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하나님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7~8)
주님의 沈黙(침묵) /황보 윤
주님의 沈黙(침묵)에
고뇌와 방황의 나날이.....
適者生存의 치열한 現實속에
罪人의 믿음은
할 말을 잃습니다.
한순간 빛을 보기를 원했던
작은 기대와 소망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고
여기 저기 외치는
간절한 기도의 合掌마져도
무색케 합니다.
믿음이 무엇이뇨?
사시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뇨?
상한 갈대 같은 맘이
지치고 피곤합니다.
때를 만난 듯 활개치는 자는
주의 사랑하는 자를
강물로 삼키더니
이젠 내 靈魂까지도
불신과 두렴에 떨게 합니다.
보이는 것 없이
야속한 세월은 가고
반복하여 육신과 안목의 정욕에
굴복 당하는 이 몸은
人生의 무력함에
말없는 歎息을 합니다.
失敗의 아픔과 孤獨에 묻혀서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는,
거친 골고다를 묵묵히 오르시는
주님의 눈에 맺힌 다이아.
채찍의 아픔 속에
간간이 하늘로 치켜든
주님의 얼굴에서
燦爛(찬란)한 太陽을 받아
불굴의 信念으로
빛나는 소망입니다.
주님의 沈黙(침묵)(침묵)에
가슴 조이고 애태웠던
지난 날들이 이제는
주님의 침묵의 偉大性을 깨닫고
나도 沈黙(침묵)하며
주님의 길을 새겨 가렵니다.
이 시를 카스토리 페북에 올렸더니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습니다. 중국의 김효주 선교사님은 학창시절에 벌써 이런 수준의시를 썼다는 것이 놀랍다고 용장 밑에 약졸이 없다고 칭찬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침묵에서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침묵도 역시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부분적으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을 주셨고, 우리가 알게 모르는 사이에도 수시로 응답을 주시지만 때로는 침묵이라는 총체적인 응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응답이 아닌 우리 자신을 위한 주님의 응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은 얼마나 훌륭한 믿음의 소유자였습니까?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자 더라 하였습니다(욥 1:1) 하나님도 인정하시기를 참소하는 사단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내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정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떤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 그런 그가 사단의 시험으로 순식간에 많은 시련을 당합니다.어느 날 갑자기 종들이 사고로 죽고, 자녀들이 죽고, 갑자기 재물이 파손되고, 몸에는 욕창이나고 심지어 아내마져 저주하고, 친구들도 그를 정죄합니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시련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욥 2:10). 그러나 왜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하는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친구들은 번갈아가면서 그가 잘못했으니까 그런 것 아니냐고 지적하며 회개하라고 하지만 욥은 “내게 가르쳐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 하리라”고 합니다(욥 6:24).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욥의 심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7~8)
도대체 왜? 그러나 다음 고백을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나의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하나님은 욥을 정말 사랑하시고 정금같은 사람으로 빚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롭고 정직하고 진실해도 인간의 기준의 의는 더러운 옷과같다고 성경은 말 합니다. 훌륭했지만 더러운 불순물이 들어잇는 금과 같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다 들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주권을 이정하지 못하는 의로운 마음, 근본 기초도 모르면서 하나님께 따지는 어리석은 죄가 다 들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흐리게 하였다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진정 인정하시는 의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 침묵의 기간 속에서 우리 자신의 깊은 허물이 들어나고 걸어져지고, 연단되어지고 정금처럼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으로 빚어질수록 그런 침묵의 기간이 길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75세에 말씀을 좇아 순종하여 떠난 그의 순종의 믿음은 대단합니다. 그렇지만 약속은 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은 침묵만 하십니다. 막상 하나님의 침묵 속에 들어와 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문제, 속이고 거짓말 하는 문제, 믿지 못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후사를 세우려하는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이 들어납니다. 하나님이 10년이 지나도 자식에 대한 응답을 주지 않자 이스마엘이나 첩을 통해서 아들을 낳고자 합니다. 25년 후에나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사라가 90세로 절망적인 순간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들을 주십니다. 그리고 아들 이삭으로 인해 온통 마음이 빼앗길 때 그 독자를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이 그런 오랜 기간을 끌며 침묵하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로소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 복의 근원이 되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고자 하셨던 것입니다(창 22:14). 그 침묵의 기간은 사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가는 기간 이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에서 건저낸 운명을 딛고 일어나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온갖 애굽의 혜택을 받고 자랐지만 동족 편에서 서서 도와주다가 오히려 배신을 받고 하루아침에 광야로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모세가 나이 사십 세 되던 해였습니다. 그는 어절 수 없이 미디안 광야에서 양 똥을 치며 무료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믿음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았고, 하나님 역시 광야에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양똥 치며 40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얼마나 긴 세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답이 여기에 나옵니다. 민수기 12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모세는 애굽의 학문에 능통하고, 장차 민족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었지만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순간의 감정 싸움에 휘말려 애굽인을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해방의 때에 맞춰 그 동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온유한 사람으로 빚으셧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40년 침묵은 그냥 시간만 지난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이같이 온 유한 사람이 되기까지 모세 자신에게 응답되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나 여러분들이나 다 이러한 기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내가 구하는 것을 얻는 것보다 나를 변화시켜주시는 것이 더 큰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도무지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지 않고 기도의 응답을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 같고, 마치 때로는 무관심 속에 버려진 것 같은 때 어떻게 처해야 합니까? 그 때도 끝가지 인내로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요셉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은 12 형제 중 11번째 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비존의 꿈을 꾸었습니다. 한번은 꿈에 밭에서 곡식단을 묶더니 요셉의 단은 일어서고 형들의 단을 그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였습니다(창 37:7), 또 한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였습니다(창 세기 37:9). 형들은 이런 꿈을 인해서 화가 나고 요셉을 미워하였지만 야곱은 마음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에 두신 하나님의 비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던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라는 야곱의 심부름을 갔다가 하루아침에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가 됩니다. 그는 형들을 중오하거나 주어진 처지를 한탄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보디발의 집을 위해 주인이 인정 할 정도로 충성스럽게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보디발 여사에 대한 억울한 강간 누명을 쓰고 옥에 들어가게 되지만 역시 요셉은 또 참으면서 옥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간수들을 돌봅니다. 거기서도 인정받아 간수장이 되고,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을 섬기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요셉의 꿈의 해몽을 받은 맡은 관원장이 복귀하게 되었을 때 이는 요셉도 명예회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만 술 맡은 관원장이 복귀한 후에 죄수 요셉을 잊어버립니다. 요셉은 또 정처 없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렸습니까? 마침내 하나님의 침묵이 깰 때가 되어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105장 17-19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언제까지 입니까? 말씀이 응할 때까지입니다.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 하나님의 침묵은 그를 단련하며 빚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두신 뜻을 위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때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요셉처럼 조용히 믿음으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지기 위해서 자기 성찰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환경을 탓하고 운명을 탓하며 부정적 생각 속에 허송세월을 보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0: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22절에,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
결론적으로 때가 되면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때가 되면 주님은 약속대로 오십니다. 겉으로 보는 세상은 마치 더딘 것 같고, 달라진 것이 없고 옛 날 그대로 인 것 같지만 말씀이 응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두신 계획이 이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까지 주님이 오셔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할 때 까지 저와 여러분 모두 요셉처럼 현실을 충실하며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주님이 하십니다" 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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