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_daum-><!-by_daum->교회사속에서 발견한 영성목회
김귀춘 편집부장
자료출처-영성의 샘
교회사속에서 발견한 영성목회의 가능성
성공적인 목회란 무엇일까. 교인들의 숫자가 많고, 화려한 대형건물을 소지하고, 헌금의 양이 많고 많은 사례비를 받는다고 성공목회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그것이 성공목회이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고 방향이라면 그건 너무 허탈하고, 진부하고, 그리고 힘이 빠지는 일이다.
왜냐면 가치관, 근본적인 목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목회란 일의 규모나 사명의 크기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흡족하고 합당한가에 그 성과여부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흔히 최첨단 사이버시대 혹은 디지털시대 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컴퓨터와 인터넷이라는 매체에 노출되면 될 수록 사람의 마음은 고대로 돌아가기를 갈망하며, 향수, 옛 것을 그리워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냄새, 원시그대로의 자연속에 파묻혀 있으면서 최첨단문명 속에서 잃은 자신을 찾기를 즐겨한다. 그래서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는 이성, 규율, 통제보다 감성, 직관, 상호유기적 관계를 원한다. 첨단과학이 초고속으로 발달하고 컴퓨터라는 기계화에 예속될수록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남성적인 웅장함이나 무심한 기계보다 여성적인 섬세함, 따스함을 그리워한다. 인스턴트와 디지털 문화에 젖어있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과학화, 합리적사고, 이성적 접근보다 감성적, 직관적, 상호유기적 체제속에서 더 빨리 동화되고 감동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이성희 목사님과의 인터뷰가운데 존위버의 저서 “Ancient future- faith”라는 글을 소개받았다. 위버는 매우 복음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사상을 피력했는데, 고대와 미래 사이에 하이픈을 넣지 않고 하나라고 명시하였다. 즉 그는 고대와 미래가 일치한다고 보아 21세기의 영성이야말로 고대영성과 같은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런면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21세기의 대안목회를 제안함에 있어서 고대영성을 바로 이해하는데 우선점을 두고 싶다. 여기에서 ‘고대’라는 의미도 단어자체로써 제한시킬 것이 아니라 고대를 넘어 중세 현대에까지 이어지는 영성의 맥, 즉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영성의 줄기를 찾아 이를 오늘에 맞게 재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성과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난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맑고 아름답게 흐르는 영성의 수맥을 파악하여 현재에 접목하는 것이 21세기를 사는 디지털시대의 대안목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고에서는 교회사 2천년간 살아온 신앙의 위인들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지금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특정한 이들의 목회관이 어쩌면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구시대의 유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자세, 태도는 하나여야 한다는 점이다. 시대가 변할수록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바뀌면 바뀔수록 우리가 배우고 지향해야하는 근본목표는 오로지 하나님께로 향함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목회든, 선교든, 그 밖의 다른 것이든 본질 자체는 변하지 말아야 한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영성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영성과 주관적인 영성의 조화가 필요하다. 객관적인 영성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 삼위일체,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신구약 말씀 등을 말한다면, 주관적인 영성이라 함은 위의 객관적인 영성을 인간이 받아들여 삶의 현장에서 적용하고 꽃피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영성의 가치관이 바른 사람이어야 삶속에서 올바른 영성을 잉태하고 열매 맺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성은 하나다. 모든 뿌리와 근원이 같은 맥락 객관적인 영성에 그 맥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성을 일차적으로 일성(一性)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조건과 환경, 사회여건 및 상황에 따라 영성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에게로 향하게 하는, 일치하게 하는 근본목적은 하나지만 그 과정은 각양각색이다. 즉 그 시대가 처한 시대적 배경, 각 사람의 기질, 처한 환경, 사명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영성의 근본 목표가 예수그리스도를 지향하게 하고 닮는 일에 초점을 둔다면 그 과정은 각 사람마다 공동체마다 다양한 빛깔로 색깔을 띠게 된다.
예컨대 예수님의 생애는 영성의 길에 있어서 잣대요 목표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생애 전부를 본뜨고 열망해야하지만 그렇게 살아내기란 인간의 한계가 너무 많다. 개인의 성향이나 기질부터 시대적 배경에 이르기까지… 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 한계속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채를 발하며 영성의 꽃을 피워야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다.
예컨대 예수님의 생애를 본뜨는데에 있어서,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상기하며 예수님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일평생 금욕과 절제로 일관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 혹은 공동체가 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겸손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고, 혹자는 예수님의 청빈한 자세를 본받기 위해 자신은 최소의 비용으로 살지만 남을 위해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며 일생을 헌신하기도 한다. 때로는 가난한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예수님의 헌신과 사랑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이가 있는가하면 혹은 아픈자들을 돌보고 병자를 치유하는 예수님을 본받고 닮기 위해 애쓰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욥과 같이 고난의 치욕과 친한 이들로부터 버림받은 속죄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평생 본뜨는 이도 있다. 광야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일생 본뜨며 살아가는 이도 있다.
이처럼 영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하나이지만 인간의 기질이나 다양한 환경에 따라 다성(多性)으로 변형된다. 그래서 개인에 따라 베네딕또의 영성, 프랜시스의 영성, 칼빈의 영성, 웨슬리의 영성 등이 있고, 사명에 따라 목회자의 영성, 수도자의 영성, 평신도의 영성 등이 있다. 시대나 국가에 따라 사막교부들의 영성, 초대교회 순교자의 영성, 중세의 영성, 종교개혁가들의 영성이 있다. 종교개혁가 영성 중에서도 인물에 따라 강조점이 구분되는데, 루터가 ‘십자가’와 하나님의 ‘의’를 보면서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에, 칼빈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바라봄으로 ‘이중예정’에 초점을 두었다면, 웨슬리는 ‘기독자 완전’에 그의 초점을 두었다. 그밖에도 독일 신비주의 영성, 영적각성운동가들의 영성, 현대인의 영성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기도방법에 따라 이냐시오식 묵상방법, 토마스 머튼의 명상법, 아빌라의 테레사의 묵상방법 등이 있다.
영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대안목회의 출구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한계가 있기에 이 모든 것을 다 본뜨지 못한다 해도 어느 한곳 혹은 한 인물에 자신의 영성적 가치관을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교파가 역사적, 지리적 상황에 의해 발생하여 독일의 개신교는 루터파, 프랑스의 개신교는 개혁파, 영국의 개신교는 성공회와 감리교회로 나누는데, 사실 이러한 양상은 기독교교리의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런 모습은 마치 소경 여럿이 각자 코끼리를 만져보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누구만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것으로서 교파의 ‘다양성’(diversity)을 인정해야 하듯이 그 어떠한 영성지도자의 영성이 아무리 훌륭하고 자신과 맞다 해도 그 한사람의 영성을 절대화하거나 보편화해서는 안 된다. 영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한 시대나 한 인물에 국한하지 않는 자세가 요청된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 우리는 영성의 본질이요 원천을 찾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생애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서도 때에 따라 부분적인 것들이 부각되어 나타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어느 한 부분에 자신을 제한시키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경에도 성령의 열매를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렇게 다양한 성령의 열매처럼 영성의 빛깔도 다양하게 채색되어 빛을 발한다. 개인, 공동체, 그리고 사명에 따라…
그렇다고 인간의 한계를 간과할 수는 없기에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고, 찾았다면 그것을 겸손하고 성실하게 키워나감으로 자기의 내면과 몸에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일치가 점점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영성의 뿌리요 근원이신 예수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셨고, 완전한 영성가로서의 면모를 그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듯이, 우리 또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모든 영성의 방법들을 조화하고 통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자세가 영성의 편협성에 빠지기 쉬운 함정을 극복하고, 삶 속에서 유연하고 탄력적인 영성적 자세를 확립하는데 요긴하게 작용할 것이다.
교회사속에서 찾은 영성목회의 가능성
20세기 3대 성인이라 불리는 하천풍언(가가와 도요히꼬, 1888-1960)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이어지는 형의 방탕으로 집안은 완전히 파산해버렸다. 자기의 기구한 운명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항아리에 가득 넘칠 만큼 쉴새없이 울정도로 어린시절이 참혹했다. 16세되던 해 선교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그는 크리스천이 되었고, 형제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입학을 한다. 받은 은혜를 어찌할 수 없어 40일을 노방 전도하던 중 각혈을 하고 쓰러졌는데, 폐결핵으로 3년밖에 살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때 하천풍언의 결심은 3년 동안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하는 결심으로 고오베의 신가와에 있는 빈민굴목회를 시작한다. 그 빈민굴은 병자, 전과자, 도둑, 깡패, 창녀 등 일본의 밑바닥 인생들이 총 집합한 곳으로써 일본에서도 유명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 한가운데서 목회할 때 깡패들은 수시로 칼을 들이대며 돈을 내놓으라고 했고, 돈이 없을 때에는 입고 있던 옷까지 빼앗겨 밖에 나가지 못하고 갇혀있을 때도 있었다. 어느 때는 깡패들에게 매를 맞고 이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어린이 청부 살인자에게 넘겨진 창녀들이 낳은 아이들을 기르는 등 자신은 폐결핵 외에 축농증, 안질, 심장, 척추까지 병이 들어 죽어가면서도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빈민굴 속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폐결핵 환자의 용변을 도와 밑을 닦아주고 또 버림받은 아이들을 돌보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밑을 닦아주었으므로 사람들을 그를 “밑닦이 신학자”라고 불렀다. 풍언은 거의 모든 일생을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봉사했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다가 여러번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며 일본 전국 주요 도시의 공장지대나 빈민굴의 가난한 사람들과 노동자들을 위하여 소비조합, 신용조합, 의료조합, 영양의 배급소를 세워 사회복지사업도 하였고, 예수단이란 기도모임을 조직하기도 했다.
자신의 건강은 돌볼 겨를도없이 동분서주 뛰어다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어느새 폐결핵은 치료되어 있었고, 1913년에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신혼부부가 달려간 곳은 휴양지가 아니었다. 빈민굴이었다. “여러분 여러분들을 위하여 식모 한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제 아내이면서 여러분들의 식모입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필요한 분은 어려워말고 말씀해주십시오”
참된 결혼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게다. 인간중심의 결혼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결혼이며 빈민굴 전도를 위하여 두 사람은 같은 신앙관과 사명을 가지고 결혼을 한 것이다.
다음은 청빈에 대한 하천풍언의 찬양고백이다.
“나로 하여금 청빈을 찬양하게하소서 다다미 2장짜리 방에 살면서 12년 동안 방문한번 잠궈본 적이 없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는 몸이라 아무것도 빼앗길 것도 없고 또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입은 옷 한 벌로 돌아다니니 옷차림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또 그럴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길가다가 청소부의 똥차 뒤도 밀어줄 수 있고, 그 청소부와 어울려도 꺼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양복을 차려입고 강단에 나서서 그 ‘예의’라는 도덕에 얽매이게 된 뒤부터는 그 청소부와 멀어지는 것 같아 서러웠습니다.”
이처럼 하천풍언이 밑닦이 신학을 실천하여 많은 이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했다면 칼빈은 기독교의 핵심진리를 연구하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을 섬겼다.
칼빈은 종교개혁을 주도하고 프로테스탄트의 신학을 교리화, 체계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가톨릭의 인본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교리를 성경중심으로 복음화하고 체계화하는데 일생을 헌신했다. 칼빈은 제네바시를 중심으로 신정통치를 했는데, 하나님의 준엄하시고 공의로운 측면을 강조하며 개신교를 이끌었다. 칼빈이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신정통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들, 불순한 것들, 마땅히 하나님의 빛에 어긋나는 세속적인 것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해서 당시 이단자들에게 준엄한 심판을 했는데, 그의 사명은 기독교의 교리를 체계화하여 섬길 때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강하게 역사했다.
그러나 프랜시스(Francis of Assisi, 1181-1228)는 성경진리를 체계화하지는 못했지만 사랑이 너무 많아서 순간순간 불쌍한 사람을 보거나 나환자를 보면 옷이라도 빨아주어야 하고, 고름도 빨아주고, 같이 울어주며 가슴 아파하는 그런 사랑을 지녔다. 그는 수도자로서 청빈, 순결, 순명 아래 철저하고 단순한 삶을 살았다. 프랜시스는 불학무식하지만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어 맨발에 구걸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의 심령에 천국을 호소하였다. 프랜시스는 평생 단벌옷을 입고 피고름 나는 문둥병자들의 고름을 빨며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였다. 그들은 누구를 가르치려 들기보단 말없이 행동하므로 그리스도를 드러냈다. 구제가 필요한 곳을 찾아다니면서 아무 보상도 없이 땀을 흘리며 노동해 주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냈는데, 성경지식도 모르고 목사안수도 안받은 그를 통해 중세의 암흑이 서광을 비추기 시작했고, 이 빛은 8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수도원의 주방에서 15년간을 보내면서 매순간순간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로렌스형제가 있다. 주방에서 몇십년을 지내다가 후에는 신발 수선실에서 일했는데,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작은 일에 임할 수 있다는게 자신의 가장 큰 기쁨이라고 말하는 로렌스는 신학을 한 적도 목사안수를 받은 적도 없지만 부엌에서 허드렛일을 통해 목회를 일궈낸 사람이다. 오매불망 오직 한가지 목표는 밥을 할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빵을 구울 때나 남의 신발을 수선하는 일을 할 때도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일이었다. 로렌스 형제는 설거지를 찬양의 방법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다만 일상적인 일을 찬양의 기회로 삼았을 뿐이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찬송하며 끊임없이 ‘테 데움’(Te Deum, 오,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을 부르는 그의 마음만큼은 어쩌지 못했다. 시시한 일을 맡아 했지만, 덕분에 로렌스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주님을 찬양할 공간을 얻었다. 업무가 많아 자기도모르는 사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산만해지면 어떤 식으로든 주님께 신호를 보내 다시금 그의 심령을 하나님으로 꽉 차게 했다. 그것이 얼마나 기뻤든지 어느때는 마음에 불씨가 당겨진 사람마냥 그저 큰 소리로 찬양부르고 싶고 외치고 싶고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고 싶을 만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생활은 그의 생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기술도 지식도 필요치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분께만 드려진 마음이라 고백한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른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속에 온전히 묻힌다는 최종목표에 도달함에 있어서 잠시 수단이 되는 것들로서만 취급되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지닌 사람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믿음을 지닌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법을 깨달은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가지 덕목을 연습하는 사람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다.”
로렌스 형제가 설거지를 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모습은 성령의 은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생활방식이다.
그밖에도 교회사속에서 성자라 일컫는 위대한 신앙인들을 보면 모두가 생활인격, 환경, 규칙 등은 다르지만 자신만의 영성철학으로 수많은 성도들을 주님품으로 이끈 사람들이다. 로사(Santa Rosa de Lima,1586-1617)는 하루 10시간 노동과 10시간 기도하며 성화되었고, 리드비나는 38년간 병상에 누워 지내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도 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땅끝까지 온전하게 주의 나라를 증거한 썬다 싱(1889-1929?), 포학하기 이를데없는 문둥병 환자들을 끝까지 사랑과 인내로 간호해주고 자신도 문둥병이 걸리기도 했던 카타리나(CATHERINE OF SIENA.1347?-1380)도 하나님 앞에서 훌륭한 성도요 목회자다.
19세기말, 세상의 끝이라 여겼던 하와이에서 나환자들을 돌보다 결국 나병에 걸려 숨진 '문둥이 성자'로 일컫는 다미안은 하와이 군도 몰로카이섬에서 문둥병자가 되어 죽게 될 때까지 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섬의 생활환경 개혁과 의료기구 시설 확충 등을 위해 애쓴 목회자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12제자들, 성경속에서의 다양한 인물들 … 그들의 삶과 사상속에 이미 영성목회의 가능성과 그 출구를 하나님은 열어놓으셨다. 훌륭한 목회는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달려있다. 그 방법이 아무리 출중하고 뛰어나도 하나님을 향한 자세가 흐트러져있으면 아무리 큰 목회를 하고, 화려한 교회당을 가지고 있다해도 그는 분명 실패한 목회자다. 위의 교회사인물들을 소개한 것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자세와 태도를 배우자는 것이다. 세웠으면 섬세하게 자신에게 맞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들을 찾아내고, 찾았으면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로 성실하게 일궈간다면 영성목회는 교회시대 2천년의 역사속에서 무궁무진하게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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