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 인생 최대의 소망
히브리서 4장4~11절
"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전에 선배 목사님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셨다.
지금은 뭐 선후배를 많이 따지는 그런 시대가 아닌데
목사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 항상 설교할 준비를 해야 된다.
그래서 이런 선배들의 교훈을 받은 후배 목사님 가운데는
설교 한 편을 꼭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런 분이 계셨다.
어느 때라도 설교할 수 있도록 설교 한편을 준비한
그런 분이 계셨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이렇게 사도가 권면하고 있다.
너 예수 믿는 소망이 뭐냐?
그러면 거기에 대답을 항상 예비하고 다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 집을 떠나서 길을 갈 때 비상금을 소지하고
있는 것처럼 네 소망이 뭐냐?
예수 믿는 네 이유와 소망이 뭐냐?
그걸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것을 예비하고
그걸 준비하고 다니라는 것이다.
누가 묻든지 간에
‘나는 이런 소망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
그 대답을 항상 예비하고 다녀야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악 세상을 잠시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소망인 것이다.
이 소망이 없이는 누구도 살아갈 수가 없다.
현실적으로 오는 여러 가지 삶에 어려움이 있고
고통도 있고 병도 있고 또 여러 가지 감옥과 같은
환경도 있고 수많은 환경이 있는데
‘내일에는 그 모든 환경이 좀 바꿔지겠지’ 하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영원하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병은 절망인 것이다.
소망이 없는 인생이 되면 그것처럼 두렵고
무서운 그런 병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다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이다.
첫 번째
소망의 의미가 뭔가 살필 때에 사전에 보니까
두 가지로 소망이 나와 있다.
1)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
현재는 존재치 않지만 장래에 있어서 실현될 기대,
사전에 이렇게 나와 있다.
이것을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1차적인 소망이다. 이건 육신의 소망인 것이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욕망과 욕구가 있다.
그게 소망의 동기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바라는 거, 기대하는 거,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장래에 있어서는 실현될 기대,
이게 소망이라는 정의인데 이것은 다 욕망과 욕구를
중심으로 한 1차적인 인생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1차적인 소망이다 그렇게 말한다.
에모선이라고 하는 작가가 자신이 기르는 말을 외양간에
집어넣으려고 아무리 말 고비를 끌어당겨도
말이 외양간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얌전하고 어린 소녀 하나가 따라와서
그 말에다가 당근을 물려주니까 그 당근을 문 말이
따라 들어오는 것이다.
그 소녀가 당근을 입에 넣어주면서 고비를 잡아끌어서
외양간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는 수많은
당근이 필요한 것이다.
그 말이 외양간에 들어가야 되는 것처럼
우리를 끌어가시는 하나님이 수많은 당근을 입에
물리시면서 우리를 끌어가시는데
이게 전부 소망의 동기이다.
인생의 소망의 동기인 것이다.
여러 가지 의식주 문제, 욕망의 문제,
이것이 다 소망의 동기가 되고 그것이 인생의
당근과 같이 우리에게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에게는 1차적인 이런 소망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2차적인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전에는 두 번째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2) 삼덕의 하나,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은 신덕이다.
사랑은 애덕이다.
이 소망은 바로 망덕인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영원히 있는 것처럼 소망은 삼덕 중에
하나로 2차적인 소망의 그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인 소망인데 단순하게 이 세상에서만 바라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과 믿음이 그들을 예수의 재림 시 미래의 행복,
곧 영생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바라는 일,
이렇게 정의를 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대망하는 일,
이것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사전이 정리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약속을 믿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어서
그것을 기다리는 일, 그것을 대망하는 일, 그것을 소망이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번째
성도들의 소망은 두 가지다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1차적인 소망인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
현재는 존재치 않지만 장례에 실현될 기대,
우리에게 이런 여러 가지 일반적인 소망이 많이 있다.
그런데 성도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2차적인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2차적인 소망이 하나님의 약속이고 예수님이 오실 때
이 땅에 이루어질 여러 가지 행복 된 이런 일들을
2차적인 소망이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2차적인 소망의 한 가지는 로마서 5장 3~4절 말씀을 보면
3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가 환란 중에 있지만 우리가 연단을 잘 받고
말씀을 인내하면 소망이 생기는데
그 소망이 무슨 소망인가?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소망이라고 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자.
나 같은 죄인의 인생이 나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부어져서 어떤 환경이든지 사랑만
나타나는 사람이 된다는 거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소망이다 이 말이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자.
이 죄인이고 하나님의 원수 된 우리 인생 여러 가지
환경을 만나면 혈기를 부릴 수밖에 없고
미워할 수밖에 없는 이런 인생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같은 사랑이 내 속에 부어진다는 거
이게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가?
그것이 성도의 소망인 것이다.
그것이 2차적인 소망인 것이다.
그것이 영적인 소망인 것이다.
사도행전 24장 15절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의인과 악인이 다 부활해서 의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영생의 부활을 악인은 영원히 형벌 받는 영벌의 부활을
가진 그 부활의 소망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소망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썩어질 육신을 가지고는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과 같이 부활의 생명을 가져서 영생으로 가는
그것이 성도의 2차적인 소망인 것이다.
사도행전 26장 6~7절
6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7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 12지파가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약속한 걸 바라는 그 소망,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약속이 뭔가?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영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죄에서 해방이
되어서 부활의 생명을 얻어서 인생으로 하여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이 분명한 소망을
말하는 것이다.
디도서 1장 2~3절 말씀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사도 바울은 영생의 소망이다 그랬다.
거짓이 없는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이미 약속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영원히 전부터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시고자
하는 이 약속은 바로 영생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영생의 소망, 영생의 소망이 예수님이 오셔서
그 말씀을 통하여 복음이 전파되어 그것을 전도로 나타냈다.
우리가 복음 전하면서 이제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이 생겼다는 것이다.
영생의 이 소망이다.
이것이 1차적인 소망이 아니고 2차적인 영적인 소망이다.
디도서 3장 7절 말씀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의 소망 때문에 우리가 영생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영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받는 것이다.
영생의 소망이 없고 영생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후사가 되어서 그 기업을 이어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기업을 이어받고 후자가 되는
것이고 이 영생이 성도의 소망이다 그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끌고 가면서 특별히 예수
믿는 우리도 이 세상에서 1차적인 소망이 있기 때문에
당근을 먹여서 끌고 가는 말처럼 우리를 그런 소망 중에
하지만 그 배후에는 각자 우리에게 2차적인 소망으로
각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고 죄에서 떠난 삶을 성황하게
하고 부활과 끝내는 영생을 소망하는 2차적인 소망을
동시에 주면서 우리는 끌고 가는 거지 우리는 1차적인
소망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편 39편 6~7절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어린 시절 목동에서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왕이 된
그 다윗이 일생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그 어린
시절부터 소망이신 그 하나님께 모든 소망을 듣고
지금 살아가는데 그 여러 가지 다윗의 배후에 많은
형편들이 있는데 그 모든 형편에서 다윗도 1차적인 소망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고 더 나가서 2차적인 영적인 소망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는 것을 시편을 통해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13절 말씀을 보니까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이 건강이 회복되는 것은 단순한 1차적인 소망이다.
그런데 그 1차적인 소망을 건강을 회복시키는 것도
하나님의 역사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건강이 회복되는 것으로 다윗이 그것만을 삼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왜 건강을 회복하는가?
죽기 전에 건강하게 회복되어야지 남은 생애를 통하여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성전 건축 준비를 끝낼 것이고
맡겨진 그대로 다 시편을 저술하고 하나님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모든 사명과 그의 일을 이루어가는
이것 때문에 1차적인 소망이 필요했다 이 말이다.
그래서 건강이 회복되고 그것 때문에 건강 회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10절 말씀에 보니까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때가 하나 인생이 교만하고 때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변화를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징책을 한다.
그러니까 다윗도 갑자기 아들 압살롬이 반역도 하고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전부 주님이
치심으로 환경 배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해결이 하나님 손에 있기 때문에
그 모든 현실의 이 모든 삶에 대한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8절 말씀에 보니까
나를 모든 죄과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
않게 하소서
이 다윗은 1차적인 건강의 문제,
주변의 환경에 나타난 모든 진책 받는 거,
다 소망을 죽게 두어서 주님이 그걸 회복시키고
새롭게 볼 것을 믿지만은 또 근본적으로는 모든 죄과에서
나를 던져달라고 말한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다. 그 영적인 소망이다.
2차적인 소망이다 이 말이다.
그 소망조차도 나의 소망이 주님께 있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성도의 삶은 1차적인 소망 안에 끝나는 삶이 아닌 것이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려도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헛된 일에 인생이 다 풍요한 것이다.
아무리 재물을 쌓아도 그걸 누가 취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
재물을 아무리 쌓아도 사용하는 사람은 누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다윗이 1차적인 소망으로 끝나는 세상에 살아야 할
삶이 아니고 2차적인 소망으로 건강 가지려고 하는
그 소망 위에도 사명을 말하는 것이고 죄 가를 해결하여
이제는 영적으로 새롭게 되어서 24장로 반열에 들어가는
그런 영성 준비와 전부 소망은 맞물려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은 1차적인 소망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영적인 소망을 곁들여서 함께 그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의 모든 소망이 하나님 안에서
새로워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오늘 이스라엘 달력으로 하면 금년이 안식년이다.
제가 여러 번 중간 중간 설교 중에 말씀드렸는데
안식년 오늘 마지막 주일이다.
7년마다 돌라오는 이 안식년에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많이 느꼈다.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때이고 교만한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것을 빼앗아서 새롭게 하는 이렇게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는 그런 안식년 마지막 주일이다.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서 다윗과 같이 겸손하게
주님과 나가서 우리의 1차 소망을 다 하나님께 이렇게
아뢰면서 나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 번째 결론으로
이 2차적인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
이 모든 영적인 2차적인 소망의 결론을 성경에서 그것을
안식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안식인 것이다.
본문 가운데 히브리 4장 2절 말씀 이하에 쭉 말씀 보면
이미 복음 전함을 받은 저희들이 믿음에 화합지 못해서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을 이루었다 그러면서 4절에 보면
제 칠일에 관하여는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창세기 2장 2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창세기에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모든 일을 쉬셨다
이렇게 말씀한 그 안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창조를 다 끝나서 안식에 들어가고
일을 안 하신다면 지금 쉬시고 계셔야 된다.
그럼 우리가 지금 안식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다.
이미 창조하시고 안식이 끝났으니까.
하나님이 모든 걸 쉬시니까
하나님이 역사할 필요가 없는 거고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 있어야 되는 거고
우리가 이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전부 안식 안에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창세기 2장
그 모든 창조의 한 주간은 하나님의 설계도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여러 과정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 안식을 주시겠다한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은
이미 창세기에 창조의 한 주간을 통해서
그 모든 걸 보여주시고 이미 결론을 내시고
그 결론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지만
우리의 시공간 안에서는 그게 하나님의 설계도로
여러 단계를 통해서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여 오시면 3개의 단계가
다 지나갈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 삼일은 내가 완전해질 것이다 그랬다.
헤롯이 죽이려고 해도 삼일은 가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천년 왕국 거기서
또 삼일이 지나듯이 3단계를 지나서 6개의 단계가
다 지나가는 그때 영원한 안식이 오고
우린 모두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에 이 말씀들이 제 칠일이 하나의 모형이고
설계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까 우리에게 뭐가 있는가?
4장 1절에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그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여호수아에게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9절 말씀에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랬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 들어가서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의
모형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일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것은
참된 안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의 모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안식이
아직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그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영적인 소망, 부활의 소망,
영생의 소망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우리는 완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완전히 이르는 거기를 우리는 안식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 백성에게 분명히 이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고
이제 안식의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또 있고 이걸 통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11절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육신적인 소망과 더불어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영적인 소망을 따라 우리가 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의 약속, 하나님이 정한 안식일 때, 그게 있는데
거기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된다 그 말이다.
그럼 소망이 없는데 안식에 누가 들어가겠는가?
영적인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구나
안식에 들어가는 힘쓰며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10절 말씀에 보니까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모형으로 보여 진 그 안식의
단계를 따라서 이미 가난한 땅에 들어가고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을 만드는 것처럼 6개의 계단을 다 지나간
사람은 개인적으로 이미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미 완전에 도달한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도 그런 것을 바라보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이 안식에 들어가려면 2절 말씀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 모든 약속에 대해서 믿는 믿음이 없이는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 약속을 붙잡고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며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같이 갈 수밖에 없고
이 소망이 있는 자마다 믿음이 있어야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3절에 이어서 말씀하셨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믿음으로 화합을 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그 말이다.
6절 말씀에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먼저 받던 자들이다.
모형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놓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먼저 그 길을 걸어가게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다 죽지 않았는가?
왜 그랬나?
순종치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면서
우리는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11절에 또 한 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다 믿음도 없고
순종 하지 못하여 멸망당한 것처럼 이것이 본이 되어서
우리도 순종치 아니하면 그 안식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말이다.
그래서 이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선로의 두 가지 평행선에 두 갈래 길과 같은 것이다.
믿음과 순종이 똑같이 가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믿음이 있다면 순종하여 그 삶이
결과로 나타나는 거고 순종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갖다 바쳤다.
그 몸에서 후사가 난다는 걸 믿는 믿음이 있으니까
아무리 갖다 바쳐 죽여도 또 후사가 나올 거니까
약속은 남아 있는 것이니까 그 약속을 믿으니까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순종했다면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이 안식에 들어간 사람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을 가지고 우리는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1차적인 소망이 이제 다 우리에게 필요하다.
건강이 필요한 분도 있고 때에 따라 물질이 필요한 분도
있고 여러 가지 얽히고설킨 인간의 문제를 먼저는
1차적인 이 소망도 주님께 소망을 가지고 가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1차적인 소망이 그걸로 끝나면 그게 아닌 것이다.
1차적인 소망을 통해서 우리는 2차적인 소망도 여전히
주님께 갖고 가서 내가 이 분명한 안식에 대한 소망과
영적인 성장의 소망을 가지고 이 죄에서 나를 해방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는 이 소망들을 가지고 가는데
그것 때문에 걸림돌이 되어서 가지 못하는 장애물이
1차적인 소망이다 이 말이다.
내가 건강 때문에 기도하지 못한다면
내가 건강이 부족해서 하나님 말씀을 보지 못한다면
그 장애물 그것을 해결하여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고
영적으로 더 뜨겁게 되기 위해서 건강이 필요하다
이 말이다.
그러니까 1차적인 소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2차적인
소망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왜 물질이 필요한가?
2차적인 소망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1차적인 소망을 앞세워 2차적인 소망보다
1차적인 소망을 따라 간다는 그것이 기복적인 신앙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배후에는 반드시 우리가 2차적인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구동성으로 주님 올 때가 멀지 않다 하는 이 마지막
때에 우리의 소망 1차적인 소망도 분명히 주님 안에
두어서 하나님 저에게 필요한 거 다윗이 고백하는 것처럼
나 살아 생전에 건강을 회복시켜주시고
나의 모든 진보를 좀 새롭게 해주시고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죄가를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므로 그 사명이 감당이 되어지는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하도록 이렇게 모든 준비를 다
마치게 하고 시편을 다 쓰고 그 살아 생애에 남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다 이루기까지 필요한 것들이
다 주의 소망으로 채워지는 거란 말이다.
우리의 소망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아침에 우리의 1차적인 소망도 하나님께
두고 더 나아가서 거기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도로서 2차적인 나의 소망, 이 세상을 아무리 살아도
이제 우리가 얼마를 살겠는가?
다 썩어 죽는 인생인데 우리에게는 감사하게도
영생의 소망을 주셨다.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는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때부터 이 부활의 역사가 이제 멀지 않아
지금 우리 눈에 진짜 볼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왔다.
지금 우리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그 부활에 동참하여 영생을
가지고 가는 이 소망을 가질 때에 그것이 우리에게
안식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 분명한 2차적인 소망, 영적인 소망이 뚜렷하여 주님
앞에 이런 소망을 가지고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고
이 시간도 살아계셔서 그 안식을 지금부터 매주일 안식을
지키면서 이것이 형식이 아니고 정말 내 속에 이 소망이
이루어지고 안식이 이루어지는 삶을 바라보는
소망 속에서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하는 것이다.
안식년을 왜 지키는가?
종들 빚을 다 탕감해 주고 이제 모든 걸 다 해결해 주는
왜 그걸 하겠는가?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그것을 경험하는 반복적인 훈련으로
그 소망을 자꾸 주는 그것 때문에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하루를 경험하면서 세상일을 다 놓고
오는 그 육신적인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예배 안식이
무엇인가를 맛보고 그걸 소망하고 그걸 경험하고
이것들을 반복적으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고
반복적으로 안식년을 경험하는 것이다.
올해 9월 마지막 주를 통해서 금년 이스라엘 달력으로
안식년의 마지막 주일을 지나면서 안식년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안식일의
의미를 깨달아서 이 안식이 인류 최대의 소망이고
내 개인의 최대 소망이고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며
이렇게 달려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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