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설교 단상(斷想) 1
본문 : 아가서 2:14
제목 : 네 얼굴을 보게 하라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한다.
지나간 인생의 흔적이 모두 얼굴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어떠한 시간을 보내며 살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면 안다.
현재 그 사람의 삶은 어떠한가?
기쁨, 두려움, 슬픔, 행복, 불행등 가지고 있는 환경과 모든 인격이 다 얼굴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어떤 신학자는 얼굴 신학을 말한다.
성도의 얼굴을 통해 신앙의 정도를 짐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얼굴 속에서 예수님의 형상이 있는가?
인생의 나이가 40이면 불혹이라는데 이는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나이다.
나이가 40이 되면 나름대로의 인생관, 신앙관, 가치관이 다 얼굴에 나타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 모든 것이, 얼굴로 드러나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맞는 것이다.
본문 가운데 솔로몬도 신부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고 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솔로몬은 예수님을 상징한다.
술람미여인은 누구인가?
이는 마리아요, 성숙한 성도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 각자의 모습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보시기를 원하는 얼굴은 어떠한 얼굴일까?
신랑되신 예수님은 사랑하는 성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를 원한다.
지금 세상은 온통 ‘짱’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짱’이라는 말은 원래 청소년들 사이에서 싸움을 잘하는 사람에게 붙는 부정적 의미의 말이다.그런데 2002년 대선 때 네티즌들이 노무현 후보에게 ‘노짱’이란 호칭을 붙이면서 긍정적이며 보편적인 뜻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의 다소 거친 말투로 하는 말을 듣는 재미가 있고 그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는 감동이 네티즌을 움직여서 ‘짱’이란 호칭이 붙게 된 것이다.
외모와 관련해서 지금 ‘짱’ 열풍이 몰아치고 있다. ‘얼짱’, ‘몸짱’도 있지만, 이제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예쁘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예뻐야 한다며 ‘맘짱’이라는 말도 나왔다.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보기 원하는 것은 얼짱이거나 몸짱이라서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얼굴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이런 신랑의 요청에 신부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야 한다.
사실 술람미 여인은 포도원 지기로 햇빛에 쬐어서 게달의 장막같이 검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모습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신랑이 사랑의 눈으로 볼 때 여인 중에 어여쁜 자다.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악1:8)
신랑이 여인들 중에 사랑하는 자는 오직 술람미 여인뿐이다.
그러므로 신랑은 신부를 향해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라고 한다.
아무리 추한 얼굴도 사랑하는 눈으로 보면 세상에서 가장 어여쁘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이렇게 신랑은 사랑하는 어여쁜 신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의 어떤 얼굴이 예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얼굴인가?
1. 주님은 항상 미소를 띤,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를 원하신다.
‘미소 띤 얼굴’은 마음에 있는 기쁨이 얼굴로 표현된 것이다.
참 기쁨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미소를 띤,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러므로 미소 띤 얼굴은 기쁨으로 사는 성도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 기쁨은 환경이 주는 것이 아니다.
참 기쁨은 주 안에 사는 성도에게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기쁨은 주 안에서 누리는 복이다.
(빌1:25) “내가 살 것과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너희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이라는 말은
‘믿음 안에서의 너희의 진보와 기쁨’이라는 뜻으로
‘믿음 안에서 성장하고, 믿음 안에서 기쁨이 있기에’라는 말이다.
믿음이 있기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기쁨도 없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언제나 기뻐할 수 있다. 믿음 안에 거하지 않으면 기쁨이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기쁨 자체다.
왜냐하면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시기 때문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믿음 안에 있는 우리에게 기쁨을 충만케 하셨기 때문에
주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방황하지 않고 참 기쁨을 누린다.
우리의 모든 삶의 기초 되시는 예수님 안에 있으면 믿음의 진보가 있고 기쁨이 있다.
주님이 보기 원하시는, 아름다운 얼굴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삶의 기초가 되어 어떤 상황에도 방황하지 않고 미소를 짓는 얼굴이다.
주님은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함으로 참 기쁨을 누리는,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를 원하신다.
성경에는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살라고 권면하고 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찌어다”(시100:1-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35:9)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37:4)
(시4:7)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이제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에 두신 기쁨이 얼마나 풍성하고 온전한 것인지를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욱 풍성하다고 고백한다.
새 포도주는 다윗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재산 증식의 수단이며 삶의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그것은 오늘날 돈과 명예, 육체적 즐거움 등으로 대변되는 세상 모든 즐거움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한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을 성도들의 마음에 주신다고 하신다.
우리의 마음은 ‘곡식이나 새 포도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참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기쁨과 만족이야말로 농부가 곡식과 풍성한 과일을 수확하는 것보다,
어부가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것보다, 더한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마지막 기도하신 내용이다.
기도 중 3절에는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한다.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도 내 기쁨을 이야기 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기쁨은 무엇인가?
이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이다.
창세 전부터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이다.
(시16:8-11)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이 기쁨의 원인이 되고 기쁨의 창조자가 되며 기쁨의 보증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하나님이 영생이시므로 죽음을 초월한 영생의 기쁨이고,
하나님이 말씀과 진리이시므로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 사는 기쁨이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사랑 안에 행하는 기쁨이고,
하나님은 절대 평안이므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의 기쁨이다.
예수님은 이 기쁨을 우리에게 충만히 주시기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기쁨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기쁨을 전해야 한다.
그들이 용서받는 기쁨
그들이 진리 안에 들어오는 기쁨
그들이 이 평안을 함께 누리는 기쁨을 교회는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이 기쁨을 가져 미소 짓는 얼굴을 내게 보게 하라고 독촉하신다.
2. 예수님은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 있는 얼굴을 보기 원하신다.
넉넉하고 여유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을 소유했기 때문에 누리는 여유가 아니다.
사람이 볼 때 부족한 것도 많지만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넉넉함이요 풍성이다.
내가 주님께 속하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풍성함을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하고 하시면서
“너는 내게서 불로 연단 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계 3:14-18)고 하신다.
“불로 연단 한 금”은 주님이 허락하신 믿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불로 연단 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말씀은
주님이 허락해 주신 믿음을 따라서 살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네가 진정 부요한 자가 된다는 말씀이다.
모든 소유를 가져도 믿음이 없는 자는 부요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믿음의 뿌리를 박고 주 안에 사는 사람은 부요한 자다.
바울은 빌4:11-13에서 고백한다. 진정으로 부요한 자가 누구인지 선포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3. 예수님은 사랑의 얼굴을 보기를 원하신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면 사랑의 얼굴이 된다.
아가서에는 술람미가 솔로몬을 계속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우리의 사랑하는 예수님의 별명이다.
1:2. 내 사랑
1: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1:13. 나의 사랑하는 자는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2: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2:4, 그 사랑이
2:7, 내 사랑이
2:8, 나의 사랑하는 자의
2:9, 나의 사랑하는 자는
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2: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3:1,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3:3,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3:4,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3:5, 사랑하는 자가
4:16, 나의 사랑하는 자가
5:2, 나의 사랑하는 자의
5:4, 나의 사랑하는 자가
5:5,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5:8, 나의 사랑하는 자를, 내가 사랑하므로
5:10, 나의 사랑하는 자는
6:2, 나의 사랑하는 자가
6:3,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나의 사랑하는 자는
7:10,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7:11, 나의 사랑하는 자야
8:4. 나의 사랑하는 자가
8:14, 나의 사랑하는 자야
반면 솔로몬도 술람미를 계속 내 사랑, 나의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는 성도의 별명이다.
1:9, 내 사랑아
2: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2:10, 나의 사랑
2:13, 나의 사랑
4:1, 내 사랑아
4:7, 나의 사랑
4:10, 네 사랑이
7:6, 사랑아
또한 예루살렘 여자들과 친구들도 고백한다.
5:9, 너의 사랑하는 자가
6:1, 너의 사랑하는 자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8:8.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부를 때마다 사랑하는 자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그 사랑이
얼마나 깊으며 그 사랑이 얼굴로 다 나타나고 있지 않겠는가?
사랑의 얼굴로 사랑하는 주님을 부르며 그 앞에 나가자!
4. 예수님은 감사의 얼굴을 보기 원하신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의 황태자 스펄전 목사는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했다.
“감사는 은혜받는 그릇이다.”
일본의 유명한 성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가 한 유명한 말이다.
이 말씀이 확실히 성경적이다.
그러므로 감사의 그릇이 클수록 은혜가 크게 임하고
또 감사하는 그릇이 많을수록 은혜도 많이 임한다.
감사가 왜 은혜받는 그릇일까?
1) 감사는 진정 하나님을 아는 자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진정 하나님을 안다면 항상 감사할 수 있고 그는 절대 긍정적인 믿음을 갖게 된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안 된다고 부정적인 보고를 하고 절망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았기에 믿음에 서서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그들은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멀린 R. 캐로더스가 쓴 ‘찬송 생활의 권능’을 보면
감사와 찬송이 얼마나 많은 기적을 불러오는지 간증이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수백만 부가 팔려나간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다.
감사는 놀라운 기적을 불러온다.
어떤 상황에서나 감사하는 전천후 감사는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좋으신 하나님, 그리고 나의 삶의 주관자가 되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한다.
현재의 상황이 좋든 궂든 나의 모든 환경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줄 믿고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떻게 하시든 감사드려야 한다.
그러면 감사와 찬송이 나오게 되고 하나님께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리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무엇이든 찬성하며
감사하고 찬송한다고 절대 하나님의 팬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로 알아 절대 감사, 절대 긍정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2) 감사는 진정 자기를 아는 자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고 또 자기를 알아야 한다.
진정 자기를 알면 감사할 수밖에 없다.
영원히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자를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랑으로
영생의 백성으로 택해 주신 것 얼마나 감사한가?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다.
진정 자기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진정한 구원의 감격을 아는 것이다.
이런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가 임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런데 약4:6의 앞부분을 보면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했다.
겸손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교회사에 기록될 만큼 크게 은혜받은 사람 성 프랜시스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어느 때 프랜시스의 제자가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갔다.
많은 보좌가 있었는데 그중 한 보좌는 눈에 띄게 높은 보좌였다.
그래서 그는 천사에게 물었다. "저건 누구 것입니까?" 천사가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랜시스가 앉을 보좌이지요."
그 말을 듣고 그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환상을 깼다.
그 제자가 어느 날 조용한 시간에 스승에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그 말을 들은 제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건 바로 위선입니다.
많은 사람이 선생님을 성자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강도, 살인자 등 온갖 악인들이 득실거리는데
어떻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가장 악하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바로 위선이 아닙니까?"
환상 중에 본 보좌에 은근히 시기하는 마음도 들었기 때문에 따진 것이다.
그러자 성 프랜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정말 나는 악한 놈이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으니까 오늘날 내가 된 것일 뿐이라네.
만약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라면
그 사람은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일세.”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로 이야기했다.
그 제자는 그때에야 스승을 제대로 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절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감사는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의 고백이다.
당신의 얼굴은 어떠한가?
예수님이 보기를 원하시는 얼굴인가?
기쁨의 얼굴
부요한 얼굴
사랑의 얼굴
감사의 얼굴을 주님께 보게 하라
'말씀의 향연 > 每日 말씀의 壇上'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묵,선한말,징책,용서,회복 (0) | 2024.05.26 |
---|---|
시험을 만나거든 (0) | 2024.02.01 |
完全에 대한 小考 5 -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보이신 완전의 길 2 (0) | 2021.12.03 |
完全에 대한 小考 4 - 이스라엘백성들을 통해 보이신 완전의 길 (0) | 2021.12.02 |
完全에 대한 小考 3 - 완전의 길 (0) | 2021.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