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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향연/메세지

엘리사와 수종드는 자

by Andrew Y Lee 2023. 10. 27.

엘리사와 수종드는 자

 

열왕기하 6장 14~17절

 

"14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15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오늘도 주의 평화가 함께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본문 말씀에 보면 아람왕과 그의 군대 그리고 엘리사와

그에게 수종드는 자가 나와 있다.

그 수종드는 자를 사환이라고도 했고 다른 성경에는

시종이라고 표현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을 우리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살아가는 사람

이렇게 두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사실은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 세상사는

사람들 전체를 우리는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말이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본문

14에 있는 아람 왕과 그의 군대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이 아람 왕과 군대들이 8 말씀부터 보면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려고 할 때 작전을 짜서

진을 치기만 하면 이스라엘 왕에게 누군가가 기별하여

그 작전이 먹히질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아람 왕은 스파이가 있는 것이 아니냐

첩자가 있어서 이스라엘 왕에게 고한 것이 아니냐며

신하들에게 말할 때 아람 왕의 신복 중에 하나가

12에 이렇게 말한다.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그래서 아람 왕은 먼저 엘리사를 죽이지 않고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엘리사가

도단이라고 하는 성에 있다는 것을 알아내어

14 본문에 아람 왕이 많은 군대를 보내서

그 도단성을 에워싼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그러니까 이 아람 왕과 군대들은 많은 군대 눈에 보이는

군대를 보내면 숫자적으로 우리가 우위에 있으니까

엘리사를 잡을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는 것이

아람 왕과 그의 군대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엘리사에 수종드는 자가

본문 15 말씀에 보니까

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보니까 아람 왕의 군대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엘리사에게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면서

두려워했다.

 

여기서 엘리사의 수종드는 자 역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그런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반면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엘리사이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식의 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지식의 눈이 보이는 것인가?

분명히 지식은 힘이고 그 힘을 가지고 사람들은 살아간다.

흔히 알지 못하면 문맹이라고 한다.

 

글자를 모르면 문맹이다.

컴퓨터를 모르면 컴맹이라고 하고

길을 찾아가지 못하면 길치라고 한다.

 

이렇게 지식의 눈이 없으면 살아가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 그 힘 속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힘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의 힘도 있고 마음의 눈도 있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다.

이것은 세상법이다.

 

이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이 짐작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 어떻게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세상은 보이는 것만 가지고 따지기 때문에

물증이 없으면 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마음의 눈은 그 눈이 열어지면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도 알게 되고

사람의 심리도 알게 된다.

 

열왕기하 5 20~24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나아만을 쫓아가

물품을 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아만이 요단강에 가서 7번 몸을 담그고 몸을 씻어

깨끗해져서 나올 때 가지고 온 예물을

엘리사에게 내놨을 때 엘리사는 예물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종 게하시가 엘리사의 이름으로

그 예물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받아서 감추었다.

 

26 말씀에 보면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지금 게하시는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는

그런 시종이었기 때문에 엘리사가 거절한 나아만의 예물을

받아서 감추었다는 것을 엘리사는 그 사람이 너를 맞을 때

내 심령이 감각됐다고 말하고 있다.

 

엘리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엘리사는 그 사실을 이미 마음의 눈으로 봤고

영적인 눈으로 봤다는 것이다.

 

나라는 전쟁으로 휩싸여 백성은 다 기근과 도탄에 빠져 있는

이 어려운 시기에 지금 눈에 보이는 그런 예물을 받을 때가

아니라고 게하시를 책망하고 있다.

 

마음의 눈이 열려 있은 엘리사는 영적인 눈이 열려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게하시를 저주하여 영원토록 나아만의

문둥병이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게하시의 남은 생의 모습이다.

 

열왕기하 6 17로 넘어가면

엘리사를 수종하는 사환에게 엘리사가 눈을 열어

보여주니까 어떻게 되었나?

 

아람 왕의 군대보다도 더 많은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18에 보니까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아람 군대의 눈을

다 어둡게 해 전부 사마리아로 끌고 갔다.

 

그럴 때 이스라엘의 왕이 그들을 죽일까요? 할 때

죽이지 않고 물과 먹을 것을 주어서 그들 왕에게

다시 돌려보내고 있다.

이것이 엘리사의 능력이고 엘리사의 사랑이다.

 

이렇게 엘리사는 심령의 눈이 열어진 사람이고

영적인 눈이 열어지고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보며

살아가는 인생이었다.

 

그에 반해 아람 왕과 군대,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

그리고 사환은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15, 16 말씀에 나와 있다.

아람 왕의 군대가 성을 에워싸고 있으니까 사환은

엘리사에게 "내 주여 우리가 어찌어찌하리이까" 하면서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니까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살아가는 인생들의 특징은

그 눈에 보이는 숫자 계산이 맞지 않으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살아가는

인생들의 모습이다.

 

창세기 3 10을 보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은 제일 먼저 죄를 짓고 나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제일 먼저 한 고백은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죄의 결과로 두려운 것이 모든 죄 아래에 있는 인생들의

현주소이다.

 

그러면 엘리사의 수종드는 이 사환은

무엇 때문에 두려웠는가?

많은 군대의 숫자를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숫자에만 연연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이가 많이 먹어서 숫자가 많아지니까 이제는 죽음이

가까워지니까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돈의 숫자가 부족하니까 이 때문에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사탄의 전략이고 사탄이 인생을 죄의 노예로

끌고 가는 방법이다.

 

미국에 웃으게소리가 있다.

미국에 가면 한국 사람들은 다 빌빌 하다가 빌빌 하면서

간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고지서가 영어로 빌이다.

전기세 고지서가 날아오고 전화세 고지서가 날아오고

아파트 렌트비가 나오고 자동차 할부금 고지서가 나오고

그러니까 그 빌을 막아내면서 빌빌 하다가

그냥 죽어가는 인생인 것이다.

 

지금의 모든 사람들이 사는 곳의 시스템 자체가

전부 이렇게 되어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인 것이다.

 

인간을 다 경제 노예로 만들어놓고 그 막대한 세금들은

다 자기네가 거두어 전부 지하 땅굴을 만들어

그곳에 은닉하고 온 세상에 악을 행하면서 사람들을

전부 노예로 삼고 있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러면서 적당히 먹여 살려가면서 인생을 끌고 가고 있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어떻게 보면 사실 세상 사람들은 사육당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인생들이 그 어둠의 세력 대해서 지금 사육을 당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죄의 굴레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고 이 시대 경제 시스템이다.

 

히브리서 2 15 말씀을 보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죄를 짓고 나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었다.

 

죽기가 무섭고 두렵기 때문에 인생들을 이 죽음이라고 하는

두려움에 매여서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 때문에 오셨다.

요한일서 4 17~18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왜 자꾸 말씀을 지키라고 하시는가?

왜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것인가?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살아갈 때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지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인생은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하셨다.

 

사랑을 이룬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아직도 내가 무언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두려움에 쫓기고

숫자 계산 때문에 뭐가 부족하여 두려워한다면

온전한 사랑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고 하였다.

나의 일생에 두려움을 다 내어 쫓지 못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죽으면 그 두려움에 대해서 형벌이

있다고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랑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 일생의 신앙생활은 내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것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은

이 두려움을 죽을 때까지 안고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사랑만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고 심판 날이 와도

담대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저와 여러분은 필히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의 눈도

열려야만 한다.

여러분 마음의 눈이 열려야만 한다.

영적인 안목이 열려야 된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를 볼 수 있는 그 섭리의 눈도

열려야 한다.

그런 눈이 여러분에게 열리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살면 두려울 수밖에 없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엘리사처럼

우리도 큰 눈이 열려지고 엘리사가 그 사환의 눈을

열어주고 아람 군대들을 사마리아로 데리고 가서 눈을

열어준 것처럼 다른 사람의 눈도 열어줄 수 있는

은혜아래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창세기 45 5~8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6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 7년 동안 흉년이 왔고 2년 만에 형제들이 애굽으로

요셉을 찾아왔는데 지금 원수를 만난 상황이다.

 

자기를 웅덩이에 빠뜨리고 애굽에 팔아치운 그 형들을

만났는데 요셉이 뭐라고 말하나?

한탄하지 말라고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다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이 열렸고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이기 때문에 이 말을 하고 있다.

 

지금 눈으로 보이는 것만 갖고 사는 인생이라면

그 원수를 잘 만났다하며

당장 원수 갚으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리고

나니까 나를 이곳에 판 것은 당신들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먼저 여기다 보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애굽에 70인을 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400년 후에 200만의 대군이 일어나서 출애굽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섭리이기 때문에

바둑의 포석을 하는 것처럼 애굽에다 요셉을 심은 것이다.

요셉은 그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17살에 팔려가면서도 그 꿈대로 이루어가신

하나님의 섭리를 그때부터 봤는지 모른다.

그래서 요셉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창세기 50장에 가서 야곱이 죽고 나니까

그 형제들이 다 요셉을 찾아와서 아버지가 없으니까

우리를 죽이지 않겠느냐

아버지 때문에 눈감아준 거 아니냐 하였다.

 

요셉은 그때 너무나 기가 막혀서 울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당신들의 자녀를 내가 다 키우겠다 말했다.

 

내 자식 하나 키우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가?

11명의 형제들의 자녀를 다 내가 양육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일인가?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이 열렸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보내서

치리자가 되게 하고 그들이 왔기 때문에

그 형제까지도 내가 다 감당하겠다고 하였다.

이 큰 사랑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살아갈 때는

사랑할 수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영적인 안목이

열어져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모든 사건과 환경에서 누구를 핑계대지 않고

바로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세우려고 한 것이구나

이것을 알고 가게 된다.

 

결론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살지 않고 영적인 눈이 열리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요셉의 때처럼 우리도 7년의 풍년과 흉년의 때를

앞에 두고 있다.

엘리사의 때처럼 이런 환란 날을 우리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인 눈이 열리고 지식의 눈이 열려서

눈에 보이는 숫자만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는 반드시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

 

열왕기상 19 16 말씀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흘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엘리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바랄 때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서 힘을 내게 하여

40주야를 달려 호렙산에 이르러 주의 음성을 듣게 되는데

엘리사를 기름 부어 후계자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사람을 붙이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줘도 그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19 말씀을 한번 보자.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여기서 한 겨리의 소는 두 마리이다.

그러면 이 집은 24마리의 소를 가지고

농사할 만큼 부잣집이다.

 

엘리사도 열두 겨리를 가지고 밭을 갈면서 농사를 짓고

있는데 엘리야가 와서 겉옷을 그에게 던졌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명을 받고 나의 후계자가 되어 이 옷을 입으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20 말씀에 엘리사가 어떻게 하는가?

"20 저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컨대 나로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돌아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하였다.

 

예수님이 12 제자를 부르시면서 나를 따라오라 할 때

제자들이 그물을 버리고 배를 버리고 따라가는 것처럼

엘리사도 12겨리의 소를 가지고 농사할 만큼 부자이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소들을

다 버렸다고 하였다.

 

즉각적으로 부모에게 입 맞추어 작별하면서

인간적인 도리를 다 하며 엘리야를 따랐다.

 

그리고 엘리사가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먹게 하고

일어나서 엘리아를 쫓으며 수종들었다고 하였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순종인가?

자기가 농사하던 한 겨리 소 두 마리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고 모든 백성에게 다 주어먹게 하고

기구들도 불살랐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그리고 엘리야를 쫓아갔더라 하였다.

 

열왕기하 3 11 말씀에 보면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엘리사는 이때부터 수종을 들었다.

 

그러니까 엘리야에게 가서 물을 손에다 부었다.

이때는 물이 귀한 나라여서 세수하고 몸을 닦을 때

그 손에 물을 부어줬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수종을 그때부터 들고

스승을 따라갔다는 이야기다.

 

하나님이 엘리사를 기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 할 때

엘리사는 그 스승을 만나서 철저하게 순종하며

그를 따라간 것이다.

 

따라가되 어떻게 따라가는가?

끝까지 따라갔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부활 승천시키기 위해 길가에서 머물 때

너는 여기 머물라

벧엘로 가서도 너는 여기 머물라

여리고로 가면서도 너는 여기 머물라

요단강가에 이를 때까지 따라갔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영감이 갑절을 받기를

원한다고 하였을 때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겉옷을 던졌을 때 그것을 받아서

요단강물을 치며 기적을 나타내었다.

 

이 마지막 때에는 많은 일꾼들을 필요로 하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고 하나님이 붙여준

영혼들을 찾아서 끝까지 따르고 갑절의 영감을 구하며

사모하면 엘리사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눈이

열어주실 것이다.

 

이후 엘리사는 나아만의 문둥병을 기적적으로 고치고

도끼가 떠오르는 기적을 나타냈고

구했던 여리고의 물을 고치고 생도의 과부를 도와

준비 된 그릇 안에 기름이 채워지는 기적을 일으켰다.

 

또한 13 20에 보면 엘리사가 죽은 묘실에

죽은 사람들을 던지기만 하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계속 나타났다.

 

엘리사는 이렇게 기념비적인 인물이 되었다.

 

여러분 에베소서에 말씀하시기를 사도 바울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우리는 믿음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였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우리는 아는 것도 필요하다.

지식으로 아는 것도 필요하다.

하나님 말씀은 믿는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한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고 보이는 만큼만 살게 된다.

 

지금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사람은

그 눈에 보이는 만큼만 살아간다.

 

그런데 지식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리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까지 보며

보이는 만큼 살아가게 된다.

여러분 이것이 힘이다.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살아가려고 하는가?

예수 믿는 신령한 사람들, 하늘나라에 가서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의 세계에 가서 살 사람들이

어떻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갖고 살아가겠는가?

이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해야 된다.

 

눈에 보이는 숫자에 매여서 그 숫자 놀음은

다 사탄의 전략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숫자가 부족하면 이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지식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안이 열리는 것을 사모하며 엘리사와 같이

이런 길을 우리는 걸어가야 한다.

 

여러분 남은 생애를 살아갈 때

숫자에 연연하지 마시기 바란다.

 

나이라는 숫자에도 연연하지 마시고

내가 가진 재산이 얼마인가 그 숫자에도 연연하지 마시고

그것에 연연하면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식의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눈이 열어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엘리사처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눈으로 보는 그것만 보고 사는 사람의 눈을

열어 주는 그런 사명자가 되고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며 사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빠짐없이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살아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복된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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