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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인 예수님과 바울” -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라!(I) - I. 왜 히브리적 사유체계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설교자가 설교준비 하기 위하여 설교본문을 분석하고 해석할 때, 가장 거침돌이 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설교자의 예비지식이나, 성경의 원어에 대한 지식, 혹은 설교자의 성경해석 능력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오히려 2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설교자뿐만 아니라, 신학자 그리고 일반평신도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오히려 독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 전이해, 혹은 사유체계’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유체계’와 독자가 가지고 있는 ‘사유체계’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사유체계는 ‘히브리-셈적’ 사유체계 혹은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전통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 혹은 사고방식을 갖고 성경을 읽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유체계는 서로 아주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지중해 연안과 팔레스틴 및 고대 근동을 점령한 이후로는 유럽 문화사에 두 가지 사유체계가 혼합 내지는 종합 - 때로는 히브리-셈적 사유체계가 상당부분 그리스 사유체계와 융합 혹은 모형변형(Paradigmawechsel) 양식으로 - 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많은 학자들은 ‘헬레니즘 기독교’(스토아 철학과 신(新)-플라톤주의, 그리고 Lxx(구약성경의 70인 번역본)의 출판,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에 의한 성경의 최초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 혹은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라고 특징지어 말한다. 예컨대 이러한 점을 불트만(R. Bultmann)은 ‘기독교의 헬라화’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교리사와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 그것이 어느 쪽이든 - 사람들에 의해서 신학적 논쟁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은 학자는 두 사유체계를 아주 잘 종합 또는 융합하여 ‘보편적 교회'(catholic church)의 신학을 기초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러나 반면에,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서로 그들 자신들의 일면적인 진리만 주장한 나머지, 그 중 어느 한파가 학문의 장에서 퇴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예컨대 ‘안디옥’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신성과 인성)을 분리시켜 ‘인성’을 강조한 반면에,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혼합시켰다. 그래서 초기 보편적 교회는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배척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기본요소만 진리로 수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양성을 기독교의 교리로 선포하였다.(451년 칼케톤 신조에서 예수는 참신 참인간(vere deus, vere homo)라고 고백하였다) 그런데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종교개혁과 문예부흥(Renaissance)을 통하여 그리스-인도 게르만적, 바꾸어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체계에 기초하여 발전된 중세 스콜라(Scholar) 철학적 신학에 반기를 든 히브리-셈족 사유체계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예컨대 미켈란제로의 동적(動的) 조각품은 조화된 고전적 그리스 조각품과 비교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의 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이 서로 비교되었다. 즉 미켈란제로(Michelangelo, 1475-1564)의 동적 조각품은 조화를 강조하는 그리스 고전적 조각품을 대신하게 되었고, 칼릴레오의 물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을 대신하게 되었고, 루터의 하나님 중심의 신학과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개혁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시작하여 토마스 아퀴누스(Thomas Aquinas, 1225 - 1274)에 이르는 그리스 철학적 신학을 대신하게 되었다. 즉 루터의 사상과 종교성은 가톨릭교회의 시각적 관조적 경건성에 반하여, 다분히 동적이고 청각적이었다는 점에서 히브리-셈적 사유체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는 - 신학자, 목회자 그리고 평신도를 막론하고 - 대부분 어느 사상이 히브리-셈적이고, 어느 사상이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인지를 세심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문화 혹은 서양사상 - 더 자세히 말하면, 그리스-인도게르만적 사유체계로 교육받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자신의 교유한 ‘사유체계’를 - 대부분 도덕적 혹은 인과응보적(因果應報) 사유체계를 - 가지고 성경을 읽고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증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 가능한 한 그리고 필수적으로 -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서 증언하고 있는 인물들의 - 예컨대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에 이르기 까지 - 사유체계에서 성경의 증언을 읽을 때, 성경의 증언하는 바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그리스적 사유체계와 히브리적 사유체계가 서로 종합 혹은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성경이 증언하고자 하는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히브리적-셈적’ 전통의 사유체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의 저자들은 모두 히브리인이요, 신약의 저자들도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모두 히브리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의 사유체계’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히브리적 사유체계 혹은 인지구조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2010. 8. 21. 山下연구소: 연구교수 김재진 박사 |
출처 : 山下 연구소
글쓴이 : solomo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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