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면서
창세 전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의 창조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시고 계셨다.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파트너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아담을 만들 때는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손수 흙으로 만드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그리고 이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못하여 돕는 배필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은 아담과는 다르게, 전혀 다른 특이한 방법을 취하셨다. 아담을 깊이 잠재우시고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시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우시고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지어셨다.
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실 때 여자를 함께 만들지 아니하셨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신 것을 아담을 짓기 전에 모르셨던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을 잠재우고 갈비뼈를 뽑아내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우는 번거로운 방법을 택하셨을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신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슨 특별한 뜻을 가지시고 그 뜻하신 바를 따라 그렇게 번거롭게 여자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믿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추적해보았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었다. - 창 2:7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 It is not good for the man to be alone).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무언가 실수하신 것 같은 뉘앙스가 들지 않는가? 그래서 급히 수습하시려고 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It is not good”이라는 말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가능한 말씀인가?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민 23: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때를 따라 자신의 법(말씀)과 과정(역사)을 통하여 그 목적을 향한 방향성을 가지고 세상을 경영하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서 창세 전에 이미 “접붙임”이라는 신비로운 법칙을 통하여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실 것을 성경에 계시해두셨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비인 “접붙임”에 대해서 기독교회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복음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99%의 말씀을 알고 있다 하여도, 잘못 알고 있는 1%의 혼합된 말씀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심판 날에 실족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은 현대의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모두 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열방의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모든 뜻이나 계획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믿는가? 안타깝게도 열방의 기독교회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The Mystery of God)”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때를 따라, 그때에 합당한 말씀을 계시로 풀어주신다.
마치 한 장의 큰 그림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서 퍼즐처럼 해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방의 모든 교파와 교단들은, 자신들의 신학과 교리가 단지 퍼즐의 몇 조각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어떤 교파도 온전한 말씀의 그림 전체를 가지고 있지 못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풀어주시는 계시를 겸손하게 받아드려야만 한다.
본서는 이런 질문과 의문에 명확하게 답하고, 그 증거들을 계시된 말씀으로 밝히고 열방의 기독교회들을 깨우기 위해서 기록하였다.
기독교회 안에 만연한 자유주의 신학과 민중 신학, 해방 신학 등을 보아도 얼마나 성경이 희석되고 왜곡되어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교파와 교단은 각기 자신들의 신학과 교리만을 따라 성경을 보고 해석하는 그들만의 안경을 가지고 있다. 이런 안경이 신학과 교리의 프레임이다.
고후 10:4-6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사 65: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자기 생각”의 히브리어 “마하샤바”에는, “상상력, 고안, 계획, 수단, 목적, 생각”이라는 뜻이 있다. 그리고 “마하샤바”의 동사인 “하샤브”에는, “엮다, 서로 꿰뚫다, 공작하다, 상징적으로 음모하다 또는 사악한 뜻으로 꾀하다”라는 뜻이 있다.
우리는 존재적으로 죄성으로 말미암아 자기 생각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참 믿음의 여정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잘못된 지식과 생각의 안경으로 새로운 계시를 대하게 되면, 곧바로 이단으로 정죄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과 지식체계에 의한 확신의 포로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이 심히 가까운 지금까지도 교회는 여전히 희석되고 왜곡된 진리의 사슬에 매여, 노예의 삶을 살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각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를 따라 자신의 뜻을 계시로 풀어주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들의 안경을 벗거나 교정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대상 12:32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두목이 이백 명이니 저희는 그 모든 형제를 관할하는 자며”
마 24: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대체 신학은 이방인교회를 교만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신의 선민 이스라엘을 버리고, 교회를 이스라엘로 대체하신 적이 없으며, 대체하실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폐기하거나 변개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하나님 자신도 자신의 말씀에 제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일 수가 없을 것이다.
삼상 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주님께서 속히 오실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이제까지 감추어 두신 신비로운 말씀들을 계시로 풀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말의 때까지 감추어 두신 말씀을, 성경은 “하나님의 신비 (The Mystery of God)”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성경은 신비가 아닌 비밀로 기록하고 있다.
종말의 때까지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신비는 오직 히브리어를 통해서 계시로 풀어진다, 왜냐하면 창조의 언어는 “히브리어”였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거하는 말씀이 창 1:3과 창 11:6-7이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무언가 실수하신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하나님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추적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돕는 배필(a helper suitable)을 히브리어로 살펴보자.
“돕는”의 히브리어 “에제르 ya'azor”는 “도움, 원조”라는 뜻이다.
“에제르”의 어원은 “아자르 azár”라는 동사로 “구원하다, 구조하다 둘러싸다, 방어하다, 돕다,” 라는 뜻이 있다.
“배필”의 히브리어 “네게드 neged”는 “정면, 대면하여, 앞에, 짝”이라는 뜻이다.
“네거드”의 어원 “나가드”는 “고발하다, 증명하다, 누설하다, 선언하다, 입증하다, 알리다, 보여주다, 예언하다, 정면에 두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 맞은편 정면에 둔 거울 같은 존재였다는 의미이다.
“배필”의 히브리어 “네거드”의 어원 “나가드”는 그 뜻이 “고발하다, 입증하다, 보여주다, 선언하다....” 임을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돕는 배필’의 역할은 이브로 하여금 아담을 향해 “너는 불완전한 존재로 죽을 수밖에 없다”라고 선언하고, 고발하며 입증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눈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상대방을 통해서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돕는 배필”을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돕는 배필”을 통해 아담과 이브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각자가 자신의 실상이 어떠한지를 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도대체 아담의 실상이 어떠하며, 이브의 실상이 어떠했기에 서로를 통해서 자신의 실상을 보고 깨닫기를 원하신 것일까?
이에 대한 상세한 계시는 제 1부에 기록하였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실체가 나타난다.
만물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시작과 함께 시작 – 예슈아와 말씀 그리고 구속된 이스라엘 곧 한 새사람을 이룬 메시아의 신부교회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아들의 집(새 예루살렘)을 이 땅에 세우기 위해서 -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에덴에서 아담과 이브를 아들의 신부교회로 세우고, 마지막 날에 아들의 신부인 참 이스라엘 된 한 새사람교회와 결혼하시고 새 예루살렘을 완성하셔서 회복된 에덴으로 내려오신다. 이것이 한 새사람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고 과정이며, 말씀이 곧 역사이고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도구이고 과정이며 방향성인 것이다.
사 48:11-13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과 결혼하시기를 뜻하셨다.
이방인은 하나님 밖에 있었던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존재들이었다.
사도 바울이 위대한 것은 주님께서 창조 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미스터리한 신비의 과정과 목적을 계시로 받고 성경을 기록한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롬 11:15-19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함이라 하리니”
롬 9:4-5 “저희는 이스라엘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하나님은 양자 됨, 영광, 언약, 율법, 예배, 약속, 조상, 그리스도, 이 모든 것들을 이스라엘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이 모든 것들 중에서 어느 것 하나라도 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신 적이 결코 없다.
이방인교회가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것들을 받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 접붙임 됨으로서 공유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마치 몸의 척추 뼈와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뼈는 척추 뼈에 연결되어 그에 살과 근육 등이 붙어서 온전한 몸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인 접붙임에 계시해두신 것이다. - 제 3부에 기록
이것을 모르는 이방인교회가 이스라엘을 부인하고, 이방인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여 그 모든 것을 받았다는 대체 신학은 반유대주의에서 시작된 사단의 신학임을 알아야 한다.
이방인교회가 이스라엘에 접붙임 받지 않고서는 주님의 신부가 될 길이 없다.
엡 2:11-22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15의 “화목” 또는 “화평”의 히브리어는 “샬롬”이다. “샬롬”은 형용사이고 남성형으로, 그 뜻은 “평안, 안전한, 정다운, 안식”이며, 어원은 “샬람”이며 동사로 그 뜻은 “완성하다, 가득하다, 안전하다, 평안하다, 정답다”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원수 되었던 이스라엘과 이방인교회가 접붙임으로 온전하게 한 몸을 완성하였다는 의미인 것이다.
엡 3:4-6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신비)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후사가 되고(이스라엘과) 함께 지체가 되고 (이스라엘과)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엡 3:6을 영어 NIV 성경으로 보면 “This mystery is that through the gospel the Gentiles are heirs together with Israel, members together of one body (with Israel), and sharers together (with Israel) in the promise in Christ Jesus”라고 명확하게 기록되어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교회가 이스라엘에 십자가의 믿음으로 접붙임을 받아서 이스라엘과 한 새사람을 이루어서 함께 하나님의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음을 기록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인교회가 접붙임으로 한 새사람 곧 참 이스라엘이 되어 메시아의 신부가 된다는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놀라운 가르침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살펴보자.
벧후 3:15-16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계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15절에 “그 받은 지혜대로”라고 기록하였는데, 그가 그렇게 기록한 것은 사도 바울이 주님께 받은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계시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그 받은 지혜대로”라고 기록하였던 것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16절에 기록된 대로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벧후 3:1-13 참조)에 관하여 말하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라고 표현하였다.
베드로 사도가 바울 사도의 편지들 중에 특별히 한 새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신비 곧 “접붙임의 신비”에 대해서는 베드로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신비는 하나님께서 직접 계시해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께서 기록한 것을 사도 베드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본서에 기록된 내용에 대하여 혹시 이단 아닌가? 또는 잘못된 것이다, 틀렸다 등의 부정적으로 반응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풀어진 계시의 진리가 명확하다면,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누군가는 가야만 하기에 감히 어떠한 비판이나 비난이 있다 하여도, 오직 믿음으로 이기고 주님께서 계시로 열어주신 하나님의 신비를 단 한 사람이라도 공감하고 깨닫는 은혜 받는 자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마지막 때에 풀어진 계시를 세상에 알리고자 기록하였다.
특별히 본서의 1부에 기록된 “돕는 배필의 신비”와 3부의 “권속, 잡족, 지성소의 휘장의 신비”는 초대교회 이후 최초로 이 부족한 종에게 풀어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스라엘(아담)과 이방인 기독교회(이브)가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부활의 생명의 권능에 접붙임이 되어 그리스도의 신부인 "한 새사람 교회"가 되게 하시는 사건이 완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라는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다. - “화룡점정”과 같음.
엡 5:31-32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This is a profound mystery)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증거의 말씀이 “돕는 배필과 접붙임”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본질이 하나(에하드)이다.
그랬기에 그들은 한 몸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과 교회는 본질이 하나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이다.
“신부”의 히브리어 “칼라”의 어원인 “칼랄”은 그 뜻이 “완전한, 완성하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완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방인교회가 이스라엘에 접붙임으로 하나가 되어 “한 새사람”을 이루어야만 “신부교회”로서 완전함을 이루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한 몸(접붙임)을 이루어서 완전하게 된 것과 같은 법칙이다.
이스라엘만으로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이방인교회만으로도 완전한 교회를 이룰 수 없다.
아담(이스라엘)의 갈비뼈로 이브(이방인교회)를 지은 것과 같은 법칙이다.
오직 이스라엘과 이방인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접붙임으로 “한 새사람”을 이룸으로써 참 이스라엘인 완전한 신부교회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신비(the Mystery of God)를 계시하시기 위해서 아담과 이브를 따로 지으셨던 것이다.
아담은 이스라엘의 예표이고, 이브는 이방인 교회의 예표임을 알아야한다.
아담의 갈비뼈가 하와의 근본이었던 것 같이, 이방인교회의 근본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이방인교회의 본질이며 몸통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방인 교회를 보면서, 마치 아담이 이브의 불완전함을 보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달아 알게 되고, 이방인교회 역시 이스라엘을 보면서, 마치 이브가 아담의 불완전함을 보면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접붙임(결혼)을 통하여 완전함을 이루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을 만드신 것은 주님의 신부인 “한 새사람교회”에 대한 예언적 계시이다.
이스라엘(유대인을 비롯한 열두지파)과 이방인교회 공히 이제까지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신비인 ‘접붙임’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이 깊은 하나님의 신비(This is profound mystery)”가 마지막 때인 지금 풀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 이브를 지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사람(Man)이 아닌 남자(Male)로 칭하시고 이브를 여자(Female)라 칭하셨다. - 창 2:21-24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만들었던 사람에게서 갈비뼈가 빠져 나가므로 아담은 완전한 존재였던 사람(Man)으로부터 갈비뼈 하나가 부족한 만큼의 불완전한 존재인 남자(Male)로 전락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남자인 아담을, 완전한 존재인 사람인 아담으로 회복시키셔야만 하셨다.
그래서 만든 신비로운 제도가 결혼(접붙임)이다.
아담의 갈비뼈로 만든 여자 이브가 결혼 제도(접붙임)를 통하여 남자와 한 몸이 되게 하시므로, 빠져나갔던 갈비뼈가 다시 아담에게로 접붙임 되어 아담의 몸 안으로 들어옴으로서, 불완전해졌던 남자 아담을 완전한 존재인 사람 아담으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이방인이 복음으로 서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의 신비(the mystery of God)”임을 계시로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이 한 새사람의 신비인 것이다.
그 신비에는 다윗의 장막이 있고, 이스라엘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가정이 있고, 더 올라가 에덴의 아담의 가정에서 주님의 신부인 한 새사람교회가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the mystery of God)가 완전하게 풀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루시퍼의 타락 이후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 위하여 그의 영원하신 처소를 특별히 구별한 땅에 짓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위해 에덴동산에 자신의 몸 된 한 새사람 교회를 짓기로 뜻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가지셨던 하나님의 신비이다.
이 신비로운 뜻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접붙임의 법칙”을 사용하시기로 하셨다. 그래서 아담을 먼저 짓고 이후에 아담의 갈비뼈를 통하여 여자를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셨던 신비하신 뜻을, 결혼이라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불완전한 남자와 여자가 사람으로 회복되는 접붙임이라는 하나님의 신비를 따라 자신의 창조목적을 계시하신 것이다.
막 4:22-23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성경에 대한 이제까지의 지식과 해석, 교리와 신학 등 교회 안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잘못된 선입관과 자세를 겸손히 내려놓고, 마음과 귀를 열고 이제껏 감추어져 있었던 하나님의 접붙임의 신비가 깨달아지고 이해되기를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허한 자세를 자지고 본서를 대하기를 원한다.
사단은 하나님의 “접붙임의 법칙”를 깨뜨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지우고, 교회가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대체했다는 대체 신학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대체 신학은 필연적으로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대체 신학은 반유대주의 딸이기 때문이다.
대체 신학으로 희석된 복음에 눈이 가리고 귀가 덮이고 마음이 완악해진 이방인교회는, 그들의 존재가 이스라엘과는 아무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잘못 인식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이라며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권들을 이방인교회의 것인 양 착각하고 이스라엘을 무시하고, 배척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에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가려져 있었고, 이방인교회가 믿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이심과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반유대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대체 신학은 이에 더하여 주님 자체가 이스라엘이신 것을 가려버렸다.
사 49:3 “내게 이르시되 너는(주님)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주님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께서 선언하셨는데, 어떻게 이방인교회가 이스라엘 없이 존재할 수가 있겠는가?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것은 주님을 부정하는 것이 됨을 알아야한다.
이방인교회는 이스라엘에 접붙임으로만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만물의 창조자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정하신 것이다.
이방인교회의 본질과 몸통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참 감람나무의 뿌리가 주님이시다. 참 감람나무의 몸통에 접붙임을 하여야만 뿌리로부터 진액을 받아 참 감람나무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예언적 계시적 목적을 이방인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시하시고 성취하신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종말의 때에 “돕는 배필”의 신비를 풀어주신 것은, 이방인교회가 왜곡된 진리의 말씀들을 깨닫고,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는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야만 한다.
본서는 2,000년 교회사 속에 매몰되고, 희석된 이스라엘과 한 새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인 접붙임”의 계시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때에, 교회에 풀어지는 은혜의 계시를 받아서 진리의 말씀을 급속하게 회복하라는 주님의 뜻을 받들고자 기록하였으며, 주님을 예수님이 아닌 히브리어 이름인 “예슈아 하마쉬아흐”를 따라 “예슈아”로 기록하였다. 주님의 히브리 이름을 몰랐을 때는 예수님 또는 Jesus라고 불렀으나, 이제부터는 주님의 이름을 온전하게 알고 칭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겠는가? 물론 주님께서는 이방인교회가 자신을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러니 호칭은 여러분의 몫이다.
창 3:15의 “여자의 후손”의 성취가 “예슈아 하마쉬아흐”이다.
본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성경에 감추어 두신, 하나님의 신비인 접붙임 속에 숨겨져 있는 깊고 오묘한 “한 새사람, 참 이스라엘, 그리스도의 신부, 이기는 자”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들과 함께 탐구하면서, 이를 통하여 비늘이 벗겨지고 심령으로 깨달아서, 그동안 이방인교회가 얼마나 진리와 동떨어진 말씀을 가르치고 선포하였는가를 회개하고, 주님의 재림이 심히 가까운 이때에 진리의 말씀을 회복하여, 말씀이신 주님을 기쁘게 하는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여러분들에게 바라기는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시고, 지인들에게 널리 전파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본서에는 현학적인 문구나 미사여구는 사용하지 않았기에, 혹시 거칠고 투박한 문장으로 불편하시더라도 해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본서는 2016년 2월 초판 출간에 이어 개정판 5쇄에 이르기까지 비매품으로 출간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한 새사람”의 하권으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접붙임의 신비와 한 새사람 교회 그리고 참 이스라엘인 신부교회가 온전하게 이해될 수 있게 구성되었음을 기쁘게 여기며, 선교지의 Mt. Zayith Ministry (Zayith는 감람산의 히브리어임)의 모든 성도님들의 사랑과 헌신에 감사드리며, 지난 30년 동안 후원 교회 없이 오직 “믿음 선교”로 사역할 수 있도록 여기까지 인도하시며, 모든 필요를 공급하신 선하시고 신실하신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와 깊은 하나님의 신비를 부족한 종에게 계시해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위엄과 존귀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2021년 11월 30일
주님께서 지정해주신 필리핀 비콜 이리가시 선교지에서
정 바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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