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이 죽으면
요한복음 12장 20~26절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한 알의 밀이 죽으면"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본문 가운데 20절 말씀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 전이지만 이방인을 대표하는
헬라 사람들도 명절에 예배하러 오고
또 예수님을 뵙고자 하였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이 명절은 어떤 명절을 말하고 있는가?
12장 1절에 있는 유월절이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마지막 유월절 주간에 예루살렘에 오신 그 유월절이다.
예수님은 그 헬라인들을 만나려 할 때
23절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12장 28절에는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라는 음성이 들렸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여기서 영광은 영화라는 말과 같다.
영화롭게 하였고 또 영광스럽게 할 것이다 라는
음성이 들렸다.
요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마지막 기도하는 내용이 나온다.
17장 1절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이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4절 말씀에 보면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라고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렸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이 땅에 오신 예수님도 사랑만
보이셨고 하나님이 빛이시니까 예수님도 빛이 되셨고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니까 예수님도 거룩을 드러냈고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니까 예수님은 평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런데 이미 이 땅에 사시면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품을 다 드러냈는데
다시 한 번 영화롭게 해달라
다시 한 번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
그 영광은 바로 17장 5절에 있는 영광이다.
"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빛과 사랑과
평강을 다 드러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마지막 한 가지 창세전에 가졌던 영광은
즉 영생을 말한다.
그래서 그 남아 있는 영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서 다시 한 번 영광스럽게 해달라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달라
그렇게 기도하셨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 예수님의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를 응답하셔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했는데 그것이 부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영생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게 되셨다.
본문 12장 23절에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은 십자가 질 때가 됐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
다시 부활하여 영생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그 때가 인자에게 왔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죽음을 12장 32~33절에
이렇게 표현 하셨다.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구약시대의 모세가 구리 뱀을 장대에 높이 들린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높이 들리면
즉 그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하고 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 바로 인자가 들리는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 말씀 하고 있다.
그리고 12장 24절에 그 유명한 한 알의 밀에 대해서
말씀 하고 있다.
들려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 주님의 죽음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서 죽는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로 오셨고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자연의 원리이다.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그 곳에서 씨앗이 죽으면
싹이 나서 많은 열매를 또 맺게 되지만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게 된다.
이러한 자연의 원리를 영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이 땅에 떨어진 인생인 것을 말씀하고 있다.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빌립보서 2장 5절에 보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분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서
이 땅에 심겨진 것이다.
그리고 공생애 30년을 살면서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놓고 죽는 순간이 왔다.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을 이렇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희생하는 삶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우리는 비하라고도 말하고 겸손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십자가 희생 속에는
이 땅에 오신 그분의 비하, 겸손과 낮아짐과
그 모든 속성이 다 들어있는데 그것이 완전히 죽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 마지막 순간이 왔다는 것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이라고 표현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광스럽게 되셨는데 그렇다면 한 알의 밀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했는데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고린도전서 15장에 20~23절 말씀에 보면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이 말은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는 성경의 역설적인 진리를
입증해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로 많은 열매를 바라고 죽으셨는데
죽고자 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더니 부활이라고 하는
부활의 첫 열매로 자신이 먼저 다시 사는 놀라운 역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지고,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살려고 하면 죽는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산다고 하는
기독교의 역설적인 진리를 실제적으로 입증을 하셔서
예수님 자신이 먼저 다시 사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다시 오셔서 많은 열매를
거두시려고 이 땅에 오실 것인데 예수님이 오셔서
거둬야 할 열매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고 예수님 믿고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열매들이다.
히브리서 1장 6절 말씀에 보면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 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자인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을 통하여 부활의 첫 열매가 되고
다시 오시면 많은 열매들을 거두신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다시 오시는 맏아들이시다.
로마서 8장 23절에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 영혼이 구속받았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된다고
로마서 8장에서 고백을 했지만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즉 부활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부활을 뭐라고 말하는가?
"양자 될 것" 이라고 하였다.
부활을 입어야 하나님의 양자가 된다.
그러니까 부활을 통해서 익은 열매가 많이 나타나고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는 양자가 되어져
많은 열매를 거두시게 된다 말이다.
히브리서 2장 11절 말씀을 보면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하나님이시다.
그 분은 곧 예수님이시다.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우리는 다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시는 예수님이나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전부 한 하나님에서 그 생명으로 다 낳은 자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고 우리는 양자지만
같은 형제로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하셨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고
이 못난 인생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가?
같은 열매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에서 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놀라운 축복이고 이것이 놀라운 은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맏아들로 그 많은 양자들을 추수하기
위해서 반드시 다시 오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로 이 땅에 떨어져 묻어져서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이것은 자연의 원리일뿐더러
영적인 원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도 하나님의 일처럼
죽어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전도의 열매를 맺길 원하는가?
양육되고 성장되어 열매를 맺기 원하는가?
응답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가?
누군가 열매를 맺고 누군가 열매를 따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빛이 있지 않고는 열매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24~25절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그러면 나의 이 목숨을 영원한 생명으로 얻기 위해서는
나의 첫 번째 이 목숨이 한 알의 밀처럼 죽어야만
영생이라고 하는 생명의 부활로 다시 나타날 수가 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이 영생이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이
목숨을 얻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무엇으로 그 생명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저와 여러분은 25절에 있는 말씀대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고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먼저 내 목숨을 잃어서 하나님의 일로 죽어지는 삶이
예수님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열매가 맺어져 예수님은 맏아들로
오실 수 있게 된다.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지고 죽어야만 하는데
우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하는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 한 알의 밀이 나무에 붙어 있는 게 아니고
떨어져서 땅에 묻혀야 싹이 나서 죽는 과정으로 가는데
이건 무엇인가?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본토 친척집을 떠남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시작되는 그 삶이 땅에 심겨지는 것이다.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출애굽 하시고 광야의 길을 걸어 가셨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은 예수 믿는 순간 땅에 떨어진
사람들이다.
땅에 떨어져서 예수님이 공생의 30년을 통하여
자신을 완전히 죽일 수 있는 준비를 하시고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한 알의 밀로 죽는 것처럼
우리도 이 광야를 따라가면서 마지막 한 알의 밀처럼
완전히 죽어지는 그 순간이 와야 그때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된다.
우리의 죽음은 육신적인 죽음이 아니다.
우리의 옛 사람을 처리하는 것이다.
예수 믿기 전에 나의 모든 옛사람, 자기라고 하고
자아라고 하고 겉사람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죽어져야만 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땅에 떨어졌는데 한 알의 밀로
죽지 않으면 그분의 열매가 없는데
이것은 로마서 8장에 있는 대로
사랑이 확증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까지 가야 하나님이 그 사랑을
확증하실 수가 있다.
예수님의 한 알의 밀속에는 그분의 겸손과 희생과 죽음과
사랑과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다 들어가 있다.
저와 여러분 이미 예수 믿는 순간부터 땅에 떨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자아 처리를 통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십자가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십자가의 주관적인 역사로
우리 옛 사람을 다 죽여 나갈 수 있다.
그 십자가가 우리의 환경을 여시고,
그 십자가가 나를 회개시키고 나에게 감동을 주면서
계속해서 나의 옛 사람을 죽여 가는 것이
십자가의 주관적인 역사고 이것이 어린 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가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옛 사람이 다 죽어질 때
한 알의 밀처럼 죽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싹이 나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예수님의 한 알의 밀의 교훈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자아들을 전부 매 순간마다
십자가를 의지하면서 처리해 나가야만 한다.
제가 전에 원치 않게 건축 현장에서 공사하는 것을
보게 됐는데 가끔 보면 울산 정유공장이라든가
이런 데 엄청 큰 기름 탱크가 있다.
아주 큰 통 속에 휘발유고 경유고 그걸 저장하는
그런 탱크가 있는데 그 기름을 담는 탱크라 할지라도
그 속에서 녹이 생긴다.
동록이 생기고 녹이 생겨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안을 다시 한 번 청소를 해야 된다.
산화되기도 하고 말이다.
그 청소하는 걸 제가 보게 된 것이다.
갑자기 기름통 안에 그 탱크 안에 그 녹들을
무슨 방법으로 그걸 처리해서
거기다 다시 기름을 채우고
새롭게 페인트칠도 한다.
그 방법이 두 가지이다.
불을 가지고 불로다가 그 쇠를 달궈서
쇠로 다 녹여버린다.
불로다가 그 동록을 다 녹인다.
또 하나의 방법은 뭐냐 하면
우리가 페인트를 칠하려면 철 같은 게 산화돼서
녹이 나면 빼빠로 민다.
그런데 그 큰 기름통을 어떻게 빼빠로 밀겠는가?
모래를 쏴버린다.
고압의 스프레이를 가지고 모래를 갖다가 뿌려가면서
모래로 때려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녹이나 동록이 다 떨어져 나간다.
불로 다 태워버리든지
모래를 때려서 그것을 처리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우리의 옛 사람이라고 하는 그 자아와
동록, 나도 모르게 자꾸만 녹이 슬어가는 그 부분들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나는 불로 연단하는 거
아니면 모래로 때리는 것처럼 환경 가운데서
그렇게 우리를 강타하시는 것이다.
그런 두 가지 방법이 밖에 없다.
그게 하나님이 십자가로서 우리를 주관적으로 처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뤄가는 방법인 것이다.
어떤 때는 모래를 갖다가 그 굵은 모래를 그냥
스프레이를 뿌려갖고 그 모래가 나가서 때리면서
그것이 빼빠로 녹을 없애는 것처럼 그런 작용을 한다.
아니면 불로다가 그걸 다 녹여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불같은 시험을 받게 되고
때에 따라 모래로다가 맞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손길로 그렇게 다룸을 받는 것이
전부 우리를 하나님 일로 죽게 하여 많은 열매를
맺게 해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처음 있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한 알의 밀로 죽으셨다면 저와 여러분도
한 알의 밀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한 알의 밀로 죽게 되는 최종적인 심령이
모세의 심정인 것이다.
40세에 애굽인을 쳐 죽이고 나서 광야로 나올 때
땅에 떨어진 것이다.
40년 동안 훈련도 받아서 80세에 다시 사명을 받을 때
그때 하나님 일로 죽으면서 열매를 맺는데
그 모세가 어떻게 하는가?
금송아지 섬기고 우상 섬기는 그 백성을 위해서
나를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한다.
예수님의 모형으로 나타난 그 모세의 심정이
곧 예수님의 심정인 것이다.
그것이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것이다.
저 방자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우상 숭배하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 백성을 향해서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인데 나를 생명책에서 지워주고
저들을 사하고 저들과 함께 동행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으면 차라리 내가 죽는 것이 낫겠다’
그 심정이 예수님이 한 알의 밀로 죽는 심정이고
모세의 그 심정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런 중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될 때
우리는 한 알의 밀처럼 그때 죽게 되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뭐라고 말하는가?
내 형제 골육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자기는
버림을 받아 저주를 받을지라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바로다 그랬다.
예수님의 신정인 것이다.
다메섹에서 부름 받아 11년 동안 연단 받고
많은 훈련 받고 안디옥에서 목회를 시작할 때
사도바울의 마음은 바로 그런 마음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이 된 것이다.
내 형제 골육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나는 저주를 받아도 된다.
그렇게 원한다.
그게 죽고자 하는 마음이고
그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자 하는 마음이고
그게 한 알의 밀로 완전히 죽는 순간에
그 고백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그런 고백이 우리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에게 맡겨진 얼마간의 영혼들 있다.
그게 형제가 됐든 자녀가 됐든 아내가 됐든 남편이 되었든
얼마간의 몇몇 영혼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나를 희생하고 내가 그 십자가를 지고
나는 죽어서 땅에 묻혀 지고 나는 죽는다 할지라도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한다는 이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과
이 한 알의 밀로 죽어지는 그 마음이 우리 안에 싹 될 때
놀라운 기적들이 나타난다.
그때 열매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웨슬레 목사님은 그렇게 기도했다.
감리교회는 교구가 있는데 그 교구 안에
초대 감리교회부터 그것이 감리교의 형식인데
내 교구 안에 맡겨진 영혼들,
감리교 안에 맡겨진 영혼들,
웨슬레에게 맡겨진 영혼들
그들의 현재적인 구원이 있지만 그들의 장래에
궁극적인 구원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구원 갖고는 그게 구원의 완성이 아니다
궁극적인 구원이 있는데
그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늘 자신의 영혼과 그 많은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궁극적인 구원의 완성이 어디 있는가?
그것을 늘 묵상하고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그것 때문에 기도하다 보니까 완전 성화라고 하는
그 개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초기 성화가 있지만 완전한 성화가
있어야 되고 완전해서 완전으로 가야 된다.
맡겨진 교구들의 영혼들 때문에
감리교 신약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 각자에게도 한 명이 됐든 두 명이 됐든
맡겨진 영혼들이 있는 것이다.
그 맡겨진 영혼들이 어떻게 변화하는가?
내가 한 알의 밀로 죽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화될 수 없다.
나 자신도 열매가 맺지 못하고 많은 영혼들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하나님이 모래로 때리는 것처럼
불로 우리를 태우는 것처럼 그 환경이 올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 환경인가?
내가 한 알의 밀로 죽어지고
내 자아가 깨어지는 그 환경을 보내주는 것을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감사하고 아멘하고
그걸 기뻐하는 이런 사람이 돼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한 알의 밀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영혼 구원이 없고
그렇지 않고는 열매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역사가
이 십자가의 주관적인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만 한두 명이 될지라도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한 알의 밀처럼 죽어지기만 한다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는가?
내가 죽지 못해 갖고, 나의 옛 사람이 죽지 못해 갖고,
나는 희생하기가 싫어갖고, 나는 아직도 교만하고
나는 아직도 자아가 깨지지 못하고 원망 불평하고
이 옛 사람이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열매를 못 맺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고
옛 사람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환경 가운데 준다면
그게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축복인가?
진짜 대박은 거기에 있다.
십자가의 완성에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두 개의 밤을 지났다.
감성의 밤을 지나고 영성의 밤을 지나고 나니까
이 깊은 밤 속에서 하나님이 찾아와서
합일이라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니까
이거야말로 인생의 대박이고 이런 축복을 받았다고
그렇게 간증하고 있다.
이것이 인생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고
이것이 최고의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로 죽을 수 있는 기회이다.
우리는 예수 믿는 순간부터
이미 땅에 떨어진 인생이다.
씨앗 자체가 나 혼자 한 알 그대로 먹을 것이냐
이제는 더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냐
사느냐 죽느냐 그 씨앗 자체,
그 개체가 자기 혼자 할 일이다.
누가 도와줄 수도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 영혼 하나하나가 이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열매를 맺을 것이냐? 뭐 맺을 것이냐?
그것이 내 옛 사람인 자아가 한 알의 밀로 죽을 것이냐?
안 죽을 것이냐? 거기에 승부가 달린 것이다.
이왕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 자리까지 달려왔지만
남은 생에 여러분에게도 모세와 같은 심정이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내게 맡겨진 저 영혼들을
하나님 불쌍히 여겨서 용서하지 않는다면
나를 생명책에서 치워주십시오.
내 형제 골육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는 저주를 받을지라도 나는 그걸 원합니다.
바울의 심정과 같이
심지어는 불교의 지장보살도 그런다한다.
지옥문에 앉아 있으면서 그 지옥에서
모든 영혼이 다 나오기 전까지는
나는 지옥을 떠나지 않는다.
그게 지장보살의 자비가 그 정도이다
원래 기독교의 극치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모세의 심정과 바울의 심정
한 알의 밀로 죽으셔서 나의 영혼을 열매로 거두시는
그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가 나도 한 알의 밀처럼
예수님처럼 나도 죽어서 그 희생을 내가 십자가를 지고,
나를 하나님이 십자가로 사용해 주시고,
나를 이렇게 버려주시고, 나를 새롭게 하시고,
나 하나가 죽음으로 열매를 맺는 그 하나님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런 신앙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고,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그런 놀라운 역사를
우리 가운데 일으키실 것이다.
다만 몇 분이라도 이 성채교회 안에서 한 알의 밀처럼
정말 땅에 들어서 죽어서 열매를 맺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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