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죄와 구원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3)
1절.
제자: 주여,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든지 그를 예배하지 않는 것이 죄인 줄은 누구든지 압니다. 그래서 이 죄의 결과로 이 세상은 죽음의 상태에 있다느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어떤 죄가 참으로 존재하는 지는 충분히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뜻을 거역하는 일이 일어나며 왜 하나님의 지은 세계 안에서 죄가 일어나게 됩니까?
주님:
1. 죄는 사람이 자기 욕심으로 살고자 하여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며 행복을 얻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욕구를 만족케 하려고 진실하고 정당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와 같이 행하는 데서 참 행복을 얻지 못하며 참 희락을 맛볼 수는 없다. 죄는 그 자신이 독립성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누구든지 이것을 창조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상태나 조건의 이름이다. 어디든지 다만 한 분의 창조자가 있을 뿐인데 그는 선(善)이다. 선인 창조주는 한 가지 악이라도 지어낼 수는 없다. 그것은 그 본성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한 분의 창조주 외에는 아무도 죄를 창조할 수는 없다.
사탄은 이미 창조된 것을 악하게 할 뿐이오. 아무 것도 창조할 힘은 없다. 그러므로 죄는 창조물의 하나가 아니요, 창조될만한 독림의 존재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다만 존재의 허위 기만적 상태에 불과하다. 예컨대 빛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물체다. 그러나 어둠은 물체가 아니요 다만 빛이 없을 때 되는 상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죄와 악은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의 부재(不在) 또는 무(無)를 말함이다. 이 악의 암흑 상태는 가장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 바른 길을 잃고 사탄의 암초에 걸려 파손하고 어두운 음부에 떨어져 멸망한다. 이 때문에 세상의 빛인 나는 육신으로 나타났다. 이는 나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게 하기 위함이다. 나는 사람들을 암흑에서 구하여 안전한 하늘나라로 인도한다. 그 곳에는 암흑의 이름도 없고 그림자도 없다 (계 21:23, 22:15).
2. 너는 왜 어두운 죄의 상태가 창조주인 나의 앞에 나타났느냐고 물었다. 죄가 일어난 이유는 사탄이나 인간이 자기의 욕구를 만족케 하려고 불법적이고 그릇된 길을 행한 까닭이다. 그러면 너는 "왜 하나님은 인간을 타락하지 않도록 만들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약 기계와 같이 지음을 받으면 그가 자신의 선택적 행위에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 된 상태에는 결코 이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궤계와 속임수에 빠진 것은 그들이 죄 없는 상태중에 있어 거짓과 속임수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보다 앞서 사탄 자신도 그들이 하늘에서 추방을 당하게 한 교만의 존재를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만하기 전에 교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탄은 죄 때문에 이런 상태에 빠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자신의 전능의 힘으로 이 상태에 새로운 광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가장 존귀한 결과를 취하셨다.
첫째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성육신과 속죄를 통해 나타났다. 이것은 다른 경우에는 숨겨져 나타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죄의 고통을 맛 본 자도 속죄된 후에는 하늘의 행복을 충분히 맛본다. 마치 쓴 것을 맛 본 후에 꿀맛이 더욱 단 줄을 아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 위에서는 다시 죄를 범하지 않고 유화와 복종의 사랑으로써 그들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봉사하며 기쁨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산다.
3. 사람들은 태양이나 달의 흑점과 일식 때의 결점을 발견하는 데에는 열심이다. 그러나 자기의 죄와 오점과 결함에는 주의하지 않는다. 이로써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우둠이 얼마나 하겠느뇨?"(마6:23)라고 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치 문둥병자의 몸이 그 병으로 인해 마비되어 감각이 없는 것 같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도 죄로 인하여 둔하고 무감각하게 되어 더러운 것과 고통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때가 와서 그 무서운 파멸을 당하게 될 때에야 그들은 이를 갈며 슬피 울 것이다.
4. 죄 가운데 잠겨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 무거운 짐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바닷물 속에 잠겨 있는 사람이 몇 톤의 바닷물이 그 머리 위에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일반이다. 그래서 드디어 질식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모른다. 그러나 물에서 나와서 조그마한 물이라도 들고 가려할 때에는 그 무게를 깨닫는다. 이와 같이 죄 짐이 무거운 것을 깨닫고 회개로써 나에게 오는 자는 참 평안을 발견한다. 나는 이러한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하여 왔기 때문이다.
(마 11:28, 눅 19:10, 딤전 1:15)
5. 사람이 죽는 데는 모든 지체가 다 약하거나 또 쓸모 없게 되어야 죽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건강하고 튼튼한 몸이라도 그 어느 한 부분이 병들었든지 정신이나 뇌에 타격을 받으면 그것으로 죽기에 충분하다. 이와 같이 하나의 죄가 마음과 정신에 영향을 주어서 영적 생명을 파괴한다(막 9:43-49). 또한 한 집이나 한 국가나 한 민족이라도 죄 때문에 파멸에 이르게 된다. 아담의 죄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의 한 마디 말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한 것 같이 내 말은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기에 족하다.
6. 혹시 금수나 조류가 인간에게 오랫동안 길들여진 후에 그 종족 가운데로 돌아가면 그들은 환영하기 보다 도리어 이것을 공격하여 죽게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오랫동안 인간과 사귀어 친한 결과로 생활의 습관과 행동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금수도 인간의 감화 밑에 있던 자는 그들의 종족사회가 받아들이지 않거든 어떻게 하늘에 있는 천사와 성도들이 악인과 친히 교제하며 살던 자를 환영하겠느냐? 이것은 성도들이나 천사들이 죄인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 위의 거룩한 환경은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조화가 되지 않아 살기 어렵다. 확실히 이 세상에서도 죄인은 선인의 무리에 들기 싫어하거든 어찌 영원히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있겠는냐? 그들에게 대하여는 천국은 지옥과 같이 마음에 괴로운 곳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나님이나 천사가 죄인을 지옥으로 추방하는 줄로 생각지 말라. 사랑이신 하나님은 결코 아무 사람도 지옥으로 쫓아 보내지 않는다. 또 영원히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 죄인의 미련한 생애가 자연히 그를 지옥으로 끌어 간다. 우리는 생애를 마치기 전에 천국이나 지옥 어느 편에 접근한다. 그의 선악에 따라 그의 마음에 천국이나 지옥이 건설된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원한 고통을 면하고자 하는 자는 전심으로 그 죄를 회개하여 그 마음을 나에게 바쳐라. 그리하면 그와 함께 하는 나의 임재와 성령의 감화에 의하여 그는 영원히 천국 백성이 될 것이다.
7. 이 세상의 왕이나 정부에 대하여 반역하는 자는 외국에 망명하여 그 자신을 구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반역하는 자는 어디에 가서 안전을 얻겠느냐? 비록 천국으로나 음부에 내려가나 어디로 가든지 그는 거기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된다 (시 139:8).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구주께 향하여 회개하며 복종하는데서만 그 평안을 발견할 것이다.
8. 아담과 하와에게 무화과 잎사귀는 몸을 가리우기에 너무 작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죽옷을 그에게 주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선행도 또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에는 무화과 잎과 같이 효과가 없다. 내 의의 갑옷을 제하고는 아무 것도 충분치 못하다.
9. 나비나 벌레들은 불을 보면 그 태우는 것은 생각지 않고 다만 그 환한 빛에 미혹되어 그 가운데 날아 들어 가서 죽는다. 사람도 죄의 파괴적 세력은 주의하지 않고 그 화려한 것과 향락만 생가하고 그 가운데 끌려 들어가 영원히 멸망한다. 그러나 나의 참 빛은 죄인을 죽음에서 구원하여 그에게 생명과 영원한 행복을 부어준다. 인간은 나의 참된 광명의 귀중한 은혜를 받기에 바로 적응하도록 지음을 받은 자이다.
10. 죄는 한 망상이나 상상물은 아니다. 인간의 악한 의지의 활용에 의해 일어나는 영적 암흑 상태이다. 악의 씨는 그 영에 스며들어 마침내 그 영을 멸망케 한다.
마치 천연두가 단 시간 내에 사람의 아름다움을 없이하여 영원히 추악한 모양을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악을 짓지 않은 것 같이 그는 병이나 육체의 고통도 짓지 않았다. 다만 인간이 불순종한 결과 자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고통과 병은 다만 상상물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죄나 또는 그가 일원으로 속한 가족의 숨겼던 죄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난 열매이다. 이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여 나에게 연결될 때 건강을 주는 나의 피는 그의 모든 영적 혈관을 통하여 돌아가며 보이지 않는 그 심령 속에 병을 치료하여 그들에게 영원한 건강을 준다. 인간은 구주와 행복한 가운데 영원히 살도록 건강한 자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2절
제자: 주여, 요즘은 박학한 사람들과 그 학설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신의 속죄와 그 피에 의한 구원을 따르는 사람들이 당신의 속죄와 그 피에 의한 구원을 무의미하고 공허한 일이라 하며 도 그리스도는 단지 하나의 큰 지도자로 우리의 영적 생활에 대한 모범이 될 뿐이요 구원과 영원한 행복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선행에 달린 것이라고 합니다.
1. 영적. 종교적 사상에 대하여는 두뇌로는 마음과 같이 깊은 데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마음은 하나님의 궁전이다. 하나님이 마음에 임재하면 두뇌는 자연히 빛으로 충만하다. 육안이 햇빛이 없으면 쓸데 없는 것 같이 정신 및 이해의 눈은 참 빛이 없으면 쓸데가 없다. 암흑 중에서는 뱀을 새깨줄로 잘 못 알고 잡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마치 이 세상의 지식인들이 참 빛을 받지 못하므로 도리어 영적 진리를 곡해하여 순진한 자를 잘 못 인돟가는 것과 같다. 사탄이 하와를 미혹한 때도 양이나 비둘기의 모양으로 나타나지 않고 동물 중에 제일 영리한 뱀의 형상을 가지고 하였다.
그와 같이 그는 철학자의 지혜를 쓰고 박학자의 학문을 이용하여 그의 목적 수행을 위한 도구로 삼는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만 박학과 지식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비둘기 같은 순결도 반드시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한 것이다.
2. 나의 십자가와 속죄가 신자에게 준 것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구리 뱀을 준 것과 같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리 뱀을 쳐다 본 자는 다 구원되었다(민 29:9, 요 3:14-15).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만 구리로 만든 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믿기는 고사하고 비평하여 말한다.
"만약 모세가 해독제를 공급하거나 무슨 먹는 약이나 바르는 약을 준비하였다면 믿을 수 있겠으나 장대 끝에 달아맨 악독한 뱀의 모양이 무엇에 쓰인단 말인가?"하고 비난하다가 그들은 죽었다. 현대에서도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으로 세운 자에 대하여 시끄럽게 이론만 캐는 자는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것이다.
3. 한 청년이 벼랑에서 떨어져 몹시 다쳐 많은 피를 쏟고 거의 죽게 되었다. 그 아버지가 병원에 데리고 가니 의사가 말하기를 "생명은 피에 있는데 이 청년은 출혈이 너무 많아서 회복될 힘이 없으므로 희망이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목숨을 희생하여 피를 주면 회복될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아들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그 아버지는 자기의 피를 아들의 혈관 속으로 부어 넣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생명이 회복되었다.
인간은 거룩이라는 높은 고개에서 떨어져 죄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그래서 그의 영적 생명은 점점 약하여져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믿는 자에게는 내가 영적 생명의 피를 주입한다. 그리하여 죽음에서 곧 구원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내가 온 것은 이 목적을 위하여 그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는 것이다(요 10:10).
4. 옛날에는 사람이 금수의 피를 마시거나 어떤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이로서 그들은
어떤 병을 면하고 또 고기를 먹고 피를 마시므로 생기는 즉 동물적 육체로 화하며 동물적
경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 살은 참된 양식
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 이것은 그들에게 영적 생명을 주고 완전한 건강과
하늘의 행복과 희열을 받게 하는 것이다.
5. 죄 사함은 완전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자유에서
라야 온다. 사람은 죄의 용서를 받더라도 그 죄의 병으로 인하여 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그의 오랜 병으로 인하여 뇌에 이상이 생겼다. 그래서 돌연히 사람
을 죽였다. 그래서 그 친구들이 그 사정을 진정하여 특별한 용서를 청한 결과 드디어 살인
죄는 사면을 받았다. 그러나 그 친구들이 그에게로 돌아오기 전에 그는 살인죄의 원인이 되
는 뇌의 병으로 죽었다. 그러면 그 사죄는 그 사람에게 얼마나 유익을 주었느냐? 그의 참
평안은 그가 병에서 놓임을 받는 일이다. 그제야 그는 참으로 용서받은 행복을 즐길 수 있
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성육신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를 죄의 병에서 구하며 또 그 형벌
과 죽음에서 건지며 죄의 결과와 원인을 제거해 버린다. 그리하여 믿는 자는 죄의 멸망을
면하고 죽음에서 벗어나 무한한 생명의 후사가 된다(마 1:21).
6.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세상은 고해다. 마치 사냥꾼이 계곡에 나온 나무 위에 꿀 송이를 보
고 나무에 기어올라가 정신없이 그것을 빨아먹고 있는 것과 같다. 그가 부주의하고 있는 동
안 그 밑에는 죽음의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밑바닥에는 악어가 입을 벌리고 그가 떨어지기
를 기다리고 있고 나무 뿌리에는 이리 무리가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더욱 위험한 것은 그가 올라간 나무는 그 뿌리를 쥐가 먹고 있어 금방 넘어지려 한
다.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냥꾼은 장차 악어 밥이 되려 한다 이와 같이 사람의 영혼도
몸 안에 있어서 두뇌의 골방 속에 있는 동안의 공허한 죄의 행복에 취하여 무서운 세상의
미궁에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 사탄은 그들을 삼키려 하고 음부는 악어와 같이 그를 먹으
려고 입을 벌리고 있고 그 위에 더욱 무서운 것은 죄의 벌레가 육체와 정신의 뿌리를 먹고
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영혼은 지옥의 영원한 밥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죄인이 만약 나
에게 나오면 나는 그를 죄와 사탄에게서 구원하여 지옥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줄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7. 사탄은 교활한 말로 사람을 유혹하여 이끌어다가 마침내 그를 삼켜 버린다. 마치 뱀이 그
반짝 반짝 하는 눈으로 작은 새를 마취시켜 이를 끌어다가 잡아먹는 것과 같다. 그러나 나
를 믿는 자는 내가 그를 이 늙은 뱀과 세상의 유혹에서 건져내어 그 영혼을 멸망에서 구원
한다. 나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 작은 새가 뱀의 인력을 물리치고 하늘을 날아가는 것과
같이 그들의 기도의 날개를 펴고 높이 날아 올라가 나의 사랑의 인력에 이끌려 드디어 그들
이 충심으로 사모하는 본향에 평안히 가서 그 곳에 살게 한다.
8. 사람이 황달에 걸리면 모든 것이 누런 빛으로 보이는 것 같이 죄인이나 철학자는 진리
자체까지도 자기의 죄의 빛대로 자기의 학술체계의 색채대로 본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
람들이 자기의 생각하는 대로 나를 죄인으로 논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죄인을 구하려는 바 나의 사업은 이 세상의 여론이나 의견에 관계할 바 없이 이미
만세 전에 예정한 경륜대로 신자의 생활 중에서 전진하고 있다. 레위 족속은 아브라함의 자
손 중에 있으나 나기 전부터 이미 나에게 바친 자인 것같이 신자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내
안에 있어 비록 그들이 나기 전부터 (엡 1:4-5) 그들의 죄를 위하여 구속과 대상물로 십
자가 위에서 바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은 세계 중에 전 인류를 위한 것이다.
9. 인간이 거듭나지 안고 다만 그 자신의 선행과 노력에 의하여 구원 얻는다는 것은 미련하
고 불합리한 생각이다. 세상이 지배자나 도덕 교사들은 말하기를 "선을 행함에 의하여 선하
게 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선행을 하기 전에 네 자신이 먼저 선하게 되라"고 한다. 그
마음이 변하고 거듭나면 선행은 결과적으로 자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쓴 나무가 자주 결실하므로 인하여 마지막에 단 열매를 맺으리라는 것은 미련한 자의 말이
다. 쓴 나무는 단 나무에 접붙임 받음으로써야 비로소 달게 된다. 단 나무의 기운과 물이 쓴
나무에 흘러 들어가서 그 성질을 완전히 변화시켜 달게 만든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새로운 창조'다(고후 5:17). 그처럼 죄인은 선행을 하려고 하나 항상 악
한 결과만 나타난다. 그러나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에게 접 붙을 때에는 내 안에서 옛 사람
은 죽어 없어지고 새롭고 거듭난 사람이 된다. 이 구원으로 인하여 새 생명의 뿌리에서 나
오는 결실이 선행이 되어 나타난다.
경험상 인간이 나면서부터 가진 본유의 선에 의하여는 마음의 참 평화를 얻지 못하며 구원
과 영생의 확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이 많다. 청년이 나에게 와서 "영
생을 얻으려면 어찌하면 되오리까?"라고 질문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대한 최초
의 사상이 틀렸다. 바로 현대에 있는 지식인들의 생각과 같이 그는 나를 회칠한 무덤과 같
은 교사의 한 사람인 줄로 알았다. 그들의 생활 중에는 털끝 만한 참 선도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선에 대하여 내게 묻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러나 그는 내가 오직 하나의 생명과 선을 부여하는 자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불러서 동반자의 한 사람으로 참 선인을 만들고 생명을 부여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슬퍼하며
나에게서 떠났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율법을 지키는 일과 자기 선행에 의하여 만족할 수가
없고 영생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것이 그에게 평화를 주었더라면 그는 결코
나에게 질문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슬퍼하며 떠날 리 없고 기뻐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그 후 오래지 아니하여서 바울이라는 청년이 나를 알고 구하고 있던 그 마음의 요구가 완전
히 만족되었다. 그러므로 슬퍼하며 돌아가는 대신에 일체를 버리고 나를 따랐다(빌 3:6-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의를 신뢰하는 것을 버리고 나를 좇는 자는 나에게서 평화
와 영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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