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채 교회/성채 교회 안내
느리지만 정확하게
by Andrew Y Lee
2020. 7. 23.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달팽이는 달팽이답게 가고
닭장 들꽃은 닭장 들꽃답게 피고
청개구리는 청개구리답게 울고
하나님의 크신 손 안에서 나는 나답게 산다
눈 깜박이는 시인 미즈노 겐조의 “삶”이라는 시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에 찾아온 홍역으로 전신마비가 되어
일생 듣지도, 말하지도, 쓰지도 못하게 된 소년이었다.
밥 한술 내 마음대로 뜨지도 못하고, 대소변도 스스로 가릴 수 없던
절망의 소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목사님이 주고 간 성경을 누군가 넘겨주면
그것을 읽고 주님을 영접하였다.
그 후 눈을 깜빡이는 방법으로 자음 모음을 표현해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 후 단 한 칸의 그의 방은 아름다운 시의 옹달샘으로 변하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가 깨달은 하나님은 큰 손을 가지신 분이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손 안에서 모두가 다 자기답게 살아가는 것으로 깨달았다.
그의 시를 관찰해보면 아마도 그의 옆에는 달팽이가 기어가고 있었나보다
그리고 닭장 들꽃이 피어나고 있었나보다
그리고 청개구가 울고 있었나보다
그의 시의 세계 속에는 급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가 밥을 차려 주어야만 먹을 수가 있고, 누군가가 대소변을 치워주어야만
하고, 누군가가 받아 적어 주어야만 시를 쓸 수가 있는 그였다.
남들처럼 나들이를 할 일도 없고 누구를 만나러 나갈 일도 없다.
그에게는 아무 것도 급한 것이 없었다.
너무나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이다.
얼마 전 어느 자매 결혼주례를 하였는데, 누군가가 인사를 한다.
더 얼마 전 그곳 같은 예식장에서 결혼 한 자매였다. 그 때에도 주례를 했었는데,
그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아이가 둘이란다
모든 게 너무나 빨리빨리 지나간다.
남의 일은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데 정작 자신의 세월이 지나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달팽이처럼 천천히 살아 갈수 있으면 좋겠다
느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다. 기다림 속에서 과정을 중시하는 것이 느림의 미학이다.
달팽이는 느리지만 목적지를 향하여 끊임없이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그 길을 간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언제인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거룩하시고, 의로운 분이시기에 그 앞에 서려면 의로워져야하고,
거룩하여져야하고,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셨기에 언제인가 그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실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것을 믿으면서 꾸준히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는 이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느리지만 꾸준히 이 길을 갈 때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신상털기”이다.
인터넷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에서 누구나 신상을 감추고 살기가 어렵다.
얼마 전 대구에서 어느 청년이 과일장사하는 할머니의 수박을 발로 차 깨뜨리며,
재미있어하는 동영상이 뉴스에 나와 많은 시청자들과 인터넷에서
이를 본 많은 누리꾼들이 그 청년의 신상을 털어야 한다며 분개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 청년은 머지않아 신상이 다 알려질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의 신상이 알려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신상이 털려야 한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우리의 부르심이 어떤가를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육체로는 자랑할 것이 없도록,
“가난하고, 연약하고, 비천하고, 미련한 인생들을 택했노라”고 선포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바로 알아
우리 영혼의 실상을 보아야 하고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고
구원의 감격이 새로워지고
하나님 앞에 서도록 거룩함의 열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 어느 기도원을 갔는데
그 입구에 “네 정체가 무엇이냐”는 글을 써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하루를 그곳에서 지나며 묵상할 때,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정체를 드러내어 죄인 됨을 고백하라는 것 이었다.
하나님의 빛된 말씀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볼 수 있는 거울이다.
말씀의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모습을 바로보자.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신상을 다 털어내자.
그리고 더디지만 묵묵히 그 길을 향하여 나아가자!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간다면 그 모든 과정 과정들은 모두가 아름다울 것이다.
느리게 살자는 슬로시티운동이 있다.
슬로시티의 시작은 1999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에서 당시 시장으로 재직 중이던 파올로 사투르니씨가
마을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느리게 살자"고 호소 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슬로(SIOW)는 단순히 빠름의 반대가 아니라
환경, 자연, 시간, 계절을 존중하고,
나 자신을 존중하며 느긋하게 산다는 뜻으로,
앞을 향해 치닫고 살아온 지난 세월을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것이라고 한다.
무조건 앞을 향해 달려 살아온 지난 세월을 조용히 돌아보자.
그 가운데 삶의 목적과 방향을 잃었다면 다시 그 목적과 방향을 찾자.
영적인 느림의 미학을 깨달아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달려가자.
인스턴트식품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가마솥에 콩을 삶아 느긋하게 저어야만
완성되는 순두부처럼 천천히 영성을 이루어보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가 만연하는 시대에 직접자필로 편지를 써보자.
그래서 느림의 미학을 맛보자.
미즈노 덴조는 평생 누워 살았지만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지게 살았다.
수많은 시를 쓰며 감사하며 본인의 고백대로 그답게 살았다.
나는 나답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성채교회의 가는 길은 느리지만
정확한 곳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가야 한다고....
이글을 쓰며 또 다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