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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영성의 신비가/썬다싱

히말라야의 눈꽃 요약

by Andrew Y Lee 2020. 7. 16.

히말라야의 눈꽃

이기반 지음

 

 

어린 시절

 

부유한 가정에 평범하게 태어남.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해 방황.

자살을 눈앞에 둔 초조하고 절박한 상황에 있었을 때 주님을 만나게 됨.

시크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첫 번째 사람, 가족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음.

그의 삶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사는 삶을 살리라고 결심,

신부 레드만에게서 세례를 받음.

 

지(知)의 세계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행(行)의 세계로

 

일신의 명리를 도모치 않고,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불우한 사람들에게 다 주어 버리고,

자신은 한몸을 던져 봉사와 희생의 길을 택한 스토크스의 삶을 통해 썬다는 지(知)의

세계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행(行)의 세계로 삶을 살게 된다.

성 프란치스코 탁발교단의 이상과 봉사의 세계에 영향을 받음.

행동하면서도 집착 없이 사는 자유로운 삶, 모습 없이 삶으로써 참으로 모습 있게 삶.

 

앤드류스 신부가 기고한<크리스찬 쎈튜리>

“코트가르 마을의 위쪽에는 동굴이 하나 있었다. 그 동굴에는 썬다 싱과 스토크스,

그리고 아이들이 몇이 기거하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그 동굴 공동체에는

나환자들의 아들로서 나병이 감염된 것같은 아이들이 둘, 소경이 하나,

그리고 절름발이가 썬다 싱 일행과 같이 기거하고 있었다.

스토크스씨와 썬다 싱은 그 병들고 불쌍한 유랑 어린이들을 마치 암탉이 병아리들을

날개로 싸안듯이 부모 노릇을 해주고 있었다.

 

티벳에서 은수 사두 그리스도인 ‘마하리시.’

마하리시는 티벳의 카일라스산에 거주해 온 지는 209년이 됨. 17세기 초반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출생한 사람.

이 마하리시 사두와의 만남 이후에 천사가 썬다 싱을 내(川)에서 업어 나르는 사건 이후,

썬다는 자신이 업혀 날라진 만큼 죽을 때까지 사람들을 진리의 강 저편으로 업어

날라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선을 굽고, 숯불을 피우며 수고하는 인생들을 기다리시는 예수(요 21:9).

그 생명의 예수에게 내 몸을 뗏목이 되게 해서라도 사람들이 밟고 건널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오직 예수를 삶으로써만 도(道)에 선 나로 성숙시켜야 한다.

 

1. 인도 교회의 실상과 문제점: 이질감

 

인도교회는 인도인의 문화와 심성적 풍토에 토착이 되어 있지 않음.

인도에 있는 서양인들의 교회나 다름없었는데,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교단세력이

형성되고, 선교사들 주위에서 교권의 기득권을 차지한 사람들이 얌전한 공리주의자가

되고 교단 정치가들이 되어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실정.

근접할 수 없는 이질감을 생각하게 됨.

“말씀안에서 다시 나, 서로가 서로에게 빛이 되고 위로가 되고, 한없이 진리가 되어

생명을 고양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한다는 사람들이 어찌 사고방식이 다른 타국인의

언어와 관습으로써 할 것인가.”

 

인도인들의 자기부정적 성화(聖化)의 생활과 겸비(謙卑)정신.

“이 자기 부정적인 종교성을 나는 견지하리라. 그리고 이 자기부정 위에다가 나는

성 프란치스코의 탁발(托鉢)전도를 이상으로 삼고 살리라.

죽을 때까지 이 터번에 이 홍포로 어디든지 서리라.”

 

2 .교회 사목 정책은 예수의 가르침의 우주적ㆍ공교(公敎)적 성격에도 맞지 않음

 

“그리스도의 교회가 서 있는 자리, 얍복 강가 같은 인생의 황야에 선 돌제단은

나그네길에 지친 뭇 심령들이 세운 비원(悲願,온갖 힘을 기울여서 이루려고하는

비장한 소원)의 도피성이요, 하늘이 긍휼로 내린 천상 사다리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찾아가는 이 길목에 어찌 교단이니 교리니 하는 자기

경계(境界)들을 세워야 하랴.”

 

 

3. 신학교

 

오롯한 생명의 지혜는 진정 주님의 발아래 있고, 묵묵히 묵상과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그때 내게는 주께서 말씀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그 길 속에는 고귀하신 주님의 마음과

사랑도 있다.

마음과 뜻을 보시는 하나님, 겸비와 순종의 진리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지식을 붙잡고 있는 학교는 이 깊은 지혜의 못을 가르쳐 주지 못함.

궁극적인 지혜란 무엇을 안다는 데 있지 않고, 궁극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는것이다

 

 

지(知)를 행(行)함으로써의 삶뿐만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썬다의 묵상 성경공부는 먼저 조용한 마음으로 성경 구절을 읽어보거나,

또는 머릿속으로 떠올려 읽은 후 기도하면서 그 뜻을 음미한다.

한동안의 사유(思惟) 묵상 공부시간이 지나면 직관으로 숨은 뜻을 꿰뚫고자 생각들을

더 세우지 않고 다시 기도를 드리면서 주님 지혜를 구하는 것이다.

썬다는 성경공부 외에도 그날 행한 일, 또는 할 일에 대해서 묵상을 한다.

반성도 계획도 주님께 물으면서 한다.

어떤 일도 자기 의지대로, 자기 능력으로만 하지 않고 근신 가운데 기도하면서 한다.

인간의 길을 계획하사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념하기 때문이다.

썬다는 자연을 통해서도 공부를 한다. 그에게 자연은 그대로 신의 근원적인 존재의 힘을

보게 하고, 신성을 알게 하며, 모든 존재를 살리는 신의 사랑을 배우게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 옥에 내려가셔서 노아시대에 타락한 불순종의 영물들과 범죄하는

인간들에게 조차 복음을 전파하시는 것이 신의 크신 자비라는 것을 알았다.

 

 

지(知)를 행(行)함으로써의 그의 삶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소란 싱가 <인도에 대한 보다 많은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등을 들고 골짜기를 통과할 때.

썬다 싱도 숲으로 들어갔는데, 표범이 그에게 접근할 때 표범이 마치 양순한 개이기라도

한것처럼 사두 앞에 와서 앉더니 머리를 내밀었고,

썬다 싱은 그것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살신성인(殺身成仁)하고자 하는 사랑의 힘,

썬다는 결국 기도로써 밤길의 행인들을 구해 낸 것이다.

티벳 라자르에서 전도 사건으로 인해서 사형 판결을 받고 우물 구덩이게 갇히게 되는데

천사들의 도움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썬다의 영성에 대해 ‘자연’과 ‘바이블’

 

‘바이블’이 수직적 계시라면 ‘자연’은 그에게 있어서 수평적으로 오는 빛이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빛과 진리로 묘사되듯이, 그에게 있어서 빛은 진리이고,

진리는 빛의 알레고리였다.

빛이 하나님의 본질이라면 진리는 자연속에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표상이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만물이 있고, 그러므로 만물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만물이 모두 하나님 안에 있고, 빛을 받고 있는 자연속에 나 또한 있다고 하면,

인간은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속에서 인격을 완성해 갈 수 있다.

자연은 하나님 영광의 수평적 진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순리(順理)요, 도덕인 자연에

충실한 사람만이 ‘예루살렘의 사람’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와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산불이 나서 아기새들이 위험에 처하자 어미새가 비명을 지르며 안타까이

들다가 그 어미새가 불길이 둥지에 옮는 순간, 쏜살같이 내려와 양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덮쳐안은 채 함께 타죽는 것이었다.

썬다가 인륜(人倫)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드는 자연에 대한 예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의 전을 향한 열정이 나를 불사릅니다.”

썬다는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가 말씀하신 이 구절을 보자 “불꽃이 타도록 나의 신심도

탈 수 없을까? 장작더미 위에서 몸을 태울 수 있는 순교적 정열을 나도 가질 수 있을까?”

지(知)의 세계에서 아무나 할 수 없는 행(行)의 세계로 넘어왔을 때 그는 특별히 발견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한다.

 

 

 

 

 

◎ 마하리시를 만나다.

 

1916년 7월, 썬다는 히말라야의 능선을 탔다. 능선의 바위 위에 앉아 썬다는 성경을 폈다.

묵상시간처럼, 성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썬다는 언제나 자신의 영혼을 정관하고 내성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성경의 구절이 그에게 조용히 물어오면 그는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주님의 말씀은 갈릴리의 철썩이는 물소리가 되어 그의 귀에까지 들려오는 듯하였고,

근심 많던 심령이 평강의 물로 적셔지게 되었다.

그럴 때면 썬다는 어느새 주님이 피워놓은 숯불가로 와서 앉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썬다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의 오의를 묵상하며 기도를 드렸다.

 

“자비하신 아버지,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마옵소서. 내가 전도길에서 돌을 맞고

죽더라도 그와 함께 있기만을 원하나이다. 오직 주님의 사랑에 노예되고,

주님과 함께 못 박히게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만 씨를 뿌리게 하옵소서.

주안에 있는 내가 주님의 겸비와 순교만을 배우기 원하나이다.“

 

썬다는 전에 만났던 똑같은 동굴을 찾아 마하리시를 만났다.

썬다는 한 선교사를 위해 기도 해주기를 부탁했으나 마하리시는 그가 죄를 많이 짓고

있어서 먼저 회개 할 때 기도를 해준다고 하였다.

-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그 스스로는 자기의 범죄를 아무도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듣고 하셔서 알고 계신다고 하였다.

 

마하리시는 내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다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능력만 주시면 비록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마음과 행동까지도 능히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마하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안이 열리기만 하면 성인이나 선지자들처럼 영계를

볼 수가 있고, 성서에 기록된 선지자들을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울 것이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마치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이, 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도 변화산상에 나타난

모세와 엘리야를 알아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꼭 천사만을 통하여 우리를 도와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신실을 다하다가 죽은 성인반열에 드는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우리를 돕고 계신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쓰시는 것은 그들이 이미 세상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속을 잘 돌볼 수 있는 그 점을 미쁘게 여기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썬다 싱 :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처럼 영원한 것입니까?

그렇잖으면 태어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까? 만약 영혼이 태어나는 것이라면

육체와 함께입니까? 혹은 육체 이전입니까?”

 

마하리시 : “사람의 영혼은 영원치 않습니다. ‘내가 너를 보궁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

영혼은 생명체 전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육체가 있기 전에는 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의 태속에 있을 때부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시는 것입니다.“

 

썬다는 1916년 11월부터 1917년 1월까지 3개월 동안 북인도의 소읍들을 찾아 다니며

전도했고, 4월에는 티벳으로 갈 계획이었다. <누르아프산>지에 카일라스산을 통과하는

자기의 여행계획을 내어서 네 명이 동참하게 되었는데, 일행 중 두 명이 낙오하고 후에

다른 한명이 여로의 험난함에 대한 낙담과 분노로 열흘만에..

썬다는 홀로 여행을 하게 되었다. 썬다는 험한 산길 중에 갈증과 영양실조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정신력을 가다듬고 사투를 치러낸 것이다.

 

진리의 봉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올라가는 상락 속에서 가나이라고 하는 부락이 있었다.

가나이 부락민들은 소의 피로 인간이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행하였다.

이 모습을 본 썬다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고 생명에 들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라고 복음을 전하였다. 썬다는 번제보다도 사람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제사보다는 인애의 이웃사랑을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 예수가 구원의 메시야라는 것을

전하며, 주께 고백하듯 설교를 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평온한 모습과 신뢰의 정이 깃든 말에서 감화를 받았는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썬다는 카일라스에서 팡처라고 하는 라마승을 만나서 마하리시를 뵈러 가자고

제의했고 그는 기꺼이 동의를 해왔다. 팡처라는 라마승은 마하리시를 나우상 대덕으로

보고 다시 절로 가셔서 승중을 교화시켜 주시라고 하였다.

 

마하리시는 말하기를, “절을 떠나 잠시 은둔했던 라마승 나우상은 벌써 죽었소..

나는 주 그리스도의 한 미천한 종이오”라고 하였다. 지금 절 뿐만이 아니라 세상은

거대한 싸움터라고 하였다. 라마승은 그 분을 성사님이 주이시고 , 또 썬다의 주이기도

하고 혹은 다른 그리스도이냐고 물어보았다. 마하리시는 같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은 왕중의 왕이라고 하였고 영원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도 영원히 왕이실

분이라고 하였다. 그 분은 당신을 생명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니, 그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시기 때문이오, 이제 머지 않아 하늘이 열리면 백마를 타고 오시되 만왕의 왕

으로서 공의로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하였다.

 

썬다 싱 : 산야시 은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의혹을 갖고 특히 교육을 받은

교인들은 이들 산야시 단원 은밀 교인들을 이상스런 눈으로 보고 있다고 하였다

마하리시: 이기는 것은 오직 주의 말씀이라, 근신하고 순종하는 자는 살 것이요,

교만하고 의심하는 자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의심은 사람들의 고질적인 병인 법. 내버려두고 주처럼 충신으로 진실되어 전도를

계속하십시오. 목자는 차가운 밤 들판에서도 양을 지키며 주를 기다리는 법,

사람은 악을 악으로 갚지만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의 영역이오 라고 말하였다.

 

◎ 예배레스트로 가는 길

마하리시와 헤어진 후 썬다는 일 때문에 남으로 떠남.

썬다의 묵상 가운데 부패한 세상속에서 하나님을 알기가 어렵다고 하여 황야나 산 속에

들어가 고요히 묵상함으로 더 많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한 겸비와 기도의 성인들에

대한 좋은 공기와 좋은 식물을 통해 영 육을 온전하게 하고 주님과 한 띠 되어 살 수 있는

신비를 경험.

제 삼층천까지 올라가 볼 수 있는 영력,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묵상하게 됨.

한없이 넓으신 주님의 인격 그 참된 가치는 세상 속에서의 구현을 위해 사람을 이렇게도

쓰시고, 저렿게도 쓰시는 것이다.

수도원에서 기도만 하고 있는 무명으로 하고 살든,

복음전도자로 떠돌아다니든,

또는 교회 사목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가 얼마나 구체적이고 성의있게 시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자기 사명을 소명으로서 철(徹)하고 있지 못하다면 어느 직분 하나도

하나님의 선교의자와는 무관 할 것이다.

 

썬다는 온전히 앉았다, 앉거나 서거나 항상 자세를 단정히 했다.

걷는 중에도 부드러운 풀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주님의 말씀들과 인격을 깊이

상고하고 묵상하였다.

어머니가 생전 말씀했던 것 중에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을 묵상하게 됨.

“영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영의 일을 하고, 육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육의 일을 한다.“

“깨끗이 사는 것... 짧게 살아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면서 빛이 되어 타면,

그 자리가 열반자리이고, 하나님 나라라는 것...”

곧 늘 갈고 닦은 마음과 신을 경외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사랑을 배우는 것이 된 것이다.

초 가을밤 히말라야 일각의 산등성이에서의 묵상..

깨끗한 생사. 삶에도 깨끗하고 죽음에도 깨끗했던 예수,

말씀이 삶이 되고, 삶이 말씀이 되어 사는 경지.

어느 의인이 세상 죄를 다 짊어지고 자기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예수의 피로 씻지 못 할 만큼 큰 죄가 세상에 없다고 하는 은혜.

길이 된 예수뿐인 것에 대한 묵상..

매일 씻어내고, 매일 내 인생의 밭에 감사와 사랑의 씨를 뿌리며 살자.

그리하여 내 인생이 향기 날리는 주님의 동산이 되게 하면서 갈자..

묵상 가운데.. 여러 사람들에 대한 기도를 드렸다.

 

아침 일찍 길을 떠나며

이해가 미진한 성경구절들 부분을 여로 중에도 묵상하며 걸어갔다

학식이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느낀 것이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전도의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우선 말씀을 논리로 여과하고, 이념으로 분석하려고 들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쉽게 승복하지를 않았다.

단절의 강, 하나님은 죄 많은 인생들에게 예수를 뉘어 가교를 만들었건만 사람들은

그 다리를 건너오지 않는다.

걷는 동한 썬다는 자문자답하듯 성서관을 점검했다. 성경에는 인간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한 의지가 산재되어 그럴수록 썬다는 성경을 성경으로

주님께 기도로 물어 풀리라고 다짐하게 됨.

썬다는 전도여행에 담요 두장과 성경 한 권, 그리고 여타식품을 주면 받고, 주는 것이

없으면 구걸하지는 않음. 굶주리는 때는 주님께 기도하여 히말라야의 준령들을 넘을 수

있었음.

썬다는 에베레스트 봉우리 근처에 전도할 계획으로 왔으나 여러 촌락들에서 쫓겨남.

불교가 국가 종교인 만큼 외래 종교를 배척.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묵상하는 썬다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마성적 세상 질서를

결국 하나님 섭리하의 자연적 질서를 복귀시키는 것이리라 하며 인도 쪽 히말라야의

준령을 탔다.

 

◎ 남서부 인도로

썬다는 최근 들어 전인도의 그리스도교계에 그의 영성이 알려짐.. 설교를 원고로 적어

준비하지도 않고... 시작되기 전 처음 시간이고 기도 중에 정리하여 그 제목을 설교로

하는 것.. 집회때마다 청중들은 그의 인격의 진실함과 겸비, 또 회개의 능력을 갖춘 그

의 설교로 하여 눈물의 찔림을 받았다. 설교 후에 힌두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지방

유지들이 세례를 받기를 요청. 썬다의 증언으로 예수가 구원자라는 것을 확신 함..

 

썬다는 남인도에 가서 그 특유의 소박한,

그러면서도 주님의 전을 향한 열정이 담긴 메시지를 전함..

사람들은 스스로도 모르게 지극히 평온한, 성령이 임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썬다는 일체를 내놓아야 일체를 받는다. 교리도 내어놓고, 직분도 내어놓아야 한다. 그

리스도교 교리는 직분도 아니다. 존재의 회복이다.. 다시 태어남이다.

진리로 해방된 자들이 겸손히 무너져 앉은 낮은 자리 눈물에서 예수를 보는 자는

모두 거룩한 이들이라고 하였다.

썬다의 집회에 사람들은 자꾸 몰리고 후에도 면담과 기도 문제에 대해..

그리고 선교에 대해서도 궁금해 함. 썬다는 여러 곳에 참석하느라 너무 바쁜 생활 속에

가르치는 자가 더 엄한 벌을 받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

그의 심중에 교만이 있거나 법도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주님으로부터 내쫓김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그 초청에 불응하기도 하였다.

썬다는 진실로 그리스도인이란 종파도 교리도 초월하고 예수의 정신을 전하고

또 실천하면서 살기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아무리 소종파라도 그들이 놓은 도덕율로 주를 증거하는 삶을 살며 그의 복음을

전도한다면 훌륭한 크리스찬들인 것이다. 전통 안에 갇혀 있으면서 교리를 안으로 걸어

잠그고 교회의 벽을 안고 있는 교회는 마치 전도 없는 교회처럼 죽은 교회일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걸어 잠근 교리의 체계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과

그의 메시지를 전하는 전도가 중요한 것이라고 함.

참으로 거듭난 교인이라면 낡은 인격의 옷을 떼 내고 팔을 벌려주고 가슴을 내밀어줄

줄도 아는,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썬다는 세일론의 자프나에 닿았는데.. 불교인들의 섬인 이곳에 자신의 전도여행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함.. 자프나에서 집회 후 수도인 콜롬보로 갔는데 사람들이 물밀듯이

들어옴..

그 중 한 사람이.. 자기 아들이 수술경과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는데..

머리에 안수를 하여.. 병상에서 낫게 함..

썬다는 원래 신유의 은사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에게

존경을 표시해 올 것이 두려워서 치유 선교는 하지 않기로 하였던 것..

썬다는 다시 마드라스 주로 돌아와서 전도 함.

그의 남인도 교회관이 있었는데 엄격하게 카스트 신분제도로 되어있음..

썬다는 하나님은 만인간을 다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낮은 자들과 함께 있는 낮은

자들에게 자신을 일치시킨 예수의 구원정신을 아신다고 하면 카스트 신분제도를

던지라고 말하였다.

낮아져 보지 않은 사람, 고난에 동참에 보지 않은 사람은 어딘가 천박해 보입니다.

먼저 예배드리러 오기 전에 배고파 우는 하리잔 이웃들과 손을 잡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고 오십시오. 제사는 못 지내도 좋으니 끼니를 못 잇는 이웃을 돌보고, 공의, 공덕을

행하십시오. 그들과 함께 우십시오 라고 썬다는 말하고 그의 전도 진로를 동으로 향하였다.

 

 

11. 눈 속의 동사(凍死)

 

주님의 복음전도를 위해서라면 오대양 육대주라도 돌리라 하고 마음먹은 썬다에게

처음으로 인도 밖을 나서 전도해 보는 기회가 왔다.

버마에서 은혜 가운데 집회들을 이끌었고, 싱가폴에서는 서투른 영어실력이지만

우드르어가 아닌 영어로 설교를 하였다.

또한 싱가폴에서 일본인 우메모리 목사의 초청 조처로 일본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전도집회는 가는 곳마다 은혜가 넘쳤다. 도꾜의 후지미 교회는 썬다가 강단에 섰을 때

마치 예수가 선 것 같았다고 성령에 싸인 집회분위기를 전했고, 고베의 교회에서는

청년교인들이 맨발의 썬다를 따라 그 겨울동안 양말 안 신기 운동과 교회부흥 특별전도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티벳과의 교전으로 인한 외국인의 활동의 제약으로 제한된 전도활동을 하고

다시 인도로 돌아왔다.

 

아버지 세르 싱은 썬다와 비슷한 상황 가운데에 있다가 순교한 카타르 싱의 순교사건

으로 인하여 마음의 찔림을 받고, 또한 그동안 끊임없는 아들 썬다 싱의 기도로 드디어

개종을 하게 된다.

“아들아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다오. 그동안 너에게 못할 짓을 내가 너무 많이 했구나.

나도 이제 예수를 믿고 싶다만 그분이 내 죄를 용서해 주실는지….”

이로써 집안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게 되었다.

 

12. 낙조의 서방으로

 

썬다는 예수님이 사시고 죽으셨던 팔레스타인을 가보고 싶었지만,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던 팔레스타인 행 여행 기회는 오지 않고,

셀리옥 선교대학에서 전도 초청장을 보내 1920년 1월 봄베이에서 서방으로 향한

배를 탔다.

 

썬다는 영국이 세계대전으로 인해 빅토리아 여왕 치세시절의 불타던 선교열정은

온데간데 없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본산이며 침례교와 구세군과 퀘이커 정신이

씨 뿌려져 꽃 피어나게 했으며, 또 미국의 뉴잉글랜드 정신이 있게 한 청교도 정신의

본 고장인 영국의 교회가 낙조(落照, 기울어지는 해)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기도생활을 강조해 줌으로써 그들의 영적 호흡을 다시 찾아 주는 것,

이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기도는 사랑을 낳는다. 사랑은 마성을 누르고 다시 인간의 마음을 찾게 한다.

기도만 있으면 흑암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나리라.)

 

옥스퍼드대학의 밸리올 대강당과 맨스필드 대강당에서의 설교로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가슴없는 머리만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믿음 없는 학문은 마른 뼈다귀들의 집이다.

신앙이란 지식의 탐구가 아니요 생명인 지혜의 붙잡음인 것이다. 학문은 무릇 삶이

되어야 하고 삶은 생명의 말씀위에 선다는 설교는 대학인들의 실존 자세를 다시 점검케

했다.”

 

3월 9일에는 런던의 버킹검가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설교했다.

천사는 하나님의 진리를 계시하고 메시지를 전해주나 인간은 그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고 하였다.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교통 그것은 기도이며 기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다.

 

썬다의 설교는 자연을 비유로 들어 하는 설교가 대부분이지만 어떤 때는 성경 안에서

말씀만을 찾아가는 설교를 하기도 했다. 가족이 벽 난로가에 모여앉아 자애어린

아버지의 말을 듣는 훈훈한 분위기, 때로 작은 교회에서 소수의 사람을 앞에 놓고

얘기할 때의 그는 그야말로 그의 뒤에 주님이 서 계시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지극한 평화 속에 있게 했다.

 

미국 교회에서 썬다의 방문을 간곡히 원하여 미국에서 전도를 시작하였다.

전쟁의 아픔을 겪은 영국인들에게 상처를 싸안아 주던 기도적 설교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물질로 병들어가는 미국인의 정신문화와 교회의 앞날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설교를 많이

하였다.

 

썬다는 한편 서구 문명을 나무랐다. 스위스 로잔느에서 행한 설교에서는 서구 문명을

동물주의라고까지 혹평했다. 기도 없는 유럽교회는 죽은 교회이며 개개인 또한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생명의 호흡(기도)를 나누지 못함으로써 이제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경고한 썬다는 서구의 심각한 교회 분열을 다음과 같은 말로 힐책했다.

 

“지상에서 뭉쳐 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하늘나라에서 살겠다고 소망을 두는가?

하늘나라는 지상에서부터 건설되는 것이다. 심판 날에는 차라리 비크리스찬으로서

더 평화와 공의를 지키는 동양인들이 당신들 서양인들보다 벌을 덜 받을 것이다.

그들은 복음을 못 들었지만 당신들은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내 던져 버리지 않은가?”

썬다는 서방을 가룟 유다에 비유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심신을 불사르며 유럽 전도를 하던 썬다는 가을에 인도로 돌아왔다.

 

13. 꺼지는 불꽃

 

5월 23일, 다시 티벳 전도에 나선 썬다.

그러나 이번만은 티벳 국경을 넘지 못했다. 중국과의 전쟁 후유증이 아직 남아있는데다

티벳 국내 사정 문제가 국경을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어 티벳 진입이 불가능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썬다는 위궤양으로 헐어버린 위를 쓸어 안으며 수바투로 기어

들어오다시피 하였다. 몸이 많이 쇠약해진 그는 누운 채로 죽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이제 글을 써서라도 문서선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교로 일관해온 그의 삶

 

병든 몸으로 외국에는 더 나아가지 못하지만 히말라야만은 늘 그의 선교 의욕을 북돋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24년 봄 다시 티벳 행을 시도해 보았지만 위궤양뿐 아니라 폐결핵

까지 걸려 도저히 산 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썬다는 차도가 없는 건강 속에서도 몇 권의 소책자를 더 내었다. 입으로 전도를 못한다면

이제는 붓으로라도 쉬지 않고 전도를 하여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다가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8년 봄, 창문 너머로 멀리 히말라야의 연봉들을 바라보던 썬다는 조용히 집을

나섰다. 며칠이 지난 후, 인도쪽 히말라야의 리시케시 부락에서 백사십 리 떨어진

산길에서 웅크린 채 피를 토하고 의식을 잃고 있던 썬다를 발견한 티벳 대상이 그를

심라까지 데려다 주었다.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여행

 

1929년 4월 18일, “오늘 티벳을 향해 떠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모르는 험로이긴

하지만 사도행전 20장 24절에 있듯이, 내가 사명을 완수하고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라고 주 예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임무를 다할 수만 있다면 나는 조금도 목숨을

아끼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리들 목사에게 남기고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 이후 아무도 이 땅에서 썬다를 본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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