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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신비가/썬다싱

[스크랩] 그 발 앞에 엎디어 (분할) -1

by Andrew Y Lee 2007. 4. 26.

그 발 앞에 엎디어 (썬다 싱 지음)

서 언

제 1의 영현(靈顯)

어느 어두운 밤 나는 기도하려고 혼자서 산림 가운데 들어갔다. 바위 위에 앉아 주께 나의 깊은 소원을 내어 놓고 도와 주시기를 구하였다. 잠깐 있노라니 한 가난한 사람이 나를 향하여 오는 것을 보고 아마 구차한 사람이 나에게 구걸하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다만 이 담요 밖에 없다. 그대는 가까운 동네에 가서 구걸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번개와 같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 붓듯 하는 은혜를 나에게 부어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 아! 이는 내가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이시다.
나 같은 가련한 피조물에게서 아무 것도 얻으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은혜를 주고 부유하게 하려고 오신 것인 줄을 밝히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미련하고 통찰력 없는 것을 슬피 울며 그 곳을 떠났다.


제2의 영현

다른 날 나는 일이 끝난 뒤 또 기도하려고 산림 가운데로 들어갔다. 앞서와 같이 바위 위에 올라 앉아 어떤 축복을 빌까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는 중에 다른 한 사람이 가까이 와서 섰다.

그의 소지품과 옷과 말과 행동을 보니 마치 택함을 받은 존귀한 하나님의 종 같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간교한 지혜와 교활한 빛이 나타나고 그가 말할 때는 지옥의 악취를 토하는 듯 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거룩하고 존귀한 그대여, 귀하의 기도와 묵상에 방해되는 것을 용서하라. 남의 유익을 도모하고 그를 위하여 힘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나는 귀하의 앞에 중요한 것을 제안하려고 온 것이다. 귀하의 순결하고 사심 없는 생애는 다만 나 뿐 아니라 많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귀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몸과 영혼까지도 희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내 말의 뜻은 귀하가 하나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다만 수천의 신자가 귀하의 감화에 들어오는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귀하를 믿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귀하가 인도교나 이슬람교에 들어온다면 얼마나 그보다 나을 것인가? 실로 거대한 단체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귀하 같은 영적 지도자를 구하고 있다. 만일 귀하가 나의 제안을 받아 들인다면 3억과 1천만의 인도교와 이슬람교의 신도들은 귀하의 지도를 따르며 귀하를 존경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다음과 같이 소리를 질렀다.

"너 사탄아, 이 곳을 떠나라. 나는 네가 양의 가죽을 쓴 이리인 것을 곧 알았다. 네가 한 가지 원하는 것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향하는, 즉 생명 길을 버리고 멸망의 넓은 길을 취하는 바로 그것이다. 나의 주는 나의 전체요 나의 일체(一切)이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나를 위하여 버렸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의 생명과 모든 것까지 바쳐서 그로 하여금 나의 전체가 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를 떠나라. 나는 너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노하여 중얼거리며 떠나갔다. 그리고 나는 눈물로서 기도하며 주께 나의 영을 바쳤다.

"나의 주이신 하나님이여, 나의 생명의 생명, 나의 영의 영이시여, 긍휼로서 나를 살피시며 성령을 부어 주소서. 나의 마음은 당신을 버리고 달리 바칠만한 사랑의 전당이 없나이다. 나는 생명과 모든 것의 부여자인 당신 자신 외에는 당신에게서 아무 은혜도 구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그 중의 보배와 하늘까지도 요구하지 않나이다. 다만 당신을 사모하며 또 구하옵나이다.

당신의 계신 곳 거기가 천국이므로 내 마음의 기갈은 다만 이것을 지어주신 당신에 의하여서만 만족할 수 있나이다.

오! 나의 창조주여,
당신은 나의 마음을 다만 당신을 위하여서만 지은 것이요, 다른 아무 것도 위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마음은 당신 안이 아니고서는 평화와 휴식을 얻을 수 없나이다. 나를 창조하시고 또 평안을 구하는 욕구를 주신 당신 안에서만 나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에서 당신을 거역하는 모든 것을 없이 하여 주시고 내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며 이와 같이 영원히 지배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내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일어날 때에 한 빛나는 모양을 보았다. 광휘 찬란한 아름다운 모양으로 나의 앞에 섰다. 그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또 나의 눈은 눈물에 젖어서 밝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생명을 주는 광선과 같은 빛이 매우 힘있게 나의 마음에 비춰 들어올 때 나의 영혼은 그 중에 잠겨 들어갔다.

그 때 나는 곧 사랑하는 나의 구주가 나의 앞에 선 것을 알았다. 나는 곧 나의 섰던 바위에서 내려서 그의 발 앞에 몸을 던졌다. 그는 그 손으로 친히 내 마음의 열쇠를 잡았다. 그리고 그 열쇠로 나의 내부의 방을 열고 그의 거룩한 임재로서 내 마음을 충만케 하셨다. 그래서 나는 안을 보나 밖을 보나 어디를 보든지 다만 주만을 보았다.

그 때부터 나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보좌요, 성(城)인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이 그가 들어 온 때부터 나의 마음 속에는 천국이 열리었다.

이 몇 초 사이에 그는 나의 마음을 충마하게 하여 놀랄만한 일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비록 많은 책을 쓴다 하여도 그것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같은 하늘의 일은 하늘의 언어로 설명하는 외에는 길이 없고 사람은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감의 다만 몇 부분만이라도 주께서 나에게 주신 계시의 방식에 의하여 설명하여 보려고 노력한다. 내가 앉았던 바위 위에 주가 계시고 나는 그 발 앞에 꿇어 앉아 주와 제자의 대화는 계속 되었다.



제 1장 하나님 임재의 계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니라."(계 1:8)

1 절

제자: "오! 생명의 샘인 주시여, 왜 당신은 당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숨기어 당신을 보고자 원하는 자들의 눈을 기쁘게 하지 않으십니까?"

주님
1. 나의 참된 아들아, 참된 행복은 육안으로 보는 자에게는 없다. 그것은 영의 눈을 뜰 때에야 아는 것이요, 마음에 있는 것이다. 팔레스틴에서는 수천 명이 나를 보았다. 그러나 모두 참 행복을 얻은 것은 아니다. 썩어질 육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은 썩어질 물건밖에 없다. 왜냐하면 육안으로는 영원하신 영적 실재자를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네 자신이 너의 영혼을 볼 수 없거늘 어떻게 그 창조자를 볼 수 있겠느냐? 그러나 영안이 열리는 때에는 너는 확실히 영인 그를 볼 수 있다 (요 4:24).

또 지금 네가 나를 보는 것은 육의 눈이 아니오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팔레스틴의 모든 사람들은 다 육안으로 나를 보았다. 또 썩어 없어질 인간으로 된 줄로 알았다 내가 죽을 육체를 취한 것은 이로써 세상 죄를 대속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죄인을 위하여 구원의 사역이 완성될 때 (요 19:30)에 죽을 육체는 죽지 않는 몸으로 영광중에 변모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부활한 후에 나를 볼 수 있는 자는 영적 시각을 받은 자들 뿐이다(행 10:40-41).

2. 이 세상에는 나에게 '대하여' 아는 자는 많으나 '나를' 아는 자는 적다. 그것은 저들이 나와 개인적 직접 관계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참 이해도 없고 나의 안에 있는 믿음도 없고 나를 자신들의 구주와 주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마치 소경으로 난 자가 붉고 푸르고 노란 여거가지 빛깔에 대하여 말은 하나 그 아름다움과 관상적 희열은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그들은 그 어떠한 가치도 모르고 다만 거기에 대한 여러가지 명목 밖에는 모른다. 눈을 뜨기 전에는 참 빛깔을 알 수 없다. 그와 같이 비록 박학한 사람이라도 그 영안이 뜨이기 전에는 나를 알 수 없고 나의 영광을 볼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의 화신인 것을 깨닫지 못한다.

3. 많은 신자들은 저들의 마음에 내가 임재하는 것이 저들에게 영적 생명과 평화를 주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직접 나를 보지 못한다. 마치 사람이 눈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으나 눈약 한 방울을 그 눈에 떨어뜨리면 눈은 그것을 보지 못하나 눈약이 눈 안에 있으므로 눈을 상쾌하게 하는 것 같이 나의 내재가 그의 내적 광명의 눈을 밝히고 시력을 증진케 한다.

4. 참 평화, 이것은 내가 신자의 마음에 임재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나를 볼 수는 없다. 다만 그 힘을 느끼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행복하다. 또 나의 현재에 의하여 그들은 평화와 기쁨을 느낄 수 있으나 그로 인하여 정신이나 마음을 볼 수는 없다. 그것은 혀와 과자와의 관계와 같다. 미각은 혀에 있으나 그것을 맛보면서 볼 수는 없다. 이와 같이 나도 나의 사랑하는 무리에게 감추인 만나가 되어 생명과 기쁨을 준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다 동원하여도 알 수 없고 또 알 수 없는 것이다(계 2:17).

5. 병중에는 입맛이 없어진다. 비록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도리어 맛이 나쁘다. 그와 같이 죄는 영적 미각을 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사정 밑에서는 나의 말과 봉사, 나의 현재적인 임재도 죄인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 그래서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대신에 함부로 평가하고 비평을 한다.

6. 보통 신자들은 또 내게서 고침 받은 소경같이 나를 선지자나 인자로 보고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지 못한다(요 9:17, 35, 37). 다시 나의 계시를 받을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된다.

7. 어느 때 한 어머니가 뜰 안 숲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 때 아기가 울면서 여기 저기 그 어머니를 찾았다. 그러나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 때 종이 와서 아이를 보고 "도련님 울지 말아요. 이 나무 위에 망고를 봐요. 이 뜰 안에 아름다운 꽃들을 봐요." 하였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아니 싫어, 나는 어머니가 만나고 싶어. 어머니가 준는 것이 어느 망고보다도 맛있어. 어머니의 사랑이 모든 꽃보다도 좋아. 너는 이 동산이 내 것인 줄 모르는구나. 우리 어머니 것은 다 내 것이다. 그런 것은 관심 없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하였다. 그 때 나무 그늘에 숨어 있던 어머니가 듣고 달려 나와서 아이를 가슴에 안고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그 때 아이에게 그 동산은 낙원으로 변하였다. 이와 같이 나의 사랑하는 무리들은 이 큰 세계의 동산에 있어 여러가지 아름다운 것이 마음을 끌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발견하기까지는 참 기쁨을 맛 볼 수 없는 것이다.

8. 마치 행주를 물어 넣으면 물이 행주 속에 스며드나 행주는 물이 아니라 전혀 다른 물건인 것 같이 나의 사랑하는 자녀가 내 안에 있을 때 나는 그들의 안에 있다. 이것은 범신론이 아니오 천국이다. 이와 같이 행주 속에 물이 있는 것과 같이 나는 무소부재하여 모든 것 가운데 있으나 그러나 그들은 내가 아니다(눅 17:21).

9. 석탄의 한 조각을 취하여 이것을 아무리 씻어도 그 검은 것을 씻어버릴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불 가운데 넣으면 검은 빛이 변하여 빨갛게 된다. 이와 같이 죄인이 성령을 받을 때 (성령은 아버지와 내게서 나온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그는 불 세례로 인하여 검은 죄의 더러운 것이 소멸되고 세상의 빛이 된다 (마 3:11, 5:14). 석탄 속의 불과 같이 나는 나의 자녀들 안에 있고 그들은 내 안에 있어 나는 그들을 통하여 나 자신을 세상 중에 나타낸다.


2 절.

제자: 주여, 당신이 만약 이 세상에 당신 자신의 특별한 계시를 내리신다면 사람들은 벌써 하나님이 존재와 당신의 신성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가 없을 것이오. 모든 사람이 믿고 바른 길을 걸어 나아갈 줄 압니다.

주님:
1. 내 아들아, 모든 사람의 마음과 형편은 내가 더 잘 안다. 그러므로 나는 각 사람들의 중심의 요구에 응하여 나를 계시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바른 길에 돌아오게 함에는 내 자신을 계시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하여 나는 인간이 되었다. 즉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무서운 자나 또는 이상한 무엇이 되지 않고 사랑이 충만한 그들 자신과 같은 자가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양으로 창조된 까닭이다.

인간은 자기가 믿고 사모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연의 욕구가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 분을 이해하려면 그 분과 동질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하나님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하므로 하나님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인고로 그 분은 인간에게 같은 사랑의 동일한 성질을 부여하셨다. 이 인간의 가진 사랑의 요구가 만족되기 위하여 나는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형체의 존재를 취하였다.

그래서 내가 사람이 된 것이다. 아ㅣ로써 나의 뭇 자녀와 거룩한 천사들이 나를 보고 나와 교제하는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골 1:15, 2:9).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 14:9-10)라고 내가 말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있을 때 나는 아들이라고 불렀으나 나는 영원하고 무한한 아버지다(사9:6).

2. 나와 아버지와 성령은 하나이다. 마치 태양 중에 열과 빛이 있는 것 같이! 그러나 열은 빛이 아니오. 빛은 열이 아니다. 그 나타남은 다르나 근본은 하나이다. 그와 같이 나나 성령은 아버지께로 나와서 이 세상에 빛과 열을 준다. 불 세례를 주는 성령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악을 태워 없이 하고 그들을 순결하고 또 거룩하게 한다. 참 빛인 나 (요 1:9, 8:12)는 모든 암흑과 악한 요소를 쫓아버리고 그들을 의의 길로 인도하며 마침내 영원한 본향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3개의 다른 존재가 아니요, 하나이다. 마치 태양이 하나인 것 같이!

3. 가치의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나 기능은 이것을 활용하여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점점 퇴화하여 마침내는 없어져 버린다. 믿음도 살아계신 하나님깨ㅔ 접붙이지 아니하면 죄의 자극으로 부서져 마침내는 의심으로 모양이 변하여 버린다. 때때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그 의혹이 풀려 없어진다면 나는 믿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상한 지체를 의사에게 가지고 가서 상처를 보이기 전에 통증을 없애 달라는 것과 같다. 그것은 확실히 미련한 일이다. 지체의 통증은 그 상함으로 일어나는 것이니 상처가 나으면 통증은 자연 없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연락이 끊어지면 영의 통증인 의심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 그 때에 나의 신성과 하나님의 존재 등에 대한 의심은 없어진다. 그 때에 고통대신 놀랄만한 평화가 온다. 이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파멸에 떨어진 불쌍한 인간들을 하나님과 다시 결합시키기 위하여 육체를 취하였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늘 위에서 그 분과 함께 영원히 행복을 얻게 하려 함이다.

4. 하나님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에 사랑의 성질을 부여하였고 특히 인간에게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과 이성과 사랑을 부여한 하나님이야말로 사랑의 봉사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냐? 하나님의 요구는 그 피조물들이 모두 그를 사랑함에 있다.

만약 이 사랑이 정당하게 사용되지 않고 사람이 마음과 뜻과 영을 바쳐 사랑의 부여자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사랑은 높은 데서 떨어져 이기적 사랑으로 변한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 또는 다른 피조물과의 사이에 불화가 일어난다. 모든 이기적 인물은 자기를 죽이는 자다. 이것이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기주의자가 많이 자살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다 그의 이웃이지만 특히 항상 서로 가까이 생활하는 사람을 가리킨 말이다.

다만 며칠동안 이웃으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불친절한 사람도 그럴 수는 있다. 그러나 날마다 너를 괴롭게 하는 자로 더불어 함께 있으면서 그 사람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기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 가장 어려운 싸움에 이길 때는 자기와 같이 남을 사랑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

사람이 그의 전심전력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 같이 그 이웃을 사랑할 때는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고 그의 마음에 천국이 건설되어 끝날 때가 없으며 사랑의 불 가운데 녹아들어 그를 지은 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거룩한 모양으로 변화된다.

5. 전심으로 나를 구하는 자에게는 내 말을 통하여 내 자신을 나타내지만 마치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인간의 육체를 입은 것과 같다. 영이요 생명인 내 말(요 6:63)도 사람의 언어 중에 쓰여져 있으므로 그 중에는 영감으로 된 것과 인간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요, 그것을 쓴 선지자와 사도들 중에 임하였던 성렬돠 친히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심할 것 없이 성경의 의미는 영적이다. 학자든지 아니든지 유식.무식을 물론하고 다만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국어인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인 줄 알라. 그들은 성령과 전혀 교제하지 않는 까닭이다.

6. "자연의 서(書)" (썬다 싱은 자연 가운데서 깊은 진리를 캐어 내고 한없는 기쁨을 맛본다. 그래서 성경과 같이 "자연이 서"라고 부른다)도 나의 저작이다. 자연 가운데 내 자신을 자유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자연을 읽는데도 영적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은 그 중에서 나를 발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발견하는 대신에 혼란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와 같이 소경은 손끝을 눈 대신에 사용하고 어루만져서 글을 읽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참 형상을 알 수가 없다. 불가지론자나 회의론자의 연구는 완전한 자 중에서 다만 결점만을 발견하고 잇다. 결점만을 찾는 비평가가 질문하기를 "만약 전능의 창조자가 이 우주에 있다면 왜 태풍, 지진, 일식, 번뇌, 죽음 같은 결함이 이 세상에 있느냐?"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미련한 무식자가 아직 미완성한 건물이나 그림을 보고 그 결함을 말하는 것과 같다. 때가 이르러 그것이 완전히 성취될 때에는 그들은 자기의 미련한 것을 부끄러워 하며 마침내 그것을 찬탄할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하루에 현재 존재하는 이 모든 것을 지은 것이 아니오. 또 하루 사이에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창조물은 완성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만약 이 세상의 인간이 미리 하나님과 같이 결점 없는 장래의 완서된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 앞에 꿇어 엎디어 "모든 것이 온전히 완전하다"고 말할 것이다.(창 1:31)


7. 사람의 영혼이 육체 중에 머물러 있는 것은 병아리가 알 속에 있는 것과 매우 흡사하다. 암탉이 알 속의 병아리를 향하여 말한다고 하자. 만약 크고 넓은 세계와 모든 과일과 여러가지 꽃과 큰 산과 긴 강물이 있는 것을 말하고 어미 닭이 이 가운데서 살고 있는데 너도 때가 되어서 껍질을 벗고 나올 때는 이것을 볼 것이라고 하여도 그 병아리는 믿지 않을 것이다. 또 그 날개와 눈은 그 때를 위하여 준비된 것이니 때가 되면 볼 수도 있고 날개 짓을 할 수도 있다 하여도 이것을 믿지 않고 아무 증거라도 껍질에서 나올 때까지는 믿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하여서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불확실하다.

그 이유는 그 껍질과 같은 육체를 초월하여 높이 볼 수 없고 날개 같은 고상한 사상도 두뇌의 작은 울타리를 벗어나갈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의 약한 눈은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준비한 영원히 썩지 않는 보고를 보지 못한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필요한 조건은 아직 육체에 있는 중에서 믿음에 의하여 성령으로부터 따뜻한 생명의 힘을 받는 일이다. 이것은 병아리가 암탉의 체온을 받아서 부화하는 것 같이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위험이 있다.


8.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물질이나 생명이나 처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나중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전능자는 무(無)에서 물질을 창조할 수 있는 것 같이 또한 그 말씀의 힘에 의하여 피조물에 영원한 성질을 부여할 수 있진 아니한가? 만약 그것이 될 수 없다면 전능이라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생명은 파괴와 멸망의 운명에 처하여 있으니 그것은 그 자신이 변화하고 멸망할 성질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명이 변화와 멸망과의 영향 중에서 해방되어 무한한 생명의 원천되는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보호 밑에 오게 된다면 죽음에서 벗어나 영원을 획득할 수 있다. 나를 믿는 자들에게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0:28).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니라." (계 1:8)

출처 : 모세 지팡이
글쓴이 : 모세지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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