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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권과 인내

by Andrew Y Lee 2012. 9. 14.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에 사람들의 모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중 ‘조급하며’라는 말을 하고 있다.

마지막 때는 사람들이 조급하여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참 급하다.

우리나라에는 '빨리'라는 말 이외에 '싸게', '얼른', '속히', '퍼뜩', '후딱', '잽싸게', '불티나게', '재깍', '급히', 등 많은 표현들이 있다.

거기다가 '총알같이', '번개처럼' 등의 단어도 있다.

전부 얼마나 조급하게 사는지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때에 더욱 인내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겠다.

끈기와 인내는 우리에게 좋은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인내는 귀중한 것들을 잃지 않고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시련이 닥쳐올 때에 그 시련을 이겨서 믿음의 성장과, 인격의 성숙을 가져다주는 것이 인내인 것이다.

우리가 먹는 꿀 한 숟가락은 꿀벌이 4천 2백번이나 꽃을 왕복하며 얻은 것이라고 한다.

영어사전 웹스터를 집필한 웹스터는 36년 동안 밤낮으로 노력을 하여 사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내 없이는 이루지 못하는 일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작곡가 요셉 하이든은 8백 개의 작품을 작곡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천치창조라는 오라토리오는 66세가 되어서 8백번이나 작품을 써본 후에 완성한 것이다.

시스턴 채플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도, 8년 동안 2천 번이나 스케치해본 결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내 없이는 성공할 수가 없다.

 

 

성경에는 인내가 없어 망한 사람들이 많다.

그 중 장자권을 판 에서는 인내하지 못하여 망한 대표적인 예다.

잠시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고 말았다.

성경에는 그러한 에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에서가 들에서 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창25:29-30)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25:32)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이 여김이었더라” (창25:34)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히12:16)

야곱의 형 에서가, 참을성과 인내가 없어 팥죽 한 그릇과 바꾸고만 장자권을 무엇이기에

그토록 중요한 것이었을까? 성경은 그러한 에서를 왜 망령된 자라고, 경홀히 여겼다고 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에 별과 같이 바다에 모래와 같이 후손들이 많아 질 것이라 말씀했다.

그리고 그 가문에서 예수님이 올 것을 약속하셨다.(창22:17-18)

그리고 이 약속은 그 장자인 이삭에게 이어졌다.(창26:3-4)

그리고 그 약속은 당연히 장자인 에서에게 이어져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장자권을 받은 야곱에게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창28:3-4)

그러므로 장자권을 버린 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약속하신 가나안땅은 이 세상의 땅이 아니다.

그것은 천국의 기업이요, 하늘 가나안인 천국의 모형에 불과한 땅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가나안에서는 나그네처럼 외국인처럼 지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하늘 본향에 한성을 준비하시어 언약을 이루셨다.(히11:16, 12;22-23)

장자권을 버린다는 것은 천국의 기업을 버린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육신의 배를 채우기 위하여 하늘의 기업을 버리는 망령된 자들이 있다.

저들의 신은 배라고 성경은 말한다.

어린양의 천국혼인잔치를 준비하시고 아무리 초청을 하여도, 다 세상일로, 먹기 살기 위하여,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로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이다.

 

 

또한 장자권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하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나타나게 하시어 사단의 발꿈치를 치시고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로 정하셨다. 그런데 그러한 가문의 장자가 되지못함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소홀히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다.

또한 장자권을 버린다는 것은 미래의 축복을 거절하는 것이다.

장자권을 받는다고 당장에 이 땅에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장자권은 장래 천국에서 받는 미래의 축복인 것이다.

이렇듯 장자권을 버린 것은, 약속의 기업도, 하나님의 구원계획도, 미래의 축복도, 모두 소홀히 하고

전부 버리어 망령된 자가 된 것이다.

육적인 것을 위해서 영적인 것을 헌신짝 버리듯 버린 것이다.

에서는 보이지 않은 미래를 가볍게 여겼다. 바로 이것이 에서의 문제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과 욕심을 좇아 행동한다.

우리 또한 팥죽 한 그릇에 미래도 자존심도 팔고 있지 않는가?

신앙인들은 미래의 축복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사람들이다.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즐거워하는

사람들이다.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한국의 중산층 기준과

프랑스의 중산층을 비교한 글을 보았다.

한국의 중산층 기준은,

1. 부채없는 아파트 30평 이상 소유 2. 월급은 500만 원 이상 .

3. 자동차는 2,000 CC급 중형차 소유 4. 예금액 잔고가 1억 원 이상 보유

5. 해외여행 1년에 한차례 이상 다닐 것 등이다.

 

반면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1. 외국어를 하나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고 2.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3.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4. 남들과는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5. '공분' 에 의연히 참여할 것 6.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 등이다.

 

왜 기독교인구가 많은 한국인들이

땅의 축복에만 기준을 두는 것일까?

에서처럼 땅의 것 때문에 망령된 자들이 되지 말자.

인내하자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