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광채
고린도후서 4장 1~6절
"1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
"복음의 광채"라고 하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디오게네스라고 하는 철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의 별명은 거지 철학자이다.
가진 소유가 아무것도 없다.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그런 나무통 하나가 집인데
그 나무통을 굴려 다니면서 그 안에서 먹고 살았던
그런 철학자였다.
그래서 거지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하루는 헬라제국의 왕이고 마게도냐 지방을 군사력으로
잡은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만나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왕이고 상대방은 거지 철학자여서
교만한 마음으로 "내가 좀 뭐 좀 도와줄 게 없느냐?"
그러면서 물었다.
그러니까 이 디오게네스가 생각을 하더니
당신이 내 햇빛을 가리고 있으니까 좀 비켜달라고
난 지금 햇빛이 필요할 뿐이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사람도 그렇고 온 세상의 모든 동식물 생명 전체에는
빛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낮에는 햇빛 밤에는 전깃불을 켜놓고 살아간다.
금년에 비가 많이 와서 일조량이 많이 모자랐다.
그래서 추석 물가가 대단하였다.
이렇게 물가가 많이 오른 것을 체감했는데
이런 물가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려면
생명 운동을 해야 한다.
그 생명운동이 일어나야 살아가는데
그 생명운동이 일어나려면 반드시 빛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식물은 탄소 동화 작용을 한다.
지금 식물이 왜 우리에게 유익한가?
그것은 식물이 탄소동화 작용을 하면서 우리에게
좋은 공기를 갖다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탄소동화 작용을 하려면 빛이 꼭 있어야만 한다.
이 빛이 없으면 식물들은 자랄 수가 없다.
열매 맺을 수도 없다.
그래서 빨리 꽃을 피우게 하기 위해서 하우스에서
꽃을 키우는 농부들은 밤새도록 전등을 켜놓는다.
그러면 이 식물들은 낮인 줄 알고 계속 탄소동화 작용을
하면서 생명 운동을 하여 빨리빨리 꽃을 피운다고 한다.
또한 닭 농장에도 하루에 계란을 두 번 낳게 하려고
밤새도록 빛을 밝혀놓는다.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알을 빨리 낳게 하려
밤새도록 불을 켜놓고 착각하게 만든다고 한다.
이 사람도 빛이 없으면 살 수가 없다.
이 햇빛이 우리에게 비타민을 생성해 주고
우울하지 않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감옥이나 어두운 데 갇혀 있고
빛을 보지 못하면 사람은 죽어가게 된다.
그래서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체는 살아가려면
반드시 생명운동이 일어나야 되는데
이 생명 운동이 일어나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각 사람의 영혼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영적인 빛이 있어야 영적인 생명이 활발하게 일어나면서
우리가 살아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만물의 법칙과 영적인 법칙이 다르지 않다.
그런데 성경은 누가 빛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곧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영원한 생명이시고 빛이신데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이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본문 가운데 6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린도후서 4장 6절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하나님이 그 영광의 빛이신데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예수 그리스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비춰 주셨다.
그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형상을 입고 오신 분이고
그 예수님이 바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갖고 오셔서
하나님의 빛을 우리에게 공급을 해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 공급하는 방법이 곧 말씀을 통해서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이 곧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의 광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광채라고 하는 말은 찬란한 빛을 말한다.
빛의 덩이를 말한다.
단순한 한 줄기 빛이 아니고 이 빛이 산처럼 쌓인
찬란한 그 빛, 본래 빛이셔서 누구도 볼 수 없는
그 하나님은 오직 빚 가운데만 거하시는 분이시다.
그 빛이 이 땅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오셔서 예수님이 말씀,
복음 가운데서 그 하나님의 찬란한 그 영광의 빛 그것을
우리에게 비춰주셨다.
그래서 "복음의 광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그 모든 빛의 산더미라는 의미이다.
빛의 그 모든 모음이고 찬란한 빛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빛이 드러났는데
먼저는 예수님의 삶 그분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빛이 드러났다.
예수님은 얼마나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신가?
예수님은 얼마나 사랑이 많으셨는가?
이것이 다 하나님의 그 온유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하나님의 그 모든 속성을 예수님을 통해서
다 보여주신 것이다.
마리아 발또르따 책에 보면 예수님이 전도여행을 가다가
어느 목수 집에 가게 됐는데 그 목수가 죽었다.
그런데 그 목수가 계약금을 받고 장롱, 신발장과
여러 가지를 짜주어야 하는데 나무만 사다 놓고
그냥 죽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그 가족이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목수 가정에 일주일을 머물면서
예수님은 30년 동안 요셉과 함께 목수 생활을 하셨다.
장롱을 짜고 신발장을 짜서 계약금을 준 사람에게 주고
남은 돈을 받아서 그 목수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생활비로
그걸 주시고 가셨다.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재능을 가지고 목수 생활을 일주 동안 하면서
그 목수 가정을 살려주셨다.
주님이 그 사랑의 속성이 이런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주님이 인격으로 우리에게 먼저
빛의 모습을 보여주셨고 그리고 주님이 전하시는
모든 말씀, 복음이 빛이고 광채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의 그 인격의 빛,
삶의 빛, 이것을 받고 복음을 통하여 주신 그 말씀의 빛을
우리가 받아서 식물이 생명 운동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처럼
우리도 이 빛으로 모든 영적인 생명이 자라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접하지 않고는
영적인 생명이 살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복음 안에 예수님의 그 삶의 모든 내용이 복음을
통해서 나타났고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이 다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고
최종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모든 것을 복음을 통해서 알려주셨다.
그러니까 이 복음을 접하지 않고는 우리가 영적인 생명이
살아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생명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음으로 돌아와야 되고 이 복음을 통하여 나타난
그 빛을 깨닫고 이걸 받아야 된다.
세 번째는,
이 복음의 광채에 이 찬란한 빛이 4절 말씀에 보니까
고린도후서 4장 4절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원수마귀, 세상 신, 공중권세 잡은 사탄이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의 광채를 마음속에 비치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이 사탄과의 싸움이다.
우리의 마음을 계속 혼미하게 한다.
천로역정에 보면 기독도가 미지의 땅을 지나가는
그런 장면이 있는데 그 미지는 미혹의 땅이라는 뜻이다.
미혹을 받아서 자꾸만 졸린다.
그러니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천성을 향해서 가야 되는데 미혹을 받아서 자꾸만 잠이
오는 그런 땅을 지나가게 된다.
그러니까 사탄은 우리를 영적으로 자꾸 잠들게 하고
하나님의 빛을 받지 못하게 하고 영적인 생명을 죽여서
우리를 미혹하게 하고 혼미하게 하여 그 영광의 광채,
복음의 광채를 받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마귀는 여러 가지 환란을 갖다 주고
하나님이 허락한 시험을 받게 하고 핍박을 받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여러 가지 정욕들을 가지고
유혹을 받게 만든다.
사탄은 우리 마음에 그 복음의 광채를 받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차단하고 영적인 생명이 죽어지게 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을 다 타락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트린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방법이다.
마귀가 어떻게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대적할 수가 있겠는가?
택하신 자녀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면서 미혹 시켜
어찌하든지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 작업을 통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마귀의 전술이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7가지 천국 비유 중에
가라지 비유를 특별히 보면 인자라고 하는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 밭에 좋은 씨를 뿌려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데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우리를 혼미케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좋은 씨를 뿌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해서 우리가 천국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일을 계속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시는데 사람들이 잠이 들 때에 이것이 혼미하여
마귀의 유혹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공격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애정과 욕망을 이용해서 우리를 혼미하게 만들고
시험을 받게 만들고 사람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 뭔지를
아는 사탄이 각 사람의 형편을 알고 거기에 맞춰
공격을 하게 된다.
우리는 사람마다 나름대로 취약한 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1~13절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영적으로 잠이 들고 어둠이 일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히 말씀하고 있다.
낮은 햇빛이 충만한 시간인데 낮처럼 그렇게 단장하고
예수님의 그 모든 빛을 받아 그 빛을 따라 살아가야 되는데
어둠의 일은 방탕, 술 취하는 것, 음란, 호색, 쟁투와
시기하는 것 이것이 전부 죄악과 정욕에 연결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랬다.
그러니까 인생이 먹어야 살고 입어야 살고 이러한 의식주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인데 이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면
정욕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복음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이러한 정욕들에만 치우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육적인
생명이 있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육적인 생명은 이 세상 잠시 동안 기껏해야 100년 사는
그런 인생이지만 영원의 생명은 영원히 사는 인생이다.
우리가 이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면 육신의 생명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데 사탄은 바로
이것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잠잘 때 우리는 사탄이 복음의 광채를 다 가리고
혼미케 하여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빛인지,
무엇이 어둠인지 이것을 혼미케 하여서 알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복음이라고 하는 말씀의 기준을
갖지 않으면 분별하지 못하고 다 세상으로 끌려가서
살 수밖에 없게 된다.
네 번째로,
이렇게 복음의 광채를 세상 신 원수, 마귀가 우리에게
비추지 못하게 하는데 우리가 이 빛을 받고 이 빛을
드러내면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본문 가운데 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린도후서 4장 2절
"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드러내고" 그랬다.
이 어둠의 일을 우리는 다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다.
다 부끄러운 그 어둠의 행실 그 양심에 대하여
그 마음을 매일매일 회개하며 성찰하며 자기의
그 부끄러운 행실이 있는 마음을 닦아내야 된다는 말이다.
그래야 복음의 광채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 길거리에 돌멩이를 주어다가 돌멩이도 매일매일
닦으면 반짝반짝 빛이 나게 된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신는 구두도 이 세상 때가 묻어서
더러워지지만 매일매일 닦으면 반짝반짝 빛이 난다.
유리나 보석도 매일매일 닦으면 반짝반짝 빛난다.
고린도후서 4장 7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를 질 그릇에 가졌으니"
예수님이라고 하는 보배 그 예수님의 보석을 우리 마음에
두고 살아가고 그 예수님은 보석인데 우리 마음의 이 보석을
매일매일 닦아내지 않으면 빛을 낼 수가 없다.
여러분 보석도 먼지가 쌓이고 그냥 놔두고
거기에다 땅바닥에 굴리면 지저분하게 되어 진다.
그런데 이것을 매일매일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양심을 성찰하는 것처럼 매일매일 마음을 닦아내는
행실을 해야 빛이 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빛이 드러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대신 닦아줄 사람이 없다.
성경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방법을 알려주고
설교를 들으면서 방법을 배우고 많은 것을 알지만
이것은 직접 내가 닦아야만 된다.
아무도 이것을 해줄 수가 없다.
내 마음에 이 부끄러운 행실을 내가 닦고
내가 행실을 성찰하고 내 자신이 해야지
아무도 해줄 수가 없다.
여러분 그러니까 매일매일 회개하고 성찰한 삶이
나의 이 보배인 빛을 드러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내 생명이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
이 모든 부끄러움 일을 버리고
이것은 내 스스로가 해야지 아무도 대신해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5절 말씀에 보면
고린도후서 4장 5절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고린도후서를 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선포를 했다.
그러면 예수님의 종이 된 사도 바울이 예수님에게만
종이 된 것이 아니고 그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했다고 하였다.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삶을 산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내가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니까 누군가를 섬겨서 종의 모습으로 살아갈 그때에
빛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종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빛이 드러날 수가 없다.
여러분 각자 자신의 위치들을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받은 은사들이 있고 예수님이라고 하는 보배를
받아서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타나서
우리가 여러 지체들을 섬겨 나가야할 각자의 위치가 있는데
그 각자의 자신의 위치를 지켜가며 서로서로 지체를
섬겨 나가면 거기에 빛이 나타나는 된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희생을 전제로 한다.
여러분 빛이 드러나기 위해서 기름이 필요하다.
기름을 태워야 빛이 난다.
가스를 태워야 빛이 나게 된다.
초도 자신의 연료를 태워야 빛이 나게 된다.
무언가가 희생하며 태워지지 않고는
빛을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 자신들도 희생하여 무언가를 태워서 이렇게
섬기지 않으면 빛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나름대로 받은 은사와 각자의 사명과
재능을 가지고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와서 많은 원수 된 죄인들을 섬긴 것처럼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위하여 종이 되고
또 가던 교회마다 내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한 것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빛이고 예수님의 섬김이
빛이었기 때문에 우리도 그런 예수님을 본받고
사도 바울을 본받아서 각 사람의 종이 되는 이것이
우리의 빛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미혹하면서 우리가
겸손하고 낮아지고 종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계속해서 영적인 생명을 죽이기 위해서 이 복음을
전부 가려버리고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우리를
자꾸 복음에서 막아버린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바다 요정 이야기가 있다.
바다의 요정들이 산다고 그렇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데
배가 그 요정이 사는 바다를 지나갈 때마다 요정들이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뱃사람들을 미혹 한다.
이 뱃사람들이 신묘한 그 요정들의 노랫소리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바다에 뛰어들어서 자살하게 하여
죽이고 만다.
이 요정이 있는 바다를 지나려면 뱃사람들이
그 요정들이 하는 노랫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기들도 노래를 불렀다.
그러니까 그 요정에 들려오는 노랫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뱃사람들이 노래를 불러야 그 요정의 바다를
지나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미혹을 더 큰 노래를 부르면서 그 과정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우리가 요정의 바다를
지나가는 거 같은 것이다.
얼마나 많은 요정의 노래들이 우리 가운데
들려오는지 모른다.
tv와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서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런 여러 가지 삶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요정의 바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뱃노래를 더 크게 불러야 되는 것처럼
우리는 찬송을 그보다 더 크게 불러야만 된다.
믿음으로 더 크게 소리 내어 기도하고 믿음으로
그 노랫소리가 묻히도록 보다 뛰어넘는
예배와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그리고 종으로 사는 섬김의 삶과 같은 뱃노래가 아니면
이겨나갈 수 없다.
여러분 영적으로 잠들지 말고 이것과 싸워 이기려면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그 들려오는 세상에 요정의
노랫소리처럼 이 세상 소리를 뛰어넘는
뱃노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찬송을 올리는 것이고
그 노랫소리를 뛰어넘을 만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약화되면 그 노랫소리에 전부 바다로
뛰어 들어가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이 다 죽어 쓰러지고 만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우리가 천국을 가고 어떻게 우리가
빛이라는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든지 이겨보려고 하는 예배로의 몸부림,
어떻게든지 그걸 이겨보려고 하는 기도의 몸부림,
어떻게든지 이겨보려고 하는 찬송의 몸부림
이것이 뱃사람들의 노래와 같다는 것이다.
그래야 이 과정을 뛰어넘어 갈 수 있다.
그래서 악에 지지 말고 이제는 자다가 깨어날 때가
된 것이고 이제는 미혹을 받을수록 정신을 차리고
싸워 이겨나가야 된다.
이런 의미를 가지고 9월 달 우리는 섬김의 달로 정하였다.
이번 9월 달은 가족은 가족 간에, 교회 안의 지체는
지체로서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이 이 땅에 종으로
오셔서 더 섬기려고 오셨던 것처럼 그 예수님의 빛을
본받아서 우리도 종으로 섬겨나가는 그 섬김의 삶을 통해
빛을 드러내면 이 빛 가운데로 나갈 수가 있게 된다.
우리가 높임을 받으려고만 하고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면
결코 우리가 그 빛에 이를 수가 없다.
어찌하든지 예수님처럼 섬기고
어찌하든지 종이 되려고 하는 이 사도 바울의
태도와 같은 이 마음을 가지고 나갈 때
우리가 빛이 될 수가 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이 복음의 광채가 정말 드러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이 어두운 온 세상이 새벽에 오기 전에 가주 어두운 것처럼
주님이 오시기 전에 이 죄악 세상이 가장 어두운 지금
어떻게든지 복음을 통하여 이 빛이 드러내기를 주님은
간절히 원하시는데 이 마음속에 보배이신 주님의 빛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매일같이 닦아내지 못하니까
예수님과 같은 종의 삶을 살지 못하니까
우리는 그 빛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찬란한 광채는커녕 한 줄기 빛도 들어내지 못하고 살게 된다.
이것이 어둠의 자식이고 마귀의 자식이지 우리가 어떻게
빛의 자녀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 요정의 노래를 이겨보려고 하는 그 예배의 몸부림이
얼마나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에게 그 찬송과 기도로 어떻게든지 이것을 이겨보려고
어떻게든지 섬겨서 이 빛을 드러내고
어떻게든지 세상 요정의 노래를 이겨보려고 하는
그런 몸부림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이고 빛의 자녀고
우리가 어떻게 천국 간다고 누가 보장을 하겠는가?
아무도 해 줄 수 없다.
9월 한 달 섬김의 달인데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빛으로 오셨다.
그 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을 다시 한 번 살피고
복음에 나타난 우리의 삶 복음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
살피면서 여러분이 모든 말씀 가운데서 이 빛을 드러내서
정말 이 시대에 찬란한 빛으로 광채와 같이 드러날 수 있는
그런 지체들과 그런 공동체 교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이 아침에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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