한다.

324. 우리는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속 사람과 의식의 세계가 몸과 두뇌보다 훨씬 넓기 때문이다. 우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이해를 초월한 이상의 것은 아니고 깊이 사색하면 알 수 있는 당연한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직각을 통하여 깊은 사상이 문득 마음에 느껴질 때가 있다. 이는 누가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고 배워서 가진 것도 아니다. 또 감각을 통해서 오는 이 세상에서는 이런 것을 얻을 수 없다.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볼 수 없는 영적 세계와 접촉하고 있어 그 빛이 비록 우리 속에서 보거나 의식하지 못해도 속 사람에게 비친 것이다. 어떤 진리는 영적 세계로부터 우리의 내적 지각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스며든다. 이는 경험으로서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는 희미한 거울로서 보고 있다.

325. 개미와 벌은 저들 작은 세계 속에서는 부지런하고 영리한 종족이다. 그러나 저들의 세계를 넘을 때 더 우수한 동물과 인간을 본다. 저들은 겨우 작은 저들의 척도만을 가지고 남의 생활과 성질을 잴 수 있을 뿐이다. 이같이 우리도 영계의 최고 영적 존재들과 비하면 하등 차원 속에 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개미를 완전히 알지 못하듯 저들도 우리를 완전히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와 저들의 세계를 완전히 아신다.

326. 생물과 무생물이 창조되기 전에 공간이 있었다. 우주가 만약 멸망해도 이 공간은 짙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주가 멸망하고 공간만 비며 짙어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물질이 그 자체의 힘으로 공간 중에 나타났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생명 있는 조직체가 생명 없는 물질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주의 질서와 구성을 발견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을 아는 무한한 실존자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유형 무형의 양자를 창조하고 이것을 공간 중에 충만케 한 것이다.

327. 신 밖에 영원한 것은 없다. 우주가 만약 영원한 것이 아니라면 우주는 피조물이어야 한다. 신이 존재물을 창조하였다면 그때 신 안에 한 변화가 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불변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이 가운데 발견된다. 즉 우주가 존재하도록 출생하기 전에 신의 지식 중에 존재하였다. 외적으로 존재하거나 지식 중에 존재하거나 그에게는 한 가지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객관적으로 신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나 한 편으로는 그에게서 나와 그 안에 있고 영구히 그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에게서 나와 계속 그로부터 유지되기 때문이다.

328. 하나님의 영이 물 표면을 덮고 있었다. 그래서 무수한 피조물의 종족이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 이 같이 하여 더욱 주의 영은 무한한 공간 중에 사람의 영혼의 위를 날개로서 덮으셨다. 신만이 위대하고 영광된 자신을 닮은 인간의 모습을 아신다.

329. 신은 창조자이나 악의 본질은 악의 힘에 의해 비롯된 것이다. 신은 모든 영혼의 창조주이시나 인간 속에 있는 타락한 성질은 그들의 자유의지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신은 죄와 악을 짓지 않으셨다. 신은 다만 저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을 뿐이다. 그러나 신은 인간에게서 악한 성질과 영적 병을 영원히 제거하고 이것을 기록하고 온전케 하시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죄의 뿌리가 제거될 때 모든 피조물에게서 악의 결과는 소멸되고 다만 슬펐던 경험의 회상이 장래 생활에 죄에 대한 큰 경계를 생각게 할 뿐이다. 무엇이나 신의 성질과 속성에 거스르는 자는 신의 지배 하에 영구히 존재하기는 불가능하다. 종국에 선으로 변화되거나 소멸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된다.

330. 사람들은 항상 과실, 꽃, 냇물, 호수, 산등과 같은 자연의 미를 보며 애착을 가질 줄은 알지만 그 배후의 창조주를 발견하고 느끼지는 못한다. 우주가 이같이 아름답다면 그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 원천인 신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가 주신 선물이 이같이 달콤하고 매력적이라면 그의 임재는 그 얼마나 즐겁겠는가.

331. 잔잔한 수면에 물결이 일 때 우리는 그 가운데 비친 얼굴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없는 것같이 우리 마음 속에 세상의 물결이 잔잔해지기까지 영혼의 진상을 볼 수 없다. 고요한 묵상 중에 자신의 무력함과 죄성을 느낄 수 있다.

332. 마음이 고요하고 세상 혼란에서 떨어져 있으면 지남철이 북극에 끌리듯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끌리어 그에게 향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성정은 무한한 사랑과 성결에 영향 받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 치고 하나님 없이 산 사람은 없다.

333. 기독교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모든 종교는 의식과 교훈에 기초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영원히 살아 계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토대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에게 자기 손으로 써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그 자신이 저들과 늘 함께 있고 그 안에 있고 그들에 의하여 그의 사업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나는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주님 외에 어디 있겠는가. 오직 신만이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은 오늘날까지 그 백성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후에도 일하시면서 만사 만물에 계실 것을 우리는 안다.

334. 그리스도는 단 6시간 뿐 아니라 전 생애를 십자가 위에 있었다. 만약 청결한 사람에게 불결한 물과 때는 견딜 수 없고 선인에게 악인과의 교제는 몇 분간이라도 견디기 어렵다면 하물며 거룩한 이가 33년 동안 죄인과 함께 있는 생활은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죄 많은 인간에게는 이 수난의 고통을 측량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십자가의 비결이 이해된다면 신의 놀랄만한 사랑 즉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알 수 있고 그가 사랑의 화신으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죄악된 세상에 오신 것을 알 수 있다.

335. 그리스도의 고통은 특히 사람을 구하기 위하여 받으신 신의 고통이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관계와 결합에 의하여 신 안에 살고 있다. 신은 그가 창조한 자와 산 결합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고통의 감각을 지으신 신이 자기도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수난이었다.

336. 영원 전부터 보이지 않던 한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그 자신의 생명을 버림으로 죄인을 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은 끝이 아니고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과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진 것만이 고통이요 죽음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337.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릴 때 두 가지 세계가 여기 모여 있었다. 곧 모든 나라와 여러 지방 사람들이 유월절 절기로 함께 모여 마치 모든 피조물이 자신의 죄 때문에 함께 모여 서서 자신들의 죄의 입증자가 된 것처럼 영의 세계에서는 천사들이 거기 함께 있어 그들의 죄가 심판 당하는 것을 증거자로 보고 있었다.

338.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육체로 다시 부활하셨다. 육체는 상하였으나 하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게는 죄도 흠도 없기에 죽음을 정복한 후 영광의 몸으로 변하여 신과 함께 그 보좌에 앉으신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받은 그 상처는 영광에 들어간 그 영체에도 영광스런 흔적으로 남아있고 구속받은 자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그의 한없는 사랑을 상기케 한다.

339. 신은 영이지만 영 뿐 아니라 생명 없는 물질도 창조하셨다. 신이 그 본성에 관계없는 물질을 만드셨다고 해도 신이 그 물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이 영이므로 영이 아닌 물질을 창조할 수 있다면 그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육을 가진 몸을 만들어 이것을 영광있는 영체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분이 그리스도이시다.

340. 우리는 깨기 위하여 잠드는 것 같이 부활하기 위해 죽는다. 밤이 만물을 덮을 때 피곤과 무기력 중에 우리는 잠들지만 아침에는 상쾌함에 넘쳐 일어난다. 이같이 우리는 쇠약과 부패 중에 죽으나 생명과 영광 중에 부활하여 죽음도 죄도 없는 생명과 영광 속으로 들어간다.

341. 사람은 영혼이 육체를 입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주도 육체를 입는 것은 그리 어렵고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신에게는 어떠한 일에 대해서도 무한한 능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신이 육체를 입은 것이 무엇이 불평의 대상이 되겠는가.

342. 기독 신자의 힘은 신과의 교제에서 나온다. 이것이 영적 양식이다. 보상을 바라는 것만으로는 고통을 참고 인내할 수 없다. 인간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힘으로는 신의 완전에 이를 수 없기에 우리의 신앙은 신의 도움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여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셔 우리를 도우신다.

343. 신의 속성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신과의 교제를 즐겨 원하는 요구를 가진 자들을 위해 존재하신다. 이는 맛있는 음식의 맛이 그 물건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고 그 맛을 보는 사람을 위한 것과 같다. 신은 사람과의 교제를 계속하기 위해 사람을 만드셨으므로 실재를 지각하는 힘과 신을 즐겨하는 능력까지도 사람에게 구비하여 주셨다. 이것이 영적 지각이다. 이 영적 지각은 사실과 허위, 참과 거짓을 가려내는 시금석으로 양심 속에 넣어져 있다. 인간은 이것을 죄로 인해 잃어버렸으나 신의 은총으로 깨어날 때 그는 자신의 일상 경험 속에 신과의 교제를 하고 있는 자신을 본다. 이 경험이 있다면 세상의 어떠한 논리와 철학과 증거로 그를 설득하려 해도 그의 사상은 결코 흔들림이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논리와 철학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실재의 지식이 마음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좋은 맛을 알기 위해 필요한 식별력은 책 속에 있지 않고 혀끝의 맛의 실재에 있기 때문이다.

344. 히말라야 산 중에서 벌거벗은 채 구멍에서 사는 한 들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과자를 먹어본 일이 없고 본 적도 없었다. 그가 과자 한 개를 받고서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고 있다가 먹어보고는 놀라며 기뻐했다. 맛보기 전에는 맛이 있는지 없는지 그에게 관계가 없었으나 이 때도 좋아하는 맛의 감각을 느끼는 혀는 그에게 있었다. 과자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나 그 맛의 성질에 대한 설명은 필요 없는 이유는 그 맛을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같이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실존은 저들에 떠나 있는 상태이지만 신의 실재를 지각하는 힘은 그에게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345. 사람이 신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죄로 인해 그 지각이 죽은 까닭이다. 그러나 회개하여 참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으면 반드시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신다. 이런 후에도 벙어리와 같이 그 기쁜 상태를 표현하기는 어려우나 생활과 행동이 하나님의 실재를 계속 증거하며 그 맛을 누리는 것이다.

346. 로마 시대에 사람들은 맹수와 죄수와 싸우게 하는 잔인함으로 그 마음이 물들어 있었다. 이 때 기독 신자로 테레 마커스라 하는 은자가 있었다. 그는 수난자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바 이 야만적인 행위를 종식시키려 하다가 성난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 당시 하찮은 것이었으나 후일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었고 그로 인해 그들은 그 잔인한 풍습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것이 기독 신자가 가진 놀라운 힘인 것이다.

347. 지식은 상상과 사상에 기초하고 있으나 참된 사실(경험)에는 근거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때로 하늘에서 오는 것 같으나 또 지옥의 반사일 수도 있다. 이 지식은 때로 사람의 오해와 착각에 의하여 곤란을 당하게도 한다. 이성과 지식은 때로 성서를 이해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하나 한 편으로는 성령의 계시로 된 성서의 깊은 영적인 의미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대개 껍질을 자세히 조사한다. 예를 들면 문제와 시일에 대하여, 사건과 저자의 특색을 조사하고 파악하며 정작 중심 핵이 되는 실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서있는 자는 언제 누가 복음서를 썼는가 하는 점등에는 관심이 없고 실존과 친하는 것에만 애정을 둔다. 이 진리의 증거는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이나 논리적일 필요는 없고 설명을 요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것에 정력을 쏟을 필요는 없다. 진리는 낡고 새로운 것이 없이 예전부터 영원한 까닭이다.

348. 일을 하는 노동자의 먹는 것은 쌀 우유 야채 같은 단순한 것이므로 저는 항상 건강하지만 상등 요리 식사를 하고 사무소와 서재에 잠겨있는 사람은 소화 불량과 비만에 걸리기 쉽다. 이와 같이 단순한 신앙의 사람은 단순한 영의 식물을 먹는다. 그들은 이성과 지식보다는 성령에 의지해 영적 직관에 의해 신앙을 유지한다. 이성과 지식은 매우 유혹적이고 매력이 넘치기에 쉽게 말씀을 이해하고 감동을 받기 쉬운 듯 보이지만 이로 인해 영은 쇠태하고 인간 자신의 힘만으로 신앙을 유지하게 되어 결국은 사망에 이른다. 말씀을 아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요 신앙에 힘이 되지만 그 지식이 선과 결합하지 못하면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되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를 가리는데 쓰이게 되어 결국은 독이 되어버린다.

349. 우리는 성경의 적용을 너무도 단편적으로 하기에 때로 실수를 많이 하면서도 그것을 모른다. 만일 탕자가 직접 아버지께 갔다는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주장하기를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는 것도 중간의 중재자가 필요 없다고 한다면 이는 겉으로는 맞는 듯 보이나 사실은 부분적으로 껍데기만 옳을 뿐 그 내용물은 틀린 것이다. 성경의 한 말씀 속에는 무수히 깊은 뜻이 있는데 그 껍데기만 보고 또 부분적으로만 보고 그 의미의 진정한 뜻을 놓치고 잘못 적용시키는 사례가 허다하다. 탕자는 이미 아버지를 알고 있는 자이기에 중재자를 경험한 자와 같다. 비록 그의 생활이 비참하게 되었을 때 그는 지난날의 경험을 상기하고 하나님께 돌아간 것이다. 이런 자는 중재자가 이미 그 마음 속에 있기에 그도 역시 중재자에 의해 아버지께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없는 자라면 새로운 경험으로 중재자를 만나야 아버지께 갈 수 있다. 결국 양자 어느 것이든 중재자 없이 아버지께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350. 성경은 지식의 책이 아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사도들은 성경의 주요 사항을 단계적으로 분류하여 더욱 뛰어난 해석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단순하고 지적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문체의 형식이나 첨가도 없이 그대로 기록하였다. 우리도 이것을 읽을 때 성령의 도움으로 단순한 직관에 의해 읽는 법을 배우고 지식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

351. 그리스도의 선구자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 자신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한 말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땅의 고통이나 번민이나 죽음은 죄의 결과이고 다음 세상에서 하나님과 분리되는 일이나 지옥 그 자체도 다 죄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죄의 회개 없이 분리와 파멸에서 건짐을 받지 못한다. 마음 속에 천국을 얻고 싶으면 자유의지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면 성령은 새 생명을 주시고 마음 속에 천국을 열어주신다 회개는 신앙의 근본적인 것이다.

352. 그리스도는 행한 것을 말하고 말한 것을 행했다. 그는 증거와 모범을 보이지 않고는 일생 중에 어떠한 교훈도 말하지 않았다.

353. 어린이는 저들의 요구를 표현할 수 없으나 더듬는 말로 뜻을 나타내려 하며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눈물로 그 소원을 호소한다. 발로 걸을 수 없을 때는 손과 무릎으로 기어 어머니 무릎에 가서 먹을 것과 깊은 사랑을 받는다. 저들을 벌하려고 책망하거나 때리면 도망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달라붙는다. 참으로 우리가 아버지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어린애와 같이 되어야 한다.

354. 유리 뒷면에 수은을 바르면 자기 얼굴을 반사하는 거울을 만들 수 있으나 수은이 없으면 유리는 투시된다. 이같이 우리 생명의 배후에 자기를 세우면 우리는 자기의 반영만 보게되고 자기를 제거할 때는 어디를 보든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355. 세상을 버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쁨에는 두 가지의 것이 있는데 한 가지는 그 기쁨으로 더욱 영적인 나라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이런 합리적인 기쁨은 필요한 것이요 그리 나쁜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달픈 삶에 휴식을 취하여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빛이 강하면 눈이 상하나 너무 오랜 기간 동안 어둠에 있으면 그 영혼이 지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쾌락적인 기쁨이 있는데 이는 우리를 창조주에게서 떠나게 하고 더욱 자신의 안락만을 취하게 하여 눈멀게 만든다. 이는 영적인 행복을 찾는데 방해가 되고 우리 마음을 미혹하여 병들게 하고 귀신의 불빛을 쫓아가게 한다.

우리의 것을 버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데는 중용이 필요하다. 한 쪽에 너무 치우치든지 일정한 한도를 넘는 것은 오히려 신앙에 방해 요소가 된다. 추위나 더위나 도를 넘으면 해가 되기에 보통 온도에 있는 것이 필요하고 기분이 좋다. 너무 낮은 음은 들리지 않고 답답하고 또 너무 높은 음은 귀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적당한 범위 안에서는 음악적이요 유쾌한 음이 된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의 정도에 맞는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자기의 한도를 넘는 너무 높은 곳을 일시에 올라가려는 욕심보다 지혜로운 것이다. 그러나 또한 신앙은 자라지 않으면 그 상태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 없고 추락하기에 너무 높은 이상은 아닐지라도 한 단계씩 높은 곳을 이상하는 것은 필요하다.

356. 과학자나 철학자나 지식자는 모두 물질이란 티끌에 가리어 육체 속에 있는 영혼이나 물질 저편의 다른 세계는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저들은 인격을 형성하고 있는 육적 영적 요소가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줄로 안다. 그들은 오관에 관계되는 사실에만 치중하기에 그들의 사고에는 한계가 있다. 저들은 어떤 범위 내에서의 과정은 설명하지만 그 원인은 설명하지 못한다.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되는 과정은 해결하지만 원인은 설명하지 못하기에 혹 넷보다 많을 수 있는 가능성은 검토할 수 없다.

둘과 둘의 밀알은 넷이지만 그 네 개의 밀알을 심으면 수 백 수천의 밀알이 되는 것은 취급하지 못한다. 곧 네 개의 밀알 속에는 이미 수 천 수백의 싹이 존재하는 것에는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싹이 있는 곳에 식물은 항상 숨어 있다가 정한 때가 오면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넷이라는 숫자 속에는 수천의 수가 존재하고 또 둘과 둘의 합은 넷 이상이라고 결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왜 나오느냐에 대한 것은 설명하지 못하고 또 어떤 생명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357. 신앙인 중에 어떤 이는 세상을 황폐케 만드는 악한 자는 벌을 받아 격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용서와 이해와 돌이킴에 관한 것은 오히려 악에 더욱 대담하게 하는 방종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거하는 편이 고치는 편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만약 고통과 병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신은 약에 고치는 특성을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은 어느 악한자라도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지독한 악을 행하는 자를 볼 때 우리 마음은 그를 자기 곁에서 제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그를 고치고 싶은 것이다. 크리슈나는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선한 자를 구원하고 악한 자를 멸하기 위함이다’고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358. 사람은 물에서 나는 독인삼 같은 존재이다. 이 식물은 건조한 땅에서는 해가 없으나 습지에서는 독이 있다. 사람도 악한 환경이나 불량한 상태에 있으면 악에 감염될 우려가 있으나 하나님과 친할 때에는 거룩하고 순진하게 되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 이름을 붙여주시는 것을 성경에서 본다. 어떤 존재에 이름을 붙인다는 뜻은 인간을 창조하신 이가 그를 속속들이 잘 알고 있고 그를 용납하며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와 함께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물의 본질을 모르기에 사람이 지어준 이름에는 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 나는 스스로 있는 자 ( 여호와 )’라고 말씀하신 것 외에는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았다.

359. “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히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는 이 땅과 하늘에서조차 진행되는 인간의 진보의 과정이다. 이 땅에서 가장 뛰어난 자도 하늘에서 또한 씻기고 가르침 받고 더 나은 상태를 향하여 진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의 정지는 곧 부패와 멸망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종국은 있어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히 될 때 더 이상의 자극은 필요 없고 목적이 달성되어 생명의 원천이요 생명의 생명인 사랑은 영구히 보존된다. 그때는 떨어지는 것이 없다.

360. 사람이 탐색과 실험으로 신체에 힘이 나고 장수하는 방법을 얻는다면 하물며 영적 생명의 근원 속에 영원의 생명과 강건의 힘을 얻지 못할 리 없다. 물질계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이 영계도 다스리시는 때문이다. 우리가 영원의 생명을 얻은 때 그전까지와는 달리 온전을 향한 진보는 속도가 붙을 것이다. 이 땅위에서도 역경과 장애를 뚫고 진보를 거듭한다면 이 땅의 제약을 벗는 하늘에서는 그 진보가 얼마나 빠르겠는가 에덴 동산은 진보와 정지를 결정하는 시험무대였다.

361. 우리의 지혜가 진보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기에 우리는 충분히 지혜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랄 수 있다. 이 지혜가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의 것을 받는 것은 물론 깨달을 수도 없다. 하나님은 감추지 않고 방해하지 않으시나 인간이 영의 눈이 멀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에 부여한 자유의지는 그것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라는 것인데 인간은 자꾸 기계와 같이 자기를 낮추어 자유의지를 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고 기계처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받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팔을 벌려주기를 바란다. 이러고서 어디 인간이 되겠는가.

362. 우리가 신같이 되면 오히려 신을 반역하겠는가. 신같이 되지 못하였기에 반역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같이 완전에 도달하면 이미 반역의 성질은 소멸되는 것이다. 만약 반역하려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아직 완전이 아니다. 더욱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에 충만함으로서 신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은 무한한 것이 된다. 이 사랑의 화신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같이 완전케 하려는 신의 목적인 것이다. 이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인내가 필요하다. 아직 날개 없는 병아리가 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날을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조금씩 주어진 그 때의 영적 운동에 자신을 길들여야 한다. 병아리가 아무리 빨리 날기를 고대한다 해도 그것은 사육사에 달린 것과 같이 우리의 신앙도 거시적인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363. 종교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인증하려는 자연적이며 보편적인 하나의 요구이다. 우주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전심을 다하여 경배하며 전능하사 영원토록 계시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기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생명의 무한한 원천인 그분은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의 제 1원인이 되는 실제 그것이다.

364. 피조물은 신 자체는 아니나 신을 떠난 독립적 존재도 아니다. 신의 임재가 곧 모든 우주에 있는 것들의 생명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살고 활동하고 존재하고 있다.

365. 고행자와 헌신자들 중 ‘요-가’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다. 요가가 일정한 자세를 취하고 앉아 숨을 끊고 콧등을 응시하면서 명상하는 것은 요가 법식의 결점이다. 이같이 하여 저들은 황홀 상태에 빠지고 그 가운데서 거꾸러진 세계를 본다. 그러나 그 세계에서 진리를 찾아내기 보다 기만당할 염려가 있다. 자기의 코끝을 응시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366. 불교가 말하는 열반이라는 것은 선하든 악하든 모든 욕구를 소멸시키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 욕구는 모든 고통과 번민의 원인이기에 그것만 인간이 뿌리칠 수 있으면 열반의 상태 곧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불교도들은 말하기를 좋은 욕구라 하더라도 그 내용을 면밀히 살피면 자신의 이기적인 기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어떤 선한 잃을 할지라도 그 속에는 자신을 기쁘게 하려거나 보상을 바라는 목적이 있기에 좋은 욕구라도 사악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결코 채울 수 없는 삶에서는 결국에는 갈망과 번민만 만들어 내기에 그것마저 제거하는 것이 곧 열반이라 한다.

그러나 선다싱은 다르게 말한다. 사는 자는 지각없이 살 수 없는 것같이 욕구 없이 살 수 없다. 존재가 있다면 욕구는 생명과도 같이 항상 따르므로 감각이 있는 곳에는 그 욕구는 일어나는 것이고 그는 살아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영과 육의 욕구를 적당히 충족시키는 것이 생존의 법칙이다. 만약 욕구를 완전히 죽인다면 욕구를 가진 생명까지 죽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욕구를 죽이는 것은 구원이 아니고 파괴인 것이다.

367. 욕구와 존재를 창조하신 이는 욕구에 따라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재료를 미리 마련해 두셨다. 만약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재료가 없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이는 기갈 시에 물을 준비하신 것과 같고 굶주린 자를 위해 양식을 마련하신 것과 같다. 또 누구든지 고통 속에서는 그것을 피하려는 욕구가 있는 것을 보아도 신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욕구를 그 마음에 넣은 것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슬픈 자는 그 상태를 피하여 기쁨의 상태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모든 욕구를 버리려는 그것조차 또 하나의 욕구인 것이라면 인간은 욕구 속에서 영원히 탈피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 욕구를 버리려는 것은 불을 가지고 불을 끄려는 것과 물을 가지고 물을 말리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다.

368. 창조자가 우리에게 영적 육적 지각을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보이는 것에도 관계가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다른 피조물과 우리가 관계가 없다면 그는 우리에게 영적 물질적 실재와의 친밀한 결합과 지각을 주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욕구와 이에 응할 많은 재료가 주위에 있다는 것은 창조자의 높은 계획을 보여주는 동시에 창조자의 목적과 의지를 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자가 준비한 것을 취하려는 욕구를 모두 버리는 것은 그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재료들을 사용하는데 적당을 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369. 욕구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채울 재료가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아울러 따가 오면 그 욕구는 만족될 것이므로 영혼의 갈망은 그 만족의 예언처럼 미리 증거되는 창조주의 계시와 같다. 우리 생의 걸음을 따라 갈 때 더하는 것은 불안보다는 욕구의 증가이다. 왜냐하면 불안 속에는 욕구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안을 처리하기보다는 욕구를 처리하는 것이 더 근본적이다. 불안은 욕구의 결핍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간다면 선하신 신은 그 계획에 따라 더하여 가는 욕구를 차츰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는 꼭 이 세상에서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은 이 세상보다는 저 하늘이 더 본질인 것이다. 우리의 욕구가 아무리 크다해도 그것을 부여하신 자가 그 욕구를 주신 것이기에 능히 그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악한 욕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370. 어떤 행승이 검정 담요를 두르고 쥬나이드의 승원에 들어갔다. 그 이유를 물은 즉 “ 나의 신이 죽은 때문이다 나는 내 육체적 자아가 신의 진리 표현임을 모르고 그것을 못되게 산 때문에 내 몸을 죽인 것은 곧 신을 죽인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다.

371. 이기심을 제하고 모든 죄에서 나오는 사욕을 멸하는 것은 자기를 멸하는 참 의미는 아니다. 죄와 세속에 대해 죽고 생명에 들어가 영원히 신 안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자기를 소멸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이요 실존이다 곧 죽는 자는 살게 되는 것이다.

* 서론

1926년 썬다싱 전이 처음 나와 수십판을 거듭하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책은 썬다싱의 8권의 저서를 전집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은 물질 문명과 과학 만능과 무신론으로 빛이 가려 짙은 안개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광채를 비추어 준다.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 참 선지자는 비난을 받기 마련인데 썬다싱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개는 짖어도 대상은 간다’는 격으로 썬다싱은 자기의 사명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그의 행적을 보면 집회 중 붙은 손가락이 펴지기도 하고 기도 중 사나운 표범을 마치 고양이를 대하듯 어루만지기도 하였다. 마술에 걸리지 않고 안수와 축복 기도를 구하는 자에게 “오직 손에 못 자국난 그리스도의 손만이 당신과 모든 사람을 축복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어떤 집회를 끝낸 후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말하였다. ‘성 부라이드 교회에서는 모인 회중 모두가 감격하여 엎드려 기도하였는데 이와 같은 일은 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다. 이 세상 밖의 세계에서 한 사람이 와서 말하는 것같이 느꼈다’ ‘그것은 진실로 큰 경험이었다. 나는 내 영혼을 이 대사도 앞에 꿇어 엎드렸다. 나는 이제 그를 보지 않고 그가 전하는 예수만 보게 된 까닭이다’ ‘나를 회개하게 한 것은 당신의 설교가 아니고 당신 자신이다. 인도인인 당신은 정신과 태도에 있어서 완전히 그리스도와 같다 당신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산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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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나사렛 예수 이름의 철장권세로 명하노니
글쓴이 : 심판주 예수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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