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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와 경건주의 운동
들어가는 말-하나님을 체험하자
신구약 성서시대의 성도들과 2천년 기독교회를 빛냈던 신앙의 위인들이 추구했던 신앙생활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성경과 기독교회사를 면밀히 연구해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잠9:10;호4:1,6,6:3)이라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하여 성화 되어 간다. 성화는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롬8:29:갈4:19),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요17:3;벧후1:2,3).
'알다'(know)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하는데, 이는 이지적(理智的) 차원이 아닌 살아있는 인격적 만남(personal relationships)을 통해 아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히브리적 사유에서 파생된 헬라어의 '기노스코' 역시 "추측이나 억측이 아닌 실상 그대로 대상을 파악하는 것"(to see things as they truly are; it is removed from opinion or speculation)을 뜻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 응답과 절대적인 순종을 포함한다. 이러한 응답과 순종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이웃사랑으로 표출되는데, 이 표출된 인격과 행실이 바로 빛인 것이다(엡5:9;요일2:10). 이 빛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마5:13-16).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선조들은 고난과 역경을 통과하며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고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하여 인간들은 과거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방향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1-18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새로운 각도에서 하나님을 경험케 하고 그의 신앙 인격을 발달시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연단 하시는 기록이 나온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이란 누구나 자신이 직접 경험한 범위 안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고 순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부어주신 모든 축복을 상기시킨 후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이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믿음에 대한 시험이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아브라함이 경험했던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God Almighty)이었다. 이 '전능한 하나님'의 체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들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믿음을 통하여 아들을 얻은 사건을 통해서였다(롬4:19-22). 아브라함은 이런 위기 가운데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을 과거에 경험했기 때문에 히브리서 11:19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에서 "생각하다"는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확신을 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번 사건에서 새로운 측면으로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경험시키셨다. 즉 이삭 대신에 하나님이 숫양을 예비하신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The Lord will provide, 여호와께서 돌보시며 도와주신다)를 경험한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성도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실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로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을 맛보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다.
1.기독교 신비주의-하나님과의 합일 추구
기독교 영성은 신비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영성가들 혹은 사상가들을 신비주의자들(mystics)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신적인 감정주의나 이적을 추구하는 그런 신비가들이 아니라, 믿음의 바탕 위에 높은 지성과 신적 지혜를 동반하는 관상적(觀想的, contemplative) 신비가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의 이성이나 인식 능력은 너무도 한정되고 유한 하기 때문에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영원의 세계를 바로 알기에는 너무도 미약하다.
따라서 이러한 절대자 하나님과 영적 세계를 올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일상적인 인식 방법이 아닌 자아와 영혼의 정화·초탈·단순화·집중화·내면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이러한 하나님 경험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는데, '신인합일'(神人合一)과 '신인식'(神認識)이다. 즉 기독교 신비주의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앎'과 하나님과 '합일'을 동시에 추구하는 신비주의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비주의는 영성가들의 특성과 강조점에 따라서 다음 다섯 종류로 나누어진다.
①하나님 신비주의(God-Mysticism, 사도 요한)
②영혼 신비주의(Soul-Mysticism, 히포의 어거스틴)
③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Mysticism, 사도 바울)
④자연 신비주의(Nature-Mysticism, 떼이야르 드 샤르댕)
⑤사랑 신비주의(Love Mysticism, 성 버나드·성 프랜시스)
1)카톨릭 신비주의자들
(1)클레르보의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1090-1153)-사랑의 신비
①생애
버나드는 12세기 위대한 영성 신학자이며 실천적 지도자로 기독교 영성사에 있어 '사랑'에 근거한 '사랑-신비주의'를 확립시킨 분이다. 그는 프랑스 디용 근처 폰테인에서 귀족의 자제로 출생했다. 20세까지 교육 받고, 21세에 폐허된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깊은 회심 체험하고 헌신을 서약한다. 1112년 씨토 수도원에서 엄격한 훈련 받고, 1115년 프랑스 남쪽 클레르보에 수도원을 창설하고 1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일생동안 신학교육, 저작, 교단 정화, 봉사 등에 헌신하였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고위 성직에 대한 권유와 교황 추대설까지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 작은 수도원에서 원장으로 일생을 마쳤다.
②중심사상
버나드는 어거스틴과 안셀름의 입장인 신앙과 이성의 협력과 조화를 인정하면서도 종교적 지식에 있어서 영적 체험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심오한 종교적 진리들은 이성이나 신앙보다 더 깊은 인식의 차원인 내면적 체험에 의해 알려진다. 그는 신인합일의 경험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 하나님 체험의 3단계-인간의 하나님 체험 인식 3단계
㉠세상적인 사물로부터의 초탈, ㉡자기 비움, ㉢신인 합일을 통한 신적 사랑으로 하나님의 실재를 직관하는 일. 이때 영혼은 합일에 의한 신적 사랑의 불꽃으로 죄와 더러움은 불태워지고, 양심은 정화되며, 영혼은 변화되고, 지성은 밝아져 신적 신비를 파악하게 된다.
#그리스도에 대한 입맞춤 상징-인간의 영적 성장단계
㉠발에 입맞춤: 정화의 단계(purgative, 求道·회개·기도생활)
㉡손에 입맞춤: 영적 조명의 단계(영혼의 밝아짐,illuminative, 묵상·관상생활)
㉢입술에 입맞춤: 영적 합일의 단계(unitive, 사랑의 극치)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
㉠하나님은 진·선·미·애의 근원으로서 그분 외에 더 사랑해야할 대상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보다 자신에게 더 유익한 일이 없다.
#사랑의 4단계-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
㉠자신을 위한 자기 사랑(이기적 사랑)
㉡자신을 위한 하나님 사랑(하나님 사랑 이면에 자기 사랑이 숨겨져 있음)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 사랑(하나님 사랑 경험한 후 무조건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완전히 지배된 사랑)
(2)아빌라의 테레사(St. Teresa of Avila,1515-1582)-기도의 신비
①생애
테레사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재능에다 미모까지 겸비한 테레사는 13세에 어머니를 잃었으며, 건강이 악화되어 많은 고통을 겪었다. 회복 기간동안 테레사는 영성가들의 글을 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영성 생활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1536년 21세때 드디어 갈멜회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건강의 악화로 사경을 헤매는데, 고통 속에서 기도 중에 여러 차례의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그녀는 더 깊은 기도생활을 위하여 1562년부터 폐쇄적인 수도원 16개를 설립했으며, 1567년 테레사는 27세 연하의 십자가 성 요한을 만나 영적 갱신 운동을 함께 행해 나간다. 테레사의 영성은 주로 관상적 기도에 의한 신인합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과 사랑, 목적의 단순성, 내면적 자아의 발견, 그리고 겸손과 사랑 실천 등에 집중되어 있다.
②중심사상
# 기도의 정원에 물주기 비유-정원은 우리 마음의 심령 밭
㉠두레박으로 물주기(정원이 메말라있어 고통이 따르지만 인내하고 포기하지 말라)
㉡물레를 이용하기(기도의 진미를 알기 시작하며, 영혼이 위로와 기쁨으로 채워진다)
㉢시냇물로 물주기(이것은 기도의 수동적 형태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원리 터득)
㉣소낙비로 물주기(하나님과 만나는 황홀을 경험하고 세상쾌락을 경멸하게 된다)
# 내면의 성-영혼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계신 방에 접근하는 과정
㉠첫째 방(인간 타락으로 영혼 안에서 선과 악이 함께 싸운다)
㉡둘째 방(참회와 신앙의 정진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다)
㉢셋째 방(세상적 관심사를 끊고 시험과 고통을 이기는 인내를 이룬다)
㉣넷째 방(시련은 크지만, 영혼은 깊은 명상을 통해 영적 환희를 맛본다)
㉤다섯째 방(영혼은 하나님과 기도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
㉥여섯째 방(영혼이 하나님과 영적 약혼관계를 가지며 극치의 황홀 경험한다)
㉦일곱째 방(영혼의 하나님과 영적 결혼 상태, 성삼위 하나님을 참 인식한다)
(3)십자가의 성 요한(St. John of the Cross,1542-1591)-부정의 신비
①생애
뛰어나게 지적이고 시적이며 신비적 영성가인 요한은 16세기 후반에 스페인에서 활동하였다. 요한은 1542년 아빌라에서 동북쪽으로 30km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몹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요한이 3살 때 사망하였고, 어머니는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배척과 냉대와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 요한은 뛰어난 지성 때문에 독지가의 도움으로 학교교육을 받았다. 21세 때에 그는 갈멜 수도회에 입회하였고, 다음 해에 살라만카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1567년 성직 안수를 받는다. 바로 그 해에 아빌라의 테레사를 만난다. 테레사의 간곡한 권유로 개혁운동에 동참하였고, 개혁 반대파의 심한 박해를 받아 많은 시련과 고통, 투옥까지 당하였다. 요한은 1571-72년과 1579-82에는 갈멜 수도회 계통의 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1582년에는 그라다나의 수도원 원장, 1588년에는 세고비아의 수도원 원장직을 역임하였다.
②중심 사상
# 영혼의 어두운 밤-부정(否定,無)의 신비신학(apophatic mysticism)
요한의 영성 핵심은 '어두운 밤'(Dark Night)의 개념에 집중되어 있다. 이 어두운 밤의 개념은 한편으로 초월자에 대한 인간 지식의 한계성과 무지함을 나타내며, 다른 한편 캄캄한 밤에는 낮에 가능한 구별이 다 정지 되듯이, 인간의 모든 생각과 감각, 욕망 등의 정지와 정화를 뜻하는 전적 자기 부정과 자기 포기의 '부정성'(negativity)을 나타낸다. 따라서 요한에게 '밤'은 신적 인식을 위해 세상적 욕망과 욕구들을 잠재우고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며,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이고도 물질적인 인식에서 떠나 참된 신적 어두움(신적인 빛은 무지한 인간들에게는 어두움으로 보임)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이다.
㉠자기 이탈을 위한 인간의 능동적 정화(Purification, ⓐ감각의 정화 ⓑ영의 정화: 이성의 정화-믿음; 기억의 정화-희망; 의지의 정화-사랑)
㉡하나님의 조명에 의한 은총의 수동적 정화(Illumination, ⓐ감성의 어두운 밤 ⓑ영성의 어두운 밤)
㉢하나님과의 합일(Union,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과 은총에로의 진입)
2)개신교 신비주의자들
(1)카스파르 쉬벵크펠트(Caspar Swenkfeld,1489-561)
그는 경건한 귀족 출신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을 열심히 지지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이끄는 단체가 내적이며 신비적인 신앙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루터파와의 관계가 멀어졌다. 즉 그는 내적인 성령의 음성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시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중생이란 심령 속에서의 성령 역사이며, 은혜의 역사도 성령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에, 물세례나 성경 말씀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쉬펭크펠트는 모든 외형적 교회의 구조를 반대하였다.
(2)야곱 뵈메(Jacob Boehme,1575-1624)
표면상으로 그는 루터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적 생활과 정신은 기성교회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1600년의 어느 날 광명한 빛 속에서 영혼의 문이 활짝 열렸을 때 일찍이 아무 책에서도 가르침을 받아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종종 환상과 계시를 받으며 며칠 동안 하나님의 빛 가운데 파묻혀 있기도 하였다. 그의 심오하고 추상적인 많은 저서는 여러 사람들에게 큰 감화를 끼쳤다.
(3)조지 폭스(George Fox,1624-1691)-형식주의 배격
①내적인 빛을 찾아서
폭스는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명목상으로는 영국국교회 신자였으나 신앙은 청교도적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떻게 순결하게 살 수 있는가를 배웠다. 11세쯤 되었을 때 그의 심령을 하나님께 의탁하면서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폭스가 19세 되던 때에 세상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생애를 바치기로 결단한다. 그는 구두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술을 마시는 습관이 있는 이름만의 기독교인들이 폭스에게도 함께 술마시자고 초대하였다.
그는 이 말에 충격을 받고 명목뿐인 기독교인들과 관계를 끊고 홀로 하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고민하며 많은 성직자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실망만 더하고 결국 23세가 되던 1646년 홀로 하나님 앞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그는 신앙생활에 내적인 빛이 얼마나 필요하고, 또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②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폭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계시를 받았고, 영적 생활에 큰 진보를 이루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어 외형적인 예배형식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성경을 소중히 여겼으나, 성령의 역사를 더 중요시하였다. 그는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케 한 성령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다음 해에 순회 전도자로 일을 시작하여 40년간 저술과 전도로 자신의 확신을 전파한다. 그는 완전한 영적 승리가 성령의 내재하심에 있기 때문에 이름만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체험하라고 설교했다. 그리고 예언자다운 열정을 가지고 부도덕한 행실과 교회의 악폐에 대하여 내리실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선포하며 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였다.
③하나님 앞에서 떠는 사람들-폭스가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맨스필드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주님의 능력이 강하게 임하여 집이 흔들리는 듯했다. 흔히 폭스는 국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여 예배 끝날 때 권고를 했는데, 이런 그를 신부들은 퀘이커파라 부르며 조롱했다. 그런데 주님의 권능이 어찌나 강하게 임했는지, 신부까지도 떨기 시작했다. 또 한번은 어느 목사가 설교하고 있는 도중에 일어나 성경을 옳게 이해하려면 성령의 내적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이처럼 공중예배를 방해한 죄로 종종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그는 조롱 당하고, 돌과 몽둥이로 매맞으며 옥에 자주 갇혔다. 그러나 그는 모든 고난과 핍박에도 무릎 쓰고 놀라운 인내력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전파하였다. 그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진실 되어야 하며 변화되고 헌신된 생활로 그 진실함을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4)로버트 바클레이(Robert Barclay,1648-1690)-퀘이커파 교리 체계화
①우회파
폭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추종자들도 많은 박해를 받았다. 어떤 때는 4,500명의 퀘이커파 신도가 옥에 갇혀있기도 했다. 그 가운데 245명이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폭스의 추종자들은 "빛의 자녀들"(Children of Light), "진리의 자녀들"(Children of Truth), "진리회"(Society of Truth)라고 불렸고, 후에 "우회"(友會, Society of Friend)라고 부르게 되었다. 1660년에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폭스는 퀘이커 자유교회(Quaker Free Church)를 결성한다.
②로버트 바클레이
바클레이는 퀘이커의 교리를 체계화하였다: ㉠각 신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직접적인 교훈과 내적 광명은 매우 중요시한다. ㉡외부적 의식은 중요한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세례와 성찬 등 외형적 의식을 배제한다. ㉢신자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므로, 특별히 안수 받은 교역자가 필요 없다. ㉣특별한 형식을 갖춘 예배의식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 ㉤여자도 남자와 다름없이 설교할 수 있다.
(5)임마누엘 스베덴보리(Immanuel Swedenborg,1688-1772)
성경의 영해 스웨덴에서 태어난 스베덴보리는 저명한 과학자였는데, 그가 55세 되었을 때 계시를 받고 영의 세계가 열렸다. 그 이후 세속적인 학문과 활동은 단념하고 자기가 경험한 계시를 책으로 저술하는 데 전념하였다. 그는 특히 성경을 모두 영해(靈解)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이 1757년에 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며, 1771년에 계시록에 예언된 새예루살렘이 세상에 임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던 1772년에 새예루살렘교회가 창설되었다.
(6)요한 다비(John N. Darby,1800-1882)-플리모스 형제단
①다비
19세기초 영국국교회 신자들 중에 교파주의·형식주의 등을 반대하는 단체들이 여기저기 일어났는데, 이들 단체의 지도자가 다비였다. 그는 법관이 될 목적으로 공부했지만, 전도에 소명감을 느껴 법관생활을 떠나서 아일랜드의 성직자로 안수를 받았다. 2년 동안 순회전도를 하였는데 교회의 상황이 개탄스러워 사직하고 만다. 다비는 1872년에 한 단체에 가입하였는데, 이것이 플리모스 형제단이었다. 이 단체가 형성된 배경은 그 당시 교회들이 성도들 간에 참된 우애가 없었으며, 교회 예배는 형식적이고 생명력이 없었다. 특히 설교자들의 설교는 대부분 회의론과 합리주의, 고등비평에 찌들어 있었다. 그래서 진실된 성도들이 초대교회의 영성을 추구하며 모임을 결성한 것이다.
②형제단의 특색
교리적으로는 이 형제단이 성경의 모든 기본적 교훈을 옹호했다. 또 교회 조직은 우회파처럼 안수 받은 교역자가 없다. 이들은 조직된 교회가 없고 성령께서 모임을 주관하시고 모든 계획과 활동을 주관하신다고 믿는다.
특히 전도사나 선교사에게는 일정한 봉급이 없으며, 어떤 직업을 갖거나 직접 주님을 의지하여 자급해야한다. 이들은 예배 때에도 헌금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교회나 신하교도 없지만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있다. 현재 56개국에 약 1000명의 대표자들이 목음을 전하고 있다. 이 파가 배출한 저명한 성경학자와 설교가는 조지 뮐러(George M ller)·윌리엄 케리(William Kelly)·매킨토쉬(C.H. Mackintosh)·무어하우스(Henry Moorhouse) 등이다. 무어하우스는 수백만 명의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무디(D.L. Moody)의 심령을 움직인 사람이다. 그리고 뮐러는 고아들의 아버지로 유명하다. 이처럼 영적인 지도자들은 주로 형제단 신자들의 저서와 그들과의 개인적 접촉을 통하여 받은 감화로 큰 영향을 받았다.
2.기독교 경건주의-청빈한 삶의 실천 추구
A.카톨릭 경건주의 운동
1)잔센주의
17세기 카톨릭교회는 경건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정화되어가고 있었으나, 프랑스에서는 오히려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교회가 영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국왕이나 귀족들과 함께 국고 수입을 공유하며 호화롭게 살았고, 로욜라의 후예들인 예수회 소속 사제들은 군주들의 마음을 달래주는데 급급했다. 따라서 고해담당 신부들은 진정한 회개 없는 용서를 남발하였다.
이러한 '사죄의 남발'에 대항하여 카톨릭 진영 안에서 '잔센주의'(Jansenism)가 일어났다. 이 운동의 주창자인 코넬리우스 잔센(Cornelius Jansen,1585-1638)은 대학에서 공부할 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인해서만 사죄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어거스틴의 사상을 재발견한다. 그는 성직자들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성경이 밝히는 기본 원리를 벗어나 죄를 너무나 폭넓게 허용하는 예수회의 도덕 기준을 개선하려 하였다. 이 운동은 카톨릭교회 안에서 급속도로 전파되어 갔다.
2)파스칼
예수회가 이런 비판에 대하여 로마 교황에게 잔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였다. 이는 카톨릭 제복을 입은 칼빈주의라고 비난했다. 이때 잔센주의를 변호하고 나선 사람이 젊은 과학자요 뛰어난 문장가였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겨우 세 살 되었을 때 세상을 떠났다. 파스칼이 27세 되던 때에 파리 수학자들의 숭앙의 대상이 될 정도로 수학과 과학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런데 파스칼은 1646년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그를 치료했던 두 의사는 열렬한 잔센주의자였다.
파스칼은 의사를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이며, 성경이 이러한 인생의 현실에 대하여 얼마나 심오하게 설명하고 있는지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파스칼은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고, 1651년 그의 부친이 사망하자, 절망가운데 빠졌다가 요한복음 17장을 통하여 놀라운 신앙체험을 한다. 그리고 잔센주의를 변호하며 1657년 드디어 기독교의 정당성을 증명할 기독교 변증학에 대한 저술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의 생전에 원고를 완성치 못하고 1662년 39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사후 친구들이 신앙과 이성을 논한 그의 단편 메모들을 발견하고 8년 후 『팡세』(Pensees)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명상록을 통하여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들의 비극을 절묘하게 묘사했으며, 진리를 위한 정열로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였다.
B.개신교 경건주의 운동
1)역사적인 배경
종교개혁 시대 이후의 프로테스탄트 시대를 흔히 정통시대라고 부른다. 이때에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라기보다 교리로서 취급되었으며, 기독교는 심령의 올바른 상태를 강조하기보다 옳은 사상의 종교라고만 생각하였다. 소위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 혹은 '신앙 고백 주의'(confessionalism)라 불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다시 말해 지성의 독단아래 신앙을 지성의 유희로 보고, 학자들이 정리한 교리들을 지성으로만 인정하는 신앙 형태가 나타난 것이다. 그 결과 신앙은 생명을 상실하고 전도의 열성도 침체하게 되었다. 그래서 개신교는 무기력한 정통파 우상화로 전락하여 몰락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에 개혁자들의 영성을 계승하고 완성시키고자 하는 운동이 17세기와 18세기에 일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경건주의'(Pietism)운동이다.
2)사상적 배경
경건주의는 신비주의의 토대 위에 서있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하나님을 심령 속에서 경험함을 초점 두고 있다면, 경건주의는 인간 심령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함과 함께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중점을 둔다. 즉 경건주의의 주요한 목표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답게 만들어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가 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신비주의와 경건주의는 모두 생명 없는 정통주의에 대항하여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경건주의의 시발은 16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청교도들의 경건하고 청빈한 삶의 실천운동을 비롯하여, 17세기와 18세기의 독일을 중심으로 한 루터교와 개혁교회 안에서 일어난 경건의 실천운동과 교회의 영적 갱신운동을 들 수 있다. 이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의 웨슬리에게, 19세기에 북미를 강타한 영적 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3)독일 경건주의자들
(1)요한 아른트(John Arndt,1555-1621)-독일 경건주의 시조
경건주의의 본격적인 등장은 17세기 스페너의 『경건한 소원』이라는 책을 통해서 이지만, 스페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은 루터파 목사인 요한 아른트였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아른트 탄생 400주년에 즈음하여 "나는 어린 시절 모친으로부터 개신교의 예언자였던 아른트에 대한 사랑을 배웠다"고 술회하며, 자신의 영적 성장이 그에게서 많은 조명을 받았음을 시사했다. 이처럼 아른트는 근대 경건주의와 개신교 영성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①생애
아른트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576년 헬름슈타트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공부를 시작하였으나 중병을 앓고 난 다음 마음을 바꾸어 성경과 신학 연구에 열중하였다. 그는 좀더 깊은 연구를 위해 비텐베르크·스트라스버그·바젤 대학에 가서 신학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 1583년 목사 안수를 받고, 1611년 켈레 지방의 총감독으로 죽을 때까지 봉직하였다.
②위대한 설교자
아른트는 능력있는 설교자였는데, 그의 설교는 성경적이고 단순했으며 수식어나 예화 같은 것도 없었다. 그는 너무도 진지하여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과 감화를 주었다. 그는 신학적인 지식을 제공하기보다는 심령의 교화에 역점을 두었다. 아른트는 특히 성 버나드나 타울러와 같은 중세 신비주의자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4세기의 게르하르트 그루테나 토마스 아 켐피스에 의해 일어난 「공동생활 형제단」의 실천적 영성운동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③중심사상
#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
㉠인간 영혼이 하나님과 합일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 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까닭은 인간에게서 가장 큰 기 쁨을 찾으시고, 그 안에서 거하여 안식하시며 연합하기 위해서이다(요 17:22;고후6:16)
㉢신인합일의 확실한 증거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인간 안에 신성 과 인성이 하나가 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신인합일은 아가서의 신랑과 신부의 애절한 그리움과 만남의 황홀감으로 묘사된다(아른트는 루터의 복음주의 은총신학과 신비주의를 조화시킴).
(2)필립 야콥 스페너(Philip Jacob Spener,1635-1705)-독일 경건주의 창시자
①경건한 삶을 위하여
스페너는 청년시절 아른트의 『진정한 기독교』를 성경 다음으로 좋아했고, 영국의 청교도들에 관한 책과 독일의 신비주의에 관한 책들을 일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1651년 스페너는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인문과목을 마친 후, 루터파 학자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1659년 제네바에서 프랑스 개혁파 설교가인 신비주의자 잔 드 라바디(Jean de Labadie,1610-1674)를 만나 많은 감동을 받았다.
그후 스페너는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교수가 되기 위해 준비했으나, 1666년 봄 교회 담임으로 부임하라는 소명을 받는다. 거기서 목회를 충실히 하며 마음속에 품었던 교회 갱신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전개해 나간다. 그것은 바로 교회와 교인들의 영성 회복과 경건한 삶의 실천이었다.
②경건의 소모임
그는 교인들이 목사의 설교만 듣는 것으로는 부족함을 깨닫고, 1670년부터 사적인 성경 연구 모임인 '경건의 소모임'을 조직하여 진지한 성경 연구를 통한 영성 훈련을 실시한다. 이 모임은 즉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다른 목회자들에게 알려져 널리 확산되어 간다. 이 모임은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에 스페너의 집에서 가졌는데, 기도로 시작하고 전 주일의 설교에 대하여 토의하거나 경건 서적들을 읽었고, 혹은 성경을 읽고 토론하기도 하였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던 스페너의 책은 『경건한 소원』인데, 이 책이 쓰여지게 된 계기는 그의 존경하는 스승 아른트의 설교집 개정판의 서문을 써달라는 출판사의 부탁을 받으면서였다. 이 기회에 자신의 오랫동안의 심경을 피력했는데, 이것이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켜 결국 1675년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스페너는 목회 하는 중에 그의 후계자가 될 젊은 신학자 프랑케를 만난다. 그리고 말년에 스페너는 「모라비안 형제단」의 창시자인 진젠돌프 백작이 세례를 받을 때 그의 후견인이 됐는데, 모라비안교도들은 웨슬리의 부흥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③중심사상
#교회갱신의 필요
교회의 타락과 무기력, 활력의 상실은 루터 신학의 잘못된 이해에 있다. 당시 일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칭의'의 교리를 지나치게 '법정적'(forensic)으로 해석하여, 선행 무용론쪽으로 흐르거나 심지어 선행을 마음의 환상이나 악마의 장난이라고까지 비난하는 일이 생겼는데, 이것이 경건한 삶을 저해하는 원인이라고 했다. 스페너는 루터가 말한 '칭의'란 형식적 신앙이 아니라 옛사람을 죽이고 전적으로 성령을 따라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경건의 실천과 선행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스페너는 강조했다.
#교회갱신을 위한 제안
스페너의 주관심은 어떻게 개혁자들의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행하여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생명력 있는 복음적 교회로 회복시키느냐에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경건한 삶을 통해 교회의 영적 갱신과 영성 회복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 제안을 요약하면;
㉠하나님 말씀을 늘상 묵상하고 우리 가운데 거하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는 지식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며 실천이 더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웃 사랑이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교리 논쟁은 유익이 없으며, 참 신앙과 진리는 회개와 거룩한 삶을 통 하여 확정된다.
㉣목사 후보생들은 먼저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 므로 경건(영성) 훈련이 수반되는 신학교육이 절실하다.
#칭의와 성화와 완전
스페너는 개신교의 영적 쇠퇴와 결핍의 중요 원인을 루터의 은총 제일주의에 근거한 칭의의 교리를 너무 안이하게 해석하거나 법정적으로 이해한 데 있다고 보았으며, 그 결과 신앙인의 경건한 삶, 즉 기독자의 '성화'나 '완전' 사상이 공로주의로 매도되거나 도외시된 데 연유한다고 보았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칭의는 반드시 경건하고 거룩한 성화로 이어져야 하며,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 아니라 성화 시키기 위해서 임을 확신했다. 물론 스페너는 절대적 의미의 완전이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스페너는 완전을 추구하는 것을 금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완전의 실현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했다.
(3)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1663-1727)-독일 경건주의 실행자
①경건주의운동의 확산
경건주의가 독일교회에 있어서 실제로 중요한 운동이 된 것은 1689년부터이다. 그리고 경건주의운동이 독일에서 최고 절정에 이르게 한 실제적 지도자는 프랑케였다. 프랑케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히브리어를 교수하였다. 그는 이미 스페너의 주장을 따르는 사람이었는데, 2년간의 회의와 갈등 후에 감동적인 회심을 하게 된다. 이처럼 경건주의를 대학에서 공공연하게 주장하자, 대학에서는 심한 반대가 일어나 결국 파면 당하게 된다. 그후 에르푸르트에서 잠시 목회 하였지만 역시 경건주의를 선전한다는 이유로 쫓겨났다. 그 후 그는 할레 시의 근방에 있는 마을의 목사가 된다. 그는 이곳에서 목사와 설교자로 사역할 뿐 아니라 새로 설립된 할레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며 그 대학에서 저명한 지도자가 된다.
②경건주의운동의 열매
이때부터 프랑케는 영적이고도 실제적인 사회적 경건주의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할레 대학을 중심으로 소외 받은 사람들을 사랑하였던 프랑케는 빈민 아동들을 위한 학교를 7개나 세운다. 프랑케가 죽을 때까지 2,2000명의 어린이들이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또 그는 고아원도 설립하였고, 술집과 이에 딸린 대지를 구입하여 그 자리에 병원을 건립하였다. 그의 사업들 가운데는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 신학교를 하나 세우고, 구약 성경 연구를 철저히 하기 위한 희랍어와 라틴어 학당, 미혼모를 위한 보호소,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무료 숙박소, 과부와 걸인과 빈민들을 위한 수용소·진료소·도서관·인쇄소·성경 출판 및 성경 염가 보급을 위한 성경 판매소 설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대학촌에다가 건설한 기관으로는 놀라운 시설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모집하여 파송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독교 실천운동은 독일교회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고, 기독교가 죽은 정통주의가 아니라 살아있는 종교가 되게 했다. 할레대학이 창설된 후 30-40년 동안에 약 6000명의 경건주의 신학자가 배출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4)진젠도르프 백작(Count Zinzendorf,1700-1760)-경건주의 부흥운동의 지도자
①모라비안 형제단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주의를 연결한 사람은 진젠도르프 백작(혹은 니콜라스 루드비히, Nicholas Ludwig)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색슨의 귀족이며 고관이었고, 그의 외조부는 저명한 경건주의자였다. 그는 10-16세까지 할레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프랑케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때 그의 심령 속에는 순결한 교회와 순결한 영적 생활에 대한 경건주의적 사상이 뿌리 박힌다. 할레에서 교육을 마친 후 신학 공부를 열망했으나,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3년간 법률공부를 하게 된다.
그후 1727년 진젠도르프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재산의 일부로 땅을 사고 자기 가옥을 내놓아 종교적 피난민들의 안식처로 삼는다. 이 피난민들은 대부분 15세기초 후스파 운동의 후예들인 '모라비안 형제단'(Moravian Brethren)인데,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오직 주님을 믿는 자들만이 모이는 '성도들의 교제'(communion of the saints)를 꿈꾸었다. 그는 이곳에 신앙촌을 세우고 이들의 지도자가 된다. 1728년 진젠도르프 백작은 정부의 공직에서 물러나 오직 하나님의 사역에만 몰두한다. 1734년 진젠도르프 백작은 루터파 목사로 안수 받고, 1737년에는 진젠도르프가 설립한 '모라비안 교회'(Moravian Church) 혹은 그들이 더 선호하는 이름인 '연합 형제단'(United Brethren)에서 정식으로 안수 받는다.
②세계 선교의 주역
모라비안 교파는 프로테스탄트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선교사역을 시작한 교회이다. 1731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크리스천 4세(ChristianⅣ,1730-1746)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던 진젠도르프는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출신의 흑인을 만나고 당시 노예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 결과 1732년 모라비안 선교사 제 1진이 서인도 제도를 향해 떠났고, 1733년에는 그린란드로도 갔다.
또 1735년에 대규모 선교단이 아메리카 인디안들을 선교 대상으로 삼아 신대륙 조지아에서 활동했다. 그후 줄지어 아프리카·남미 등 갖은 악조건을 무릎 쓰고 실로 헌신적인 선교활동을 이루었다. 이처럼 진젠도르프는 진실한 경건주의자였다. 그의 이상은 고상하고 순결하였다. 또 그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으며 자기가 창설한 모라비아 형제단으로 하여금 구령운동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활동하도록 힘썼다.
끝맺는 말-관상적 영성가들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교회를 이끌었던 위대한 신앙의 선각자들은 사도들의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아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 이 세상에 빛을 밝혔다.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단순히 성령체험이나 은사체험이 아닌 '하나님 체험'(experiencing God)을 한 분들이다. 교회사가들은 이 분들에게 '기독교 신비주의자'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실상은 감정적·광신적 폐해(弊害)를 야기 시키는 자들이 아닌 지성과 신적 지혜를 충만히 지닌 '관상적 영성가들'(觀想的靈性家,contemplative Saints)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모두 성령의 조명을 따라 자기 부정과 포기·한없는 겸허·무소유·나눔의 삶·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순종·아가페 사랑 등을 삶 속에서 철저히 실천하여 '온전히 하나님을 아는 것에 도달한 분들'(完全聖化)이다. 결국 이들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에 최고의 모범을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빛으로서 비추어 주고 있는 것이다.
관상적 영성가들은 동·서방의 모든 교부들(예: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오리겐·어거스틴 등)을 포함하는데, 이들은 초기 수도원운동(예:안토니·베네딕트 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특히 이들은 사도들의 신앙전통을 이어받아, 속 사도시대부터 최후의 교부인 그레고리Ⅰ세 때까지 수도원의 금욕주의적 청빈·절제·순결을 통해 기독교회에 영적인 기틀을 세워 놓았다. 중세 봉건주의의 시작과 더불어 교권이 세속권력과 타협함으로 영적 암흑이 짙어져 가는 13세기에 관상적 영성가들이 수도원 개혁운동(예:도미니크·프랜시스 등)을 일으켜 퇴색된 기독교의 영성을 갱신했다.
12-15세기에 또 다시 수도원과 연계(連繫)되어 있는 관상적 영성가들(예:클레르보의 버나드·마이스터 에크하르트·요한 타울러 등)이 출현하여, 극도로 부패한 가톨릭 교황권과 형식적 신앙으로 인해 기울어져 가는 교회에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채웠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합일(合一)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여함으로 하나님의 빛을 밝게 드러냈던 분들이다(벧후1:4). 여기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그 이후 19세기말까지의 모든 영성운동들이 이들 관상적 영성가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관상적 영성가들의 삶과 사상은 16세기 종교개혁(예:루터·쯔빙글리·칼뱅 등)정신의 초석이 되었으며, 17세기의 영국 청교도운동과 독일 경건주의운동(예:요한 아른트·스페너 등)을 주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18,19세기는 계몽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썩은 나무의 독버섯처럼 이성주의·합리주의·이신론·불가지론·무신론 등 하나님의 존재조차 부인하는 패역한 세대였다.
바로 이때 관상적 영성가들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가운데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던 영국의 복음적 부흥운동(예:웨슬리·휫필드 등)과 미국의 1·2차 영적 대각성운동(예:조나단 에드워즈·찰스 피니 등)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일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강한 손길이었다. 이로 인하여 19세기에 위대한 세계 선교시대(예:윌리엄 캐리·리빙스톤·허드슨 테일러 등)가 열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오순절 성령운동은 외형상 18,19세기 부흥운동의 정신을 표방하고 있으나, 관상적 영성가들의 '하나님 체험'을 도외시한 채 기적과 은사 체험에만 몰두하는 기현상을 창출해 내었다. 그 결과 20세기말의 현대 기독교인들은 오직 은혜(sola gratia)·오직 믿음(sola fide)을 주창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구호를 오해하여, 정작 종교개혁의 버팀대였던 '하나님을 아는 것'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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