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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성도가 가야 할 완전의 길
영혼의 무지개/스크랩 창고

[스크랩] 이 현필1

by Andrew Y Lee 2011.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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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광원을 다녀와서....

 

 

 

 

 

 
 이 현 필   1

 

순결의 길, 초월의 길로 들어서다


출생과 신앙의 배경

이현필 선생은 1913년 전남 화순군 도암에서
부친 이승노와 모친 김오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모친은 어떤 사람이 소금 일곱 가마니를 싣고 집에 와서 아랫방에 내려놓는 꿈을 꾸고 이현필 선생을 낳았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은 어린 시절 싹뿌리라고 불렸다.
훗날 그의 제자들은 두 가지로 이를 풀이하였다. 그것은 ‘뿌리고 싹 났으니’, ‘예수님을 안 후로 싹 버렸다’였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은 자신을 ‘헌신짝’이라고 자주 불렀다.

이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뜻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라는 뜻이었다. 이 선생은 평생에 남들이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 주는 것을 그 마음속으로부터 싫어했다.

자기를 선생이라고 불러주는 일을 저주로 여겼다.
 
이선생은 천태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공부를 잘하여 1등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부모님에게 매 한번 맞지 않고 자랐고, 학교에서도 인정받는 학생이었다. 한번은 활을 가지고 놀다가 순사를 보고

옆에 있는 친구에게 활을 주어버린 일이 있었다. 그 비겁했던 행동이 어른이 된 후에도 늘 맘에 걸려 자기는 그렇게 비겁한 자라고 고백했다.

이현필 선생은 학력이 높지 않았으나 혼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그 실력은 대학교수나 유명한 철학자라도 마주 앉아 논쟁하지 못할 정도였다.이선생의 집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넉넉히 살았으나, 부친의 사업실패로 집도 남에게 넘어가고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권동에 살면서 몇 십리나 떨어진 영산포까지 닭 장사를 하러 다녔다. 영산포에 일본사람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목사 이름이 관파였다. 그 목사는 구제도 많이 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분이었다. 이선생은 그의 설교에 감화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가 1943년, 22세쯤의 일이었다.

특별한 만남, 새로운 신앙의 길로 들어서다

그 후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변화가 오게 된 것은
화순군 도암의 성자(聖者)로 불리우는 이세종 선생을 만난 뒤부터였다.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이현필 선생이 나주군 다도면에 있던 방산교회에 다니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때 이웃에 인접해 있던 도암면 등광리에 사는 기인(奇人) 이세종이란 분이 가끔 방산교회에도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이세종 선생은 기인이요,
도인(道人)이어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신앙이 되어서는 못쓴다.”고 늘 가르쳤다. 그는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안 된다.” 는 영음(靈音)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그를 보통 이공(李空)이라 불렀다. 그는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재산은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살생을 하지 않고 자기 아내를 누님이라 부르며, 부부가 남매같이 살았다. 일정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다. 그는 성경 외에 다른 책은 절대 읽지 않았다. 남의 집에서 명절 음식이나 제사 지낸 것을 보내오면 먹지 않았고, 육식을 금하고 남의 집에서 자지 않았다. 그는 천태산 기슭에 기도실을 짓고 있었다. 사방에서 모여 온 젊은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날마다 이공을 찾아가 성경을 배웠다.
이선생도 그 그룹에 끼었다.
이공을 따라 다니던 젊은이들 중에는 강순명, 박복만, 오복희, 이상복, 수레기 어머니 등도 있었다. 그 중에서 이현필은 가장 우수한 제자였다. 이공은 이현필을 천재라 평했다. 스승과 제자는 때때로 청소강변 잔디밭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 당시 이현필은 이공의 순결사상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여 논쟁을 벌였다. 이공이 주장한 순결사상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적으로만 아니라, 육신까지도 정절을 지켜야 한다는 것, 즉 결혼과 부부생활까지 금해야 한다는 사상이었다. 이공과는 달리 이현필은 다독(多讀)을 했다. 이현필 선생과 오랜 세월 교분이 있었던 정인세 선생은 말하기를, “이세종은 이현필보다 세상학문에 있어서는 무식했으나, 선이 더 굵고 큰 인물이었다. 그가 그렇게 무식하면서도 유명해진 것은, 그는 성경을 한번 읽고는 한번 실행하고야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한번은 이현필 선생이 이공을 찾아 갔더니
선생은 보리밥을 잡숫고 계시다가 찾아온 이현필을 보고 보리밥을 내놓으셨다. 그러면서 “먹고 가시오.”하고 거듭 권했는데

이현필은 맛이 없는 보리밥을 끝내 사양하고 나왔다. 그 후 이현필 선생은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내가 그 때 이공이 그렇게 진정으로 권함을 순종하여 그 보리밥을 먹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복된 사람이 되었을까?”하며 그때 고집하던 마음을 뉘우쳤다. 이공은 남의 집에 가서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음식대접도 받지 않았다. 어디를 가려면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분이었지만, 그 제자 이현필 선생의 집에 가실 때는 자기 편에서 밥을 달래서 잡수시는 사이었다.


갈등과 변화 그리고 순결의 길로
 
이현필은
이공의 사상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신앙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공의 순결사상을 배우면서도 그대로 순종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을 배신하듯 22세 때 결혼을 하였다. 이현필은 다도면에 새살림을 차렸다. 제자 이현필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공은 매우 실망했다. “참 좋은 인재를 놓쳤구나!” 하고 그는 탄식했다.
 
그런데 이현필 선생은 결혼생활 얼마 후에 심경의 변화가 일어났다.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스승 이공의 주장이 옳았음을 통절히 느꼈다. 그러나 이미 가정을 가진 몸이니 어떻게 하나? 그러나 잘못 되었다고 깨달았을 때 좌절하거나 주저앉지 않는 것이 이현필이었다. 뒤늦게나마 이공의 사상에 귀의하여 선생의 사상을 따라야 한다고 크게 깨달은 그는 결행에 옮기려고 하였다.  결혼한 자가 순결생활을 해낼 수 있는가? 아내와 이혼해야 하는가? 이선생은 이혼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스승을 본받아 살려고 하였다. 이공은 결혼하고도 부부가 남매로 사셨다. 이세종 선생은

나이 어린 아내가 두 번이나 자기를 버리고
딴 남자에게 시집을 갈 때,
 
아내의 살림 도구를 지게에 지고
아내에게 갖다 준 분이다. 그 아내가 다시 돌아오니 곧 받아주었다.

이현필 선생은 아내와 동거 2년도 채 못 되는 사이
자기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싸우다가 아내를 보고
부부로 살지 말고 남매로 살자고 요구했다. 그 다음부터는 아내를 보고 매씨(妹氏)라 부르기 시작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던 아내는 남편의 변한 태도에 어처구니도 없고 슬프기도 하여 몹시 울었다.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태웠다. 어떤 때는 칼을 들고 “너 죽고 나 죽자.”고 쫓아다니기까지 했다.

 

엘리야의 영이 제자 엘리사에게 내렸듯이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세종의 영이 제자 이현필에게 임했다고 평할 만큼 이현필은 스승의 정신과 생활을 본받았다. 이공의 순결사상이 그대로 이현필 선생에게 전수되었다. 동광원의 핵심사상인 순결사상은 이런 경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서리내골, 동광원의 태동

이현필 선생의 나이 30세 전후
수년간 선생은 주로 개인적으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 명상생활을 일삼았다. 산에 파묻혀 기도하며 지내던 이선생은 해방 후 1946년(33세) 남원에서 몇 십리 들어가 있는 서리내골이라는 산중에서 십여 명의 소년, 소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서리내는 이현필 선생 운동의 발상지요 산실(産室)이다.

이현필 선생은 심산유곡, 산 좋고, 물 좋고 전망 좋은 곳을
수도생활의 요람으로 선택했다. 그들은 대부분 이선생에게 감동되어 부모들의 집을 나온 젊은이들이었다. 이선생을 따라 다닌다고 교회와 집에서 쫓겨났다.

서리내 깊은 선경 속에서 그들은 이현필 선생의 인격의 감화를 받으면서
성경을 배우고, 기도하고, 노래를 부르며 훈련을 받았다. 한번 훈련 기간이 15일씩이었다. 보름 훈련하고는 쉬었다가 또 보름을 했다. 이현필 선생은 뒷산에 자주 올라가 기도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한번은 이선생이 서리내 산이 크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선생은 그 소리를 듣더니 그것은 큰 동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직감했다고 한다. 그들은 숙식을 위해 움막집을 지었다. 이선생은 남녀유별(男女有別)에 대해서는 무서울 만큼 철저하고 엄격했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
 

갈보리 산에서

이현필 선생과 그 제자들은 갈보리나 서리내에서 모이면
‘갈보리 산에서’라는 노래를 늘 불렀다. 자신들의 처지가 핍박을 받고 집을 나온 신세요, 또 그 장소의 지명이 갈보리인데 갈보리의 주님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부르니 감격이 되어 눈물이 아니 날 수 없었다.


갈보리 산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예수는 귀중하신 보배 피를 흘리사 구원받을 참 길을 열어 놓으셨느니라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아, 십자가! 아, 십자가!

갈보리 십자가는 저를 위함이요

그와 같이 끝없는 사랑을 알고서는
영과 육을 아울러 산 제물로 바치며 주님 기뻐하시는 종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 보배 피를 저에게 부어 주사
지금으로 이 몸을 거룩한 성전 삼아 영원무궁하도록 살아주심 빕니다.


고통과 핍박을 딛고 나아가는 의의 길

어느 해 겨울 갈보리 윗방에서
곡성(谷城) 김광석 집사가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이선생이 험한 산길 20리를 깊은 밤중에 예배를 드리려고 찾아갔다. 그러나 문 밖에까지 가보니 김공이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기색이었다. 밤중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놀랄까봐 새벽이 될 때까지 이선생은 밖의 추위 속에서 그냥 서 있었다. 꽁꽁 얼면서도 그를 깨우지 않고 기다렸다.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그 때 훈련을 받은 소년, 소녀들 중에 처녀들은 오늘날까지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지만, 총각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한결같이 잊지 못하는 마음의 고향은 이현필 선생으로부터 훈련받았던 동광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현필 선생을 신비주의자로 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선생은 별로 신비스런 이야기를 하는 일도 없었고, 꿈 이야기하는 것도 즐기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사교(邪敎)의 교주들처럼 이적을 선전해서 인기를 모으지 않았다. 자기가 받은 특별한 은혜도 있으련만 일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다만 말씀으로만 가르쳤고, 하루 종일 하는 말씀이 그대로 설교였다. 간혹 누가 병이 들어 이선생의 기도를 받고자 원하면 “나는 신이 아니오” 하며 거절했다. 어디가 아프다는 이에게는 “아프게, 더 아프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한동안 이현필 선생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기성교회에서는 금욕주의자, 또는 산중파(山 中波)라고 불렀다. 기성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을 이단 또는 광교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현필 선생을 직접 만나 본 이들은 “이것이다!”, “이 길이다!” 라고 소리쳤다.

 

1948년 이현필 선생이 해남(海南)에 처음 전도대로 갔을 때는 머리를 삭발하고 헌 바지저고리에 배낭을 짊어지고 손에 깡통을 들고 맨발로 갔었다. 그래도 그를 존경하는 사람들과 믿는 군수 부인 등이 나와 천사처럼 그를 영접했다. 그는 멸시와 존경을 아울러 받았다. 여행하느라고 기차나 버스를 탈 때에도 이선생은 제자들을 보고 “우리는 맨 나중에 타자”면서 남들이 밀치고 제치고 다 한 뒤에야 탔다. 그로 인해 언제나 자리를 잡을 수가 없어서 문어귀에 그냥 서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남 곡성군 원달에서 어느 날 마을 청년이 강에서 큰 메기를 잡아 꿰어 들고 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리로 지나가다가 이것을 본 이선생은 그 청년을 좇아가서 그 물고기를 자기에게 팔라고 사정을 하였다. 그 때 돈으로 비싸게 1원을 주고 사서 그 고기를 강에 가지고 가서 놓아 주었다.

 

이현필 선생의 바람이 한창 휩쓸던 시절에는 남원이나 진도 같은 데서는 적어도 기성교회 교인의 5% 가량이 이선생 모임에 따라 다녔다.  프랜시스 운동이 그 당시 유럽 기성 기독교인들의 안일과 사치에 대해 대조적이었던 것처럼, 현대교회가 너무도 그리스도 정신을 멀리 떠나 세속적이고 경건성을 잃은데 대한 반동적 운동 같은 느낌을 주는 이현필 운동은, 기성교회에서 볼 때는 너무나 독선적이고, 과격하고, 이단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동안 남원지방의 신자들이 하나의 구호처럼 부르고 다닌 말은 “이 길이다!”였다. 동광원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나 감격하여 부르짖는 말은 “이 길이 옳다!”였다. 고난 길 헤치고 찾아 온 길, 볼품없고 초라한 곳이었지만, 그곳에 주님의 의의 나라가 세워지기 위한 깃발이 꽂히고 있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이들

불은 남원에서 일어났다.
 6.25전 한동안 남원읍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이선생으로부터 성경을 배웠는데, 이선생은 밤이 늦도록 말씀을 가르쳤다. 음식은 거의 먹지 않았다. 그저 공부하다가 잠깐 무를 깎아 먹고는 또 공부를 계속했다. 제자들이 밥 먹는 동안에 이선생은 밖으로 피하여 나갔다. 그렇게 먹지 않기 때문에 젊은 몸이지만 피골이 상접했다. 영양실조에다가 피부는 뼈에 붙었고, 배는 등에 닿은 듯 한 모양으로 앉아 있는 그 모습은 필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뒤따라가는 순교자의 모습이었다. 더구나 그 당시 이현필이라면 ‘가정파괴자다’, ‘기성교회 교인을 유인해가는 이단자’라 하여 핍박이 심했었다. 가련하고 측은한 마음에 존경하는 마음이 뒤섞여 그에게 마음이 더 끌렸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이선생에게 절을 하려고 하니 선생은 굳이 만류하면서 “절하지 마시오. 저도 똑같은 인간입니다”라고 하며 기어이 못하게 했다. 후에 누군가가 왜 절을 안받느냐고 물으니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절하는 것을 만류시킨 성경을 펴 들고 설명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다’(행10:26).

 

남원의 강부남 권사의 자매들도 이선생을 존경하여 따랐다. 그중에 남자 동생은 부자로 살던 자신의 누나들이 어디서 굴러든 거지같은 이현필을 따라다니면서 거지꼴이 된 일에 화가 나서 이현필을 몹시 미워했다. 한번은 이현필 선생이 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그 곁에서 이선생이 무슨 일을 하는 가 그 동정을 일일이 감시했다. 자기 생각에는 ‘이현필이란 자가 남의 재산을 갈취해 먹으려는 수단으로 일부러 성자(聖者)로 꾸며 밥을 안 먹을 터이지. 그래도 자기만은 남 몰래 어느 틈에 뭘 먹을 테지’ 하고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감시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성경공부는 10시에 끝났는데, 거기 모인 이들은 벽에 걸어 놓은 보릿자루에서 보리를 한 숟가락씩 떠먹고 지냈다. 그런데 이선생은 그것도 안 먹고 밖에 나갔다. 뒤쫓아 나가보니 이선생은 샘가에서 몸에 물을 끼얹고 산의 솔밭 사이로 깊이 들어갔다. ‘옳지, 무엇이라도 캐 먹으려고 하는가보다’ 하고 짐작하고 계속 뒤쫓아 가보았으나, 이선생은 소나무 밑에서 기도만 드렸다. 이렇게 3일이나 계속하였으나 그는 자기가 못 견디고 산을 내려오고 말았다. 결국 그는 이선생에게 감복하고 만 것이다. 
어느 겨울이었다.
이현필 선생과 수레기 어머니와 김금남양 셋이 남원에서 출발하여 곡성을 거쳐 광주를 향해 길을 걸었다. 이선생은 앞에서 걷고 두 자매는 그 뒤를 따르는데, 눈보라는 사정없이 몰아쳤다. 이선생은 늘 하는 대로 거리를 지날 때는 신을 신고, 거리를 벗어나서는 신을 벗어들고 맨발로 걸었다. 스승의 뒤를 따르는 두 자매들도 선생이 하는 대로 추운 겨울날이지만, 신을 벗어 들고 걸었다. 그날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고, 추운 눈보라 속에서, 미끌어지는 산길을 쉬지도 않고 맨발로 걸었다.

해질 무렵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어느 집에서 솥의 누룽지 긁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이들 배고픈 나그네 귀에 들려왔다. 앞에 가던 이선생이 발을 멈추고 돌아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그 집에 들어가 밥을 얻어 오겠으니 기다리라는 눈치다. 그 집에 들어갔다가 한참이나 있다가 되돌아오는 이선생은 쓸쓸히 웃으며 “못 얻었습니다” 했다. 그때 춥고, 지치고, 배고픈 두 자매의 실망스런 느낌은 평생 잊히지 않았다.

세 사람은 다시 걸었다.
날은 어둡고 밤길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얼마를 더 가다가 선생을 쫓아가던 수레기 어머니는 추위와 허기 때문에 길가에 쓰러지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김금남양이 길가 어느 집에 들어가 사정을 말하고, 하룻밤 좀 쉬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허술한 옷차림과 맨발 벗은 거지꼴을 보고는 거절했다. 어디를 가나 집집이 모두 거절했다. 맨 나중에 찾아간 집에서도 거절하면서 하는 말이 “저 건너 마을에 오집사 댁이 예수 믿는 집이니 찾아가 보소” 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 있건만 집 한 칸 없으셨던 주님의 뒤를 그들은 그렇게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그 어느 누구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길이요, 고통의 길이었지만, 그들은 주님과 함께 그 길을 걷고 있었다(계속)

 

출처 : 모세골
글쓴이 : 모세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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