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문
내가 소개하고저 하는 방애인양(方愛仁孃)은 조선이 낳은 성자(聖子)이다. 그에게 느낀바 있어서 그의 생활을 그대로 묻어 둘수가 없다. 더욱이 과도기에 처하야 앞길이 막연한 조선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할까’ ‘어디로 갈까’ 비장하게 외치고 방향을 찾는 자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생활을 그대로 따라간 방애인양의 삶을 알게 하고저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하야 졸필임을 불구하고 내가 그를 보고 들은대로 또는 그의 고향인 황주(黃州)를 찾아 그의 부모님들에게 눈물겨운 일화(逸話)를 듣고, 남겨둔 적은일기 두어 책을 얻어서 옛사람이 된 방애인양보다 장차 움터 나올 미래의 수많은 조선의 성자를 향하야 이 적은 전기를 썼다.
원하건대 조선의 청년이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통하여 새생명이 넘치라.
조선의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자취를 따라서 힘차게 걸으라!
이글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김선기(金善琪)선생이 한글 맞춤법 통일한 대로 고쳐 주심에 대하야감사의 뜻을 표한다.
1933년 12월 25일
배은희
재판에 즈음하여
나의 경애하는 배은희 선생의 설교하시는 중에 방애인양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행적을 출판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부흥사업으로 분주하게 다니시는 배목사를 도와서 이책을 발행하는 일에 힘쓰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나 역시 기독신보사의 일과 교회의 일로 분주하여 성의를 다하지 못한 것이 미안하던중 이 소전이 세상에 나온지 한달이 못되어 수천권이 다 팔리고 이제 교정하여 재판을 발행하게 된 것을 기뻐한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간 방애인양의 성자적 산 기록인 동시에 우리사회에서 예수님의 교훈을 생활화하여 방양과 같이 자기를 희생하여서 남을 살리는 참 그리스도인을 절실하게 요구하는 까닭이다. 그뿐 아니라 그의 끓어 오르는 진정한 생활은 독자로 하여금 머리를 숙여 과거를 회개하고 새결심을 하게 한 것이다.
말만하고 알기만하려는 세상에서 또는 주님의 영화만 맛보려는 현대 교인들에게 큰 충동을 일으키는 이 글이 이렇게 애독되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그 믿음을 더 실행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반향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의 재판을 심축하고 아울러 또 판을 거듭하여 2천만뿐 아니라 사해에 널리 퍼지기를 기도한다.
1934년 4월 부활절
인왕산하에서 심명섭
조선성자 방애인소전
제 1장 출생
영직선(永直線)인 시간적 선로에서 수 없는 공간차(空間車)들은 다름질 쳐 흘러 간다. 이 빨리 흐르는 시간에 육척의 몸을 가지고 난 인생은 5, 60년의 이정을 지나면 이 몸을 벗어 버릴 죽음의 정거장임을 누구나 다 아는바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이 몸의 소욕을 좇아서 영원한 시간을 통하여 있는 영(靈)에게 무쌍한 누(累)를 끼쳤다.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리오 하신 성 바울은 육신의 법과 영의 법이, 서로 싸워 모순(矛盾)과 분열(分裂)을 느낌에서 구원자를 열구(熱求)한 동시에 진리를 찾는 인간에게 이김의 생명을 보여준 것이다. 육(肉)의 법을 정복하고 영(靈)의 법에 복종하는 이 분수령(分水嶺)을 넘어 선 생활은 누구나 다 성자의 생활일 것이다.
말라기로부터 세례 요한 때까지 선지의 외침이 없던 유대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요한은 외쳤다. 그러나 완미(頑迷)한 유대인들은 오히려 그를 사귀 들렸다 하였다.
성자도 드물거니와 성자를 알아 주는 시대도 쉽지를 아니하다. 보라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 하기보다 차라리 종교의 나라이라하겠다. 유교(儒敎)로부터 삼강오륜의 사상과 불교로부터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상은 2천만 성자신손의 마음 속에 뿌리 깊이 자라났다. 유교로서의 그 진리를 위하여 공후백작(公侯伯爵)의 지위를 던지고 시골을 찾아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보내는 성자도 적지 아니하였고 불교로서의 그 진리를 위하여 심산 궁곡을 찾아 고행의 생활로 일생을 바친이도 적지 아니하다.
유, 불교의 단련(鍛鍊)과 훈도(薰陶)를 거듭한 조선의 마음에 기독교가 그 씨를 뿌린지 벌써 50년을 맞게 되었다. 반세기의 빛나는 역사를 가진 조선의 기독교는 현대의 바울이란 인도(印度)의 성자 썬다 싱을 연상하게 할 성자를 낳았다. 그는 곧 내가 소개 하고저 하는 방애인양이다.
그는 1909년 9월 26일 황해도 황주읍(黃州邑) 벽성정(碧城町) 52번지 방중일(方中日)씨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그의 조부 방흥복(方興福)씨때로부터 자선사업에 이름이 높은 가정이다. 이러한 집안에 난 애인양은 어릴 때로부터 그 조모 정신복씨와 그 어머니 김중선씨의 많은 감화를 받았다 한다.
그들은 자비의 사람이요, 신앙의 사람이요, 그들의 날마다 하는 새벽 기도는 신(神)의 감응(感應)인 동시에 어린 애인양의 후일의 생활이었다. 비록 신학(神學)의 교양은 없다 하나 그 어머니의 품은 곧 그의 신학교였다. 이 거룩한 품속에 고이 고이 자라나는 어린 애인은 누구나 다 끝없이 사랑하였다. 한번이라도 책망할 일이 없었다 한다. 더욱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어린 때부터 이 같은 거룩한 환경 속에서 깊이 깊이 젖어 왔다.
제 2장 학창생활
그는 일곱 살 되던 해 4월 1일부터 황주읍 양성(養性)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의 위치는 황주에서 가장 좋은 곳이다. 준준한 산이 내려오다 멈추고 적은 머리를 내밀은 나직한 언덕 위에 수천호의 거리를 한눈으로 내려다 볼수 있는 지점이다. 앞으로는 가느다란 실 내가 흐르고 시내 건너편의 넓은 들판에는 오곡이 가득 실렸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애인양의 어린 마음에 성자적 인생관을 싹트게 한 곳이 이것이 아닌가 한다. 그뿐 아니라, 이 학교의 설립자가 기독교인이니 만큼 기독교적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학교는 이를 그대로 지적 방면보다 심적 방면으로 아동의 덕성을 함양(涵養)함에 고심하였다. 그는 이 학교 출신으로 현금 시무하는 목사가 아홉 사람이나 됨을 보아 가히 알바이다. 애인양은 입학한 때로부터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의 결석이 있었을 뿐이요 한번의 조퇴나 지각 조차 없었다 한다. 이 한번의 결석에도 그의 아버리로서 영원히 잊히지 않는 숨은 이야기가있다한다.
입학하던 바로 그 다음해 곧 애인양의 여덟살때의 일이다. 그는 배가 아파서 학교를 결석 하였다. 그 부친은 매로 어린 딸 애인의 종아리를 쳤다 한다. 아버지는 애인이가 꾀배를 앓는줄 생각한 것이다. 자기의 어렸을적 경험을 딸에게서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애인은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아버지의 때리시는 매를 맞았다.
그후 하루와 같이 보내고 열세살 되던해 3월 25일에 전교(全校)의 최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열세살된 어린 애인양은 드디어 사랑하시는 부모님의 따뜻한 품을 떠나 부급종사(負芨從師)의 길을 밟게 되었다.
서선의 제일이란 평양(平壤)을 찾아서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에 입학하였다. 천재는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현금 교육제도로서야 천재도 학교를 거치지 아니하면 안된다. 천재인 애인양은 언제든지 최우등이었다. 그뿐 아니라 품행이 아름다워 여러 선생들에게 끝없는 칭찬을 받았었다. 심지어 당시 교장이던 선우(鮮于)씨는 어린 애인양을 등에 업고 아래윗층으로 승강기(昇降機) 노릇을 하면서 공부를 시켰다 한다. 불행히 삼학년 되던 해에 학교내의 불상사로 인하여 학우(學友)들이 사방으로 흩어질적에 애인양도 부득이 개성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開城好壽敦女子高等普通學校)로 전학하여 1926년 3월 23일에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시 이화동산(梨花東山)을 찾아 문과에 입학하고저 하였으나 부모님의 승낙을 얻지 못하여 취학(就學)의 끓는 욕망을 억제하고 후일의 기회를 기다려 드디어 전주기전여학교(全州紀全女學校)에 교원으로 취임하였다.
제 3장 거룩한 생활의 동기
방애인양은 1926년 4월 1일 전주기전여학교에 부임하였다. 양이 전주로 올때에는 동창생인 김정임(金貞姙)양과 같이 왔던 것이다. 나는 그 일년 전에 개성에 약 일주일동안 체재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호수돈 강당에서 두어번 설교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들은 자기 생활의 모든 것을 가림 없이 나에게 간담한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양의 기전여학교에 시무한동안은 2기로 나눌수가 있으니 제 1기는 1926년 4월 1일부터 1929년 3월까지다. 제 1기에는 학창을 떠나 사회생활에 첫거름을 내디디던 때라 보통 평범한 한낱 신입생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의 방정한 품행과 경건한 믿음의 생활은 누구나 다 칭찬하였다. 더욱이 교회에 대한 의무를 실행하는 것과 교회를 존경하며 순종하는 태도는 근래 소위 비교회주의로 떠드는 청년들로서는 미신이라 할만큼 진실하였다. 그가 제 1기 전주를 떠날때에 일반 교우는 물론이어니와 그때 목회자(牧會者)인 나로서는 무한히 섭섭함을 느끼었다. 그리하여 주일밤 기도회 석상에서 그의 떠남을 소개하면서 다시 오셔 달라는 말로서 석별의 눈물을 지었었다.
그때 양은 고개를 숙이고 느껴 울었다. 드디어 그는 어떠한 결심한바가 있어서 자기가 가장 신임하는 친구에게 이러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한다.
“나는 전주에 와서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천여명 교우들이 눈물로 보내니 두렵기 짝이 없다. 하나님의 허락이 계시면 다시 와서 목사님이 오늘밤에 하신 말씀이 헛되지 않게 생활해 보리라”
양은 전주를 떠나 모교(母校)인 황주양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2년간 고심 분투함으로 모교의 교운은 날로 왕성하였다.
세월은 흐르고 역사는 변한다. 전주기전여학교는 그후 교원 갈아들기를 실로 빈번히 하였다.
사람의 힘이 부족할적에는 신(神)의 섭리(攝理)가 이르는 법이다. 신은 방애인양을 다시 전주로 보내시었다. 기전여학교는 다시 방선생을 맞게 되었으니 때는 1931년 9월 1일이었다.
양은 벌써 제 1기의 방선생은 아니었다. 향수니 크림이니 하는 화장품은 자취도 볼수가 없을뿐만 아니라 값진 주단이니 세루니 하는 옷감조차 그에게선 찾아 볼수가 없었다. 그는 하늘이주신 얼굴 그대로의 사람이요, 검박한 단벌 옷의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기도의 사람이요, 성경 읽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전도하는 사람이요, 눈물의 선지자였다. 그는 병든자의 친구요, 슬픈자의 위로이었다. 그는 거지(乞人)의 친구요, 싸우는 자의 화평이었다. 그는 저주와 불평이 없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요, 간휼과 궤사(詭詐)가 없는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믿음과 인내(忍耐)의 사람이요, 기쁨과 화평과 용기의 사람이었다.
그는 산중(山中)의 성자가 아니요, 거리의 성자이며, 그리스도에게 대한 절대 복종의 성자였다.
그는 세상을 비관(悲觀)하는 성자가 아니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이었다. 그는 스승이 되려는 교만한 성자가 아니요, 형제의 발 아래에 엎드려 겸손히 섬기는 성자이었다. 그는 죄인에 대한 책망의 성자가 아니요,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이었다.
양의 이 거룩한 생활의 동기를 묻는자가 있으면 양은 고요히 웃을뿐이었다. 그는 제 1기에 전주를 떠날적에 결심한바를 말하던 친구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한다. 자기는 언제나 주님의 지신 십자가를 맛보려고 심히 갈급하였더니 어느 부흥회 석상 마지막 새벽에 부흥목사의 기도를 받고부터 자기도 모르게 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다. 진실로 찾고저 헤매이는 자에게 성신으로 주시지 아니하리오 떡을 달라는 자식에게 돌을 줄 부모가 없을 것이다.
양의 손으로 기록한 일기의 1절이다. “1930년 1월 10일에 나는 처음으로 신의 음성을 듣다. 눈과 같이 깨끗하라. 아아! 참 나의 기쁜 거룩한 생일이다”하였고 계속하여 11일 일기에 “나는 어디로서 인지 손벽치는 소리의 세 번 부르는 음향(音響)을 듣고 혼자 신성회에 가다. 아아! 기쁨에 넘치는 거름이다”라 하였다.
이 일기는 곧 부흥회 때에 은혜를 받은 것이다. 주의 음성이 임함을 듣고 양은 새 나라를 향하여 가는 나를 금하지 말라는 태도로 굳센 주의 증인(證人)이 된 것이다.
오오! 조선의 청년들이여! 더욱이 교회의 청년들이여! 여러분의 가슴에 손을 얹고 들어보라. 고요히 귀를 기우려 심장의 뛰는소리를 들으라. 내가 과연 진리를 찾는 사람이뇨. 그러하지 아니하면 찬양대니 청년회니 하는 바람에 움직이는 사람이뇨. 내가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뇨. 그렇지 아니하면 기도하는 모양으로 지내는 사람이뇨. 내가 과연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복종하는 사람이뇨. 그렇지 아니하면 성경은 읽는 글이요 믿는 교리이지 실행을 어떻게 하나 하는 사람이뇨. 내가 과연 진심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뇨.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의 주견을 고집하여 교회를 분란하게 하는 사람이뇨. 나는 누구뇨.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이뇨. 이 우로 오는 소리를 들으라.
“눈과 같이 깨끗하라” 하늘의 소리를 듣고 새 나라를 향하여 걸어 가던 방애인양의 거룩한 생활을 체험하라.
제 4장 친족에게 나타난 기도의 신비
양의 커다란 괴로움은 친족의 구원(救援)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황주의 초대 교인으로 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타락하고 말았다. 황주는 예로부터 남자면 대개 첩을 두는 음란한 고을이다. 그의 아버지는 본부인에게 아들이 없다는 핑계로 제2 부인을 두게 되었으니 이것이 타락의 첫거름이었다. 이 타락의 길을 밟은 아버지는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게 되니 다소간 갖었던 재산도 어느덧 탕진해버렸다. 이렇게 파산의 어려움에 빠질수록 그는 구원의 길에서는 점점 멀어졌다.
애인양은 그러나 가산의 탕진을 걱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의 영혼의 타락을 슬퍼할뿐이었다. 혹 어머님이 가산의 탕진을 걱정하시면 양은 고요히 어머님의 손을 만지면서 “어머니 아버지는 이보다 더 큰 고통을 받으셔야 회개하실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고통이 있더라도 그로 인하여 회개만 하신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하면서 어머님을 위로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한다.
아버지의 구원을 위하여 눈물과 괴로움으로 고심하고 애를 태는 애인양을 본 교회 목사 방경모(方敬模)씨는 말하되 양이 아버지의 회개를 위하여 애통함은 참으로 볼수가 없었다 하며 진리로 위로도 하여 봤고 또 매일 정오에 종소리가 나면 그의 아버지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기로까지 약속하였다고 한다. 양은 이 세상을 떠나던 시간까지 아버지의 구원을 위하여 참아 눈을 감기 어려웠다 한다. 양의 손으로 기록한 일기의 일절을 보면 이러하다.
“1932년 1월 5일 주께서는 나를 위하여 40일을 금식기도를 하셨다. 나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며 또 내 아버지를 위하여 무엇을 하느뇨. 나는 이제부터 매일 아침을 먹지 않고 기도하리라. 아버지가 회개할 때까지 그러나 계속할는지 나는 작정할 수가 없다. 신이 능력을 주시는 대로 하겠다”
이 결심을 한후 양은 죽던날까지 아침을 안먹었다한다. 처음에는 남들이 몰랐으나 점점 온 학생들이 알게되고 온 교회가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동무들은 손을 잡고 권하나 차차 먹지요 하는 한마디의 대답뿐이다. 그의 어머님은 너무도 안타까워 “얘야 예수님께서도 40일을 금식하셨는데 너는 벌써3년이나 되니 이제는 고집하지말고 먹고 기도하여라”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언 반사의 대답도 없이 고요히 웃을뿐이다. 그리고 양의 몸은 점점 든든하여간다. 양의 얼굴은 전보다 더 피어올라 아름다워졌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몸에 신비한 광채가 남을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전에는 무슨 병이 있지나 아니한가 심지어 혹은 그의 폐가 약한 것 같다고 한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금식할수록 이적적으로 건강해졌다. 혹 어떤 사람이 금식하는데 그러냐고 물으면 “글쎄요 주께서 주시면 되지요” 할뿐이었다. 언제든지 그는 자기의 일을 남에게 알게 한적이 없다. 초강(楚江) 어부격으로 누가와서 나에게 흥망을 물으면 빙긋이 웃으며 갈대꽃과 저달과 한 배를 가르칠뿐이었다. 그가 고요히 웃는 태도는 실로 천사의 화평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뉘우칠줄을 몰랐다. 양의 마음은 참으로 괴로웠으리라. 그의 일기에 아버지의 회개를 위하여 밤새워 기도하다가 기록된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사교에 능란하였다. 따라서 사귀는 친구가 많게되니 남의 보증을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 아무개라는 친구가 조선일보지국을 경영할적에 보증을 서준일이 있었다. 김씨는 지국경영에 실패하여 결국 2천2백원의 빚을 지게되니 그 빚을 물게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재판을 하였다. 그러나 필경 물게 되었다. 바로 그땟 일이다. 양은 여자기독교청년회 수양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가게되고 아버지는 재판사건으로 서울에 가게 되었다. 그때 고모의 집에 유하였다. 다음글은 그때 일기의 1절이다.
“1932년 7월 22일 나는 경성 수양회엘 갔었다. 아버님은 보증한 돈 2천2백원이나 물게 되어서 대단히 근심하시어 어쩔줄을 모르시는 모양이다. 자식된 나는 어찌 하리오 오직 구원자는 위에 계시다. 그리하여 나는 경성 고모님과 약속하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였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보라 2천2백원을 2백2십원으로 탕감함을 받았다한다. 우리집 사활 문제가 달린 이 크나큰 문제를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어떻게 되었으랴. 주님외에는 누가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키리오. 아아! 감사하나이다. 찬송하나이다.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시여!
양의 사촌형은 평양 믿지 않는 가정으로 출가되었다. 양은 방학기를 이용하여 전도하러 평양으로 갔다. 때마침 그 형은 진남포에 볼일이 있어 가고 없다. 양은 실망하였다. 그는 일기에 “1932년 8월 19일 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을 무릎쓰고 왔는데 형님은 진남포로 가시고 계시지 아니함으로 나는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다. 큰어머님과 같이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묵시하심이 내게 임하여서 이 밤에 형님이 오실 것을 믿고 있었다. 과연 그 날 밤중에 형님은 오셨다. 오시는 길에 도적 같은 사람을 만나서 크게 욕을 보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무사히 왔다 한다. 그 시간을 물은즉 내가 큰 어머님과 힘써 기도하던 시간이다. 아아! 우리 형님을 도우신이는 곧 나의 하나님이시다. 또 내가 기도하고 바라던것도 형님으로부터 쾌히 승낙하시었다. 오오! 주님의 사랑은 얼마나 달고 맛이 있는지 맛본자 외에는 알수가 없도다”라고 쓰였다.
제 5장 병자에게 보여준 그리스도의 사랑
사복음에 나타난 사귀 들렸다는 병은 대개 정신병자를 가르친것인데 예수님은 말씀의 능력으로 낫게 하셨다. 그 말씀 속에는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이 곧 나타난 것이다. 결코 의사가 약으로써 치료하는 그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지금도 예수님의 생명은 그에게 속한자의 손을 통하여 병자에게 나타난다. 그는 곧 권능만이 아니요 사랑이다. 예수님에게는 말씀의 능력이나 예수님께 속한자에게는 사랑의 능력이다. 병자를 진심으로 사랑함이 없고 권능을 빌어서 병을 낫게 한다 함은 오해다. 그는 미신이 될뿐만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우리의 말을 통하여 능력을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통하여 능력을 보내시는 까닭이다. 이제 양의 병자에 대한 태도를 보자.
어느날 길가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섰다. 그속에는 나이 많은 정신병자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르 에워싸고 구경거리 같이 놀리며 떠들었다.
놀림을 받는 노파는 반항과 저주로 중얼거리면서 슬퍼하였다. 이를 본 애인양은 병자의 곁으로 고요히 가서 눈물을 머금고 병자의 손을 잡아 인도아였다. 둘러선 구경꾼들도 감격의 눈물에 젖었다. 양은 그를 학교 부근 강필남(姜弼南)씨의 집에 데려다 두고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
“불쌍한 할머니를 수남이 어머님댁에 두고 목욕 시키고 새옷을 입히고 식비를 담당하기로 하다”그는 기회만 있으면 정신병자를 데리고 기도를 하였다. 병자는 때마다 정신이 혼돈하여 광기가 발작되었다.
“이 불쌍한 노인이 헛소리를 하면서 날뛰며 괴롭게 하니 수남이가 집에서 나가라고 한다. 나는 너무도 가엾어 하나님께 깊은 눈물로 기도하였다. 과연 그의 정신은 좀 깨끗하게 되었다. 아아! 이는 나의 무거운 짐이다. 그러나 주께서 맡으시니 나는 평안하다. 김선례(金善禮)선생은 참으로 얼마나 애를 써주시는지!” 일기에 이렇게도 쓰여있다.
이 일기를 보면 양이 정신병자를 위하여 그의 가슴을 얼마나 태웠는지 우리는 잘 알 것이다. 주님은 능력으로 당장에 낫게 하셨지만 긴 세월을 두고 고심 초사하는 양의 마음은 진실로 성자의 마음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전라도는 남방이라 따뜻한 지방이다. 그리하여 문둥병자가 많은 곳이다. 때를 지어 다니는 병자는 자기네의 병을 무기로 하여 인가를 위협하며 침범한다. 현대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그들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아니한다. 그들도 역시 문둥이 자신들을 사람으로 생각지 아니한다. 선교사들이 경영하는 구제기관도 있고 공설기관도 있으나 간접으로 경제적 구제는 될지언정 영혼의 구제는 어렵다 누가 그들의 무너진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썩어가는 살을 만져주랴. 그는 오직 구주이신 그리스도뿐이시다. 문둥병자는 시대를 통하여 있건마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누구를 통하여 그들을 만져주실까. 그는 성자 방애인양이 아니던가. 양은 문둥병을 더럽다 하지아니하고 24세의 처녀의 손으로 그들의 썩어가는 살을 어루만지며 더운 눈물로 기도 하였다. 그의 기도는 이렇다.
“주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의 능력과 사랑이 내 손을 통하여 이 괴로운 병에서 구원하여 주옵소서! 주시여 자비와 긍휼을 아끼지 마시옵소서!”
이 간절한 기도는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씨를 깊이 깊이 심었다. 그들의 손등에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그들의 썩어가는 살을 소생하게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학교를 찾아 성자의 눈물을 구한다. 성자의 눈물은 그들의 생명수이다. 주께서 말씀 한마디로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신 그때나 다름이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게 하였다.
양은 동무자(同務者)인 최약실(崔約實)선생을 사부(師父)로 섬기었다. 최선생은 우연히 병으로 고생하다 못하여 결국 사임하고 해주 요양원을 향하여 치료의 길을 떠났다. 양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기로 결심한후 해주요양원으로부터 전치되었다는 편지가 오기까지 기도하였다. 그때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혔다.
“오늘 밤은 참으로 괴로운 밤이다. 사랑하는 최선생님은 전주를 떠나실 때에 병환으로 어떻게 가실까 하였더니 뜻밖에 좋은 동행도 있고 병도 좀 나으셨으므로 잘 가시었다. 주님은 환란중에도 피할 길을 열어주심을 깨달았다. 오오! 주시여 최선생님의 병을■”
동무자(同務者)중 또한분은 김선례선생이었다. 그는 역시 몸이 약하였다. 퍽 사이좋게 지내는 친구로서 그는 우연히 병으로 고통하였다. 그때의 일기다.
“2월 28일을 보내던 밤이다. 밤을 새워 기도하기로 하고 김선생의 병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였다. 밤이 지나 이튿날 아침에 방에 들어가 본즉 병 증세가 점점 물러가고 밤에는 평안히 잤다한다. 그날부터 건강하여 졌다. 내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께 어떻게 감사하리오. 주는 나의 힘이시오■”
또 그의 간곡한 기도와 신비한 영적 체험담을 다음 일기에서 볼수가 있다.
“오늘은 2월 26일 주일이다. 한 십일동안 잔등이 치움을 느끼면서 병으로 누어 또 예배당에 참예하지 못하였다. 외로히 기숙사에 누어서 나에게 있는 모든 짐을 생각하고 뜻밖에 괴로움을 느꼈다. 그때에 나는 믿음이 퇴보되었구나 남을 참마음으로 사랑하지 못하였구나 주님을 참으로 의지하지 못하였구나, 아아! 나는 불충한 종이다. 눈물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기도하였다. 기도하다가 성경을 보고저 하여 책을 펴니 마침 시편 50편 22절을 보게 되었다.
‘네가 멘 짐을 여호와께 부치라. 너를 붙들으실것이니 의로운자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라’ 성경을 덮고 다시 기도할때에 더 간절한 기도이었다. 홀연히 치운 기운이 물러가고 내 무거운 짐을 주께서 가져가심을 느끼면서 오오! 주님 내가 무엇이관대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나이까. 나에게 징계를 주심이여 책망하시는 채찍이 나를 주 앞으로 더 가까이 서게 하셨나이다. 나의 마음은 가볍고 나의 몸은 깨끗하였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오 나의 힘이로다
제 6장 학생에게 보여준 그리스도의 친절
다음 일기를 읽어 보면 그의 학생에게 대한 사랑이 어떠하였던 것을 알수가 있다.
“오늘은 3월 23일 우리 학교의 졸업식하는 날이다. 수일 전부터 졸업을 맞이하는 학생들은 기쁨으로 준비에 분주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갈길이 막연함으로 기도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저들은 기쁜 대신에 나는 기도에 고심하였다. 뜻밖에 전주에 고등여자성경학원이 시작되어서 학생들이 그곳으로 더러 가게 되므로 감사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김옥례는 배목사님에게 그 장래를 상의하였더니 대구로 가게 되었다 하심으로 주는 나의 기도를 들으시기에 쉬지 아니하시도다. 오오! 감사하다. 졸업생들의 갈길은 이제 다 결정되었다. 그러나 졸업 당일이 웬 일인지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운무가 가득하던 그들의 앞길이 겨우 주선되니 또 다시 기쁨의 졸업날이 어두움에 싸였도다. 나는 기도하기를 시작하였다. 과연 뜻밖에 일기는 청명하여졌다. 어찌 주께 감사하지아니하리오”
양은 어린 학생들을 이렇게 사랑하였고 그들의 장래를 걱정하였던 것이다. 양은 참으로 약한자의 강함이요 넘어진자의 일으킴이요 남의 짐을 지고가는자였다.
“학생중 김시은이란 아이는 금년 17세인 고등과 1학년이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에서 조선인 교회에 목사로 시무한다. 그의 아버지의 편지가 너무 오랫동안 오지 않음으로 시은이는 밥을 먹지 않고 멀리 계신 아버지의 신변(身邊)을 위하여 걱정하기를 마지 아니한다. 여간한 말로는 위로할수 없는 것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어린 마음이라 나는 시은의 눈물을 닦으면서 손을 잡고 고요한 방을 찾아 위로한후에 간절히 기도하였다. 이 기도는 그야말로 탕자가 아버지를 찾는 것보다 더 간절하였다. 어린 딸이 멀리 계신 아버지의 신변을 염려하는 창자 끊는 기도다. 기도를 마친후에 두사람은 다 기쁨을 느꼈다. 과연 몇날이 못 되어서 그의 아버지로부터 평안하다는 편지가 왔다. 아아! 얼마나 기쁘냐 감사할자 내 주여!”
또 일기에 이런것도 적혔다.
“김인겸이는 19세인 고등과 2학년생이다. 그는 나를 찾아 자기의 생활을 말한다. 웬 일인지 신앙이 점점 식어져 냉랭함을 깨닫게 되고 공연한 괴로움을 느낀다 하였다. 나는 그를 데리고 은밀한 방을 찾았다. 나는 그로 더불어 겸손히 기도하였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린 우리는 열정적으로 믿음을 구하였다. 그와 나는 마음에 더워짐을 느끼고 매 토요일 아침마다 같이 기도하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는 중에 그는 마음에 기쁨이 넘치고 양심에 거리끼는바도 다 씻어짐을 느낀다고 말하였다. 오오! 주는 나의 힘이라 하였다”
나는 그의 일기를 페이지마다 읽어가다가 뜻밖에 9월 11일 난에 시작이란 간단한 기록을 남기고 그로부터는 매일 특별한 기록외에는 다음과같은 형식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9월 11일 1 2 3 4 5 6 7 8 9 10
■■0 ■■0 ■0 ■0 = 60
12일 1 2 3 4 5 6 7 8 9 10
■■■■0 0 0 0 ■ 0 = 50
13일 1 2 3 4 5 6 7 8 9 10
■■■0 ■0 0 0 ■■ = 60
14일 1 2 3 4 5 6 7 8 9 10
■■■■■■0 ■■■ = 90
이 모양의 산술적 기록으로 그 다음 일기를 채웠다.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알길이 없었다. 혹 학생들에게 가르칠 산술을 연습함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기숙사 회계를 기록함인가. 그 내용을 알수가 없다. 그러다가 그 해 일기 마지막 공간에 이러한 기록을 남겨 둔 것을 보았다.
1932년 9월 11일(시작)
기전 신성회
1. 목적
(1)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
(2) 네 몸 같이 이웃을 사랑할 것.
(3) 내 가정 내 민족으로 하여금 천국 백성이 되게 할 것.
2. 매일 자백할 조목
(1) 은밀히 기도하였습니까?
(2) 성경 한 장을 보았으며 전도하였습니까?
(3) 배우는데 열심하였습니까?
(4) 남을 섬겼습니까?
(5) 웃사람에게 순종하였습니까?
(6) 친구를 먼저 존경하며 사랑하였습니까?
(7) 맡은 직분에 충실하였습니까?
(8) 시간을 귀히 여기고 부지런하였습니까?
(9) 검박하게 생활합니까?
(10) 말에 실수가 없습니까?
3. 회원 명부(졸업생 회원)
(1) 김애자, 김순길, 고인당, 이순례, 전옥동, 이갑례, 강희미
(2) 백은순, 윤은희, 이복주, 강순정, 최인명, 김영희
(3) 정은주, 김겸애, 유국출, 김길순, 정봉금, 곽병희
이 모든 기록을 참고할 때에 비로소 그 의미를 알았다. 전기 씨명의 사람들은 그 학교를 졸업하고 나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양은 그들의 이름을 명부에 기록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이다. 그들은 과연 양의 마음을 아는가. 또한 열가지의 계행(戒行) 조목을 세우고 자기 스스로 실행하고 못함을 매일 심판한 것이다.
오오! 양이여 그대의 거룩한 생활미여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대에게 살아 계시도다. 일삼성오신(日三省吾身)의 성인과 다를바 없도다. 내가 선을 행하고저 할 때에 악이 함께 있도다 하신 성 바울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그때의 일기를 읽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무릎을 꿇고 배움을 청하였다. 존경을 표하였다.
양은 학교의 선생이라 하기보다 차라리 학생의 어머니며 길이며 위로라 하겠다. 병날 때에 밤이 맞도록 기도하고 슬픔과 괴로움이 있을 때에 은밀한 방에 데리고 가서 기도하여 주고 혹 벌을 당한 학생이 있을 때에는 고요한 곳으로 데리고 가서 눈물로써 권면하며 기도하여 주고 부모를 르리워하는 학생이 있으면 고요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옛날 위인들의 전기(傳記)를 이야기하야 위로도 하며 새 용기도 주며 위하야 기도하여 주고 혹 수업료를 내지 못하야 쫓겨난 생도가 있으면 그 부모를 찾아 가서 좋은 말로 위로하고 정 할 수 없는 가정이면 자기의 박봉중에서 도와 졸업시킨 아이도 적지 아니하다. 졸업하고 갈 길이 막힌이에게는 갈길을 지도하여주고 우는이로 같이 울고 웃는이로 같이 웃어 주었다. 그들의 선행을 위하야 신앙을 위하야 알지 못하는 은밀한 가운데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주었다. 방선생님 하면서 따르던 학생들은 부모의 사랑이 없이는 살지언정 방선생의 사랑이 없이는 살수 없다는 것이 학생들의 표어였다.
그뿐 아니라 아모리 익숙한 과정이라도 교안(敎案)이 없이는 가르쳐 본적이 없다한다. 자기 담임반에 저능아(低能兒)가 있으면 시간외교수(時間外敎授)를 할뿐 아니라. 그 부형을 찾아 복습에 주의를 주어 낙제생이 나지 않도록 하였다.
이 기전여학교는 종래로 입학생이 그리 많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 방선생의 소문을 듣는이는 누구나 자기의 딸을 그에게 맡길 마음이 있었다.
1933년 4월 1일의 일기다.
“나는 보통과 2학년 학생들을 데리고 특별히 신입생이 많이 들어오기를 위하여 기도 하였다. 과연 주는 어린 동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금년에는 신입생이 전에 없이 넘치고 또 넘쳐 자리가 없다. 오오! 풍성하신 주의 주심이여”
제 7장 고아원에 보여준 그리스도의 자비
전주고아원은 전주여자기독교 청년회의 경영이다. 때는 1927년 12월 23일 성탄절을 앞두고 그때 회장이던 이효덕(李孝德)씨는 사회사업으로 무엇을 하면 적당할까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고아원의 필요를 말하였다. 그는 집도 돈도 없이 어떻게 하느냐고 하였다. 나는 믿음으로 할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우리교회에 전도실의 한방을 빌고 돈은 금번 성탄 축하에 얼마쯤 얻고 회원들이 월연보나 작정하면 고아원의 원아야 단 한아이도 좋고 두아이라도 좋으니까 능력이 미치는대로 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신다고 하였다. 씨는 이에 결심하고 임원회를 모으고 토의에 붙였다. 임원회 석상에서 나는 마태복음 25장 31절로 46절까지 읽고 사회봉사에 대한 주님의 교흔을 말하였다. 난로(暖爐)를 둘러 앉았던 회원들은 뜻 깊이 일치 가결하였다. 서문밖교회에서는 그들의 사업을 돕기 위하여 전도실을 허락하였다. 그 행에 청년회 주최로 성탄 축하를 한바 연보는 뜻밖에 백여원에 달하였다. 이것이 전주고아원의 시작이다.
그후 4, 5년동안을 회원들의 열열한 성의로 45명의 고아를 보육하여 왔다. 그러하다가 홍석호(洪錫浩)선생이 전주에 오심과 방애인양이 제2기로 전주에 오심을 기회로 여자기독교청년회는 전주 네곳 교회의 청년들을 망라하여 크게 확장하였다.
때는 1932년 3월 7일이다. 그들은 고아원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서문밖 유치원에 모여서 1주간의 기도회를 열고 회원일동은 열열히 기도하였다. 이 기도회를 마치고 각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찾아서 자기들의 뜻을 말하였다.
방애인양의 일기에는 그 때 사실이 이렇게 적혔다.
“각교회 목사님과 장로님을 찾아서 고아원집 건축의 의견을 말하였다. 모두들 기쁨으로 찬성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주심은 참으로 감사하다.”
그러나 양은 홍석호씨와 같이 나를 찾아 왔는데 심상하지 아니한 걱정이 있는 빛이었다. 어던 사람은 전주 유지를 청하여 큰 규모로 하라 하고 어떤 유력한 사람은 여자들이 사업을 할 수 있느냐고 찬성하지 아니하며 또 관계자도 역시합심하여 찬동하지 아니한즉 어찌하면 좋으냐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던 저러던 기부원이나 제출하고 볼것이라 하였다. 바로 그 날이다.
“3월 10일 홍석호 선생님과 김선례 선생님과 같이 고아원 일을 인하여 밤새워 기도하다.”
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혔으니 이기도는 실로 고아원의 뜻깊은 역사적 기도이다. 사면의 정세는 그리 유리하지 아니하나 기도를 마친후 1932년 3월 23일에 그들은 드디어 인가원을 제출하였다. 인가원은 제출하였으나 마음에는 고민이 있었던 모양이어서 일기에
“꿈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또 김영신(金永信)씨와 홍석호 선생이 금전이 넉넉하다는 말을 하자 곁에 있던 악한(惡漢)은 자결하였다. 아아! 우리의 일을 방해하던 마귀는 떠나갔다. 주여 참으로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쓰인 대목도 있고
“밤 한시까지 홍선생님과 같이 인가 나오기와 고아원의 장래 발전을 위하여 밤이 깊도록 기도하였다.”
바로 그 다음날 5월 12일부로 기부인가는 나왔다. 그때 일기의 1절.
“너무도 기뻐서 밤 열시까지 기도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그들은 세사람씩 때를 지어 8천호의 전주 시내를 가가호호 방문하고 10전, 12전, 1원, 2원의 돈을 모으기에 분주하였다. 학교에서 하학종 소리가나면기부금 책보를 끼고 즐다름질 쳐서 시내로 향하던 그들의 발자취! 얼마나 복스런 발걸음인가. 더욱이 방애인양의 허수롭게 차린 차림새는 참으로 간절한 태도였다. 목석(木石)이라도 동정하지 아니할수 없었다. 어느 날인지 애인양은 수삼의 동지와 같이 오후 일곱시나 되어서 기쁨으로 돌아 왔다.
목사님 오늘은 70원이나 되었어요 인창환(印昌桓)씨가 30원이나 하였어요 하면서 기쁨에 넘친 그들을 볼때에 이런 생각이 났다.
아아! 악착한 세상이다. 남의 자식을 살려 보겠다고 시장한 배를 졸라 매고 고심하는 처녀들은 누구며 주색잡기에 돈을 물쓰듯 하는자들은 누군고. 30원의 돈을 얻고 저렇게 기뻐함은 결코 자기를 위함이 아니다. 그들의 기쁨은 사회를 살리는 기쁨이다.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기쁨이다.
나는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후에 나는 인창환씨에게 말을 들은즉 방애인이란 여자가 몇몇 여자와 같이 와서 고개를 숙이고 오랫동안 기도를 하더니 기부를 청하더란 말을 듣고 나는 감탄하였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기도부터 하였던 것이다. 그의 무기(武器)는 기도이었다. 신자 불신자를 불론하고 기도하지 않고는 말하지아니함이 그의 신조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8천여호를 심방하던 그는 기도로 성공하였다.
하학 시간을 이용하여 전주 시내를 헤매는 그들은 기부 허가의 기간이 지나기 전에 목적한 액수에 달하도록 천신만고를 겪었다. 6월 30일 기부 기간의 마지막 날의 일이다.
“오늘은 기부금 모집이 끝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은혜를 주셨는지 말씀 드릴수가 없다. 때는 과히 더웁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해가 길어서 하학하고도 넉넉이 다니었다. 밥은 때 맞추어 먹어본적이 없었다. 저녁은 여덟시에나 먹게 되고 잠은 열두시에나 자게 되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몸이 건강하고 교장님도 아무 말씀이 없고(교장이 학교일에 방해된다고 책망할줄로 각오하였던 것) 학생들의 어머님까지 동정하여 쉽게 마치게 되었다. 만나주지 않던 부자들도 오늘은 웬 일인지 만나보고 다소의 동정을 얻게 되었다. 도청에도 잘 되었다. 이 얼마나 크신 사랑인지 알수가 없다. 이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서 기록하여 두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려 한다.
양의 일기를 뒤적거리면서 이 원고를 쓰는 때는 새벽 세시다. 석왕사의 밤은 고요하다. 요란하게 굴러가던 기차소리도 살아지고 끝없이 적막하다. 어젯밤에 사나웁게 불어오던 산골 바람도 소리 없이 잠들었다. 무덤속 같이 고요한 이밤의 침묵을 오직 멀리서 이따금 들려오는 닭의 소리가 깨칠뿐이다. 차디찬 여관방은 한층 더 치위를 느끼게 한다. 원고를 쓰던 팔을 쉬일겸 붓을 던지고 저린 팔을 치면서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네”하는 찬미를 부르면서 양의 사진을 드려다보고 그의 옛날의 생활을 추억하며 느껴 울었다. 사진에 나타난 그는 극히 온유하고 겸손하였다. “목사님이 차디찬 전등 아래서 무엇을 하십니까. 잠도 주무시지 않으시고 왜 이렇게 수고하십니까. 저의 한 것이 무엇이 그리 변변 합니까. 저만한 사람이 어디는 없습니까. 그만 두세요. 주선에 소개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목사님 추워요. 그만 두세요”하는듯한 그의 사진 위에는 알지못하는 사이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쌓이고 쌓인 일거리를 두고 어떻게 차마 가셨는가. 그대의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던 전주를 그렇게도 쉬이 떠나시었는가. 고아를 업어 주던 그대의 등에 짐이 무거워 가셨는가. 정신병자를 쓸어안고 울던 그대의 가슴의 심장이 터져 가셨는가. 문둥병자를 어루만지며 울던 그대의 눈에 눈물이 다하여 가셨는가. 옷벗어 걸인 주고 추위를 못 견디어 가셨는가. 남의 짐을 들고 가다가 팔이 아파 잠간 쉬러 가셨는가. 노방에 전도하다 갈한 목을 축이려고 가셨는가. 기도와 묵상하러 삼층천에 가셨는가. 웨 그다지도 쉬이 가셨는가. 쌓이고 쌓이고 또 쌓인 일을 누구에게 맡기고 가셨는가. 오오! 사랑하는 양이여!
오오! 조선의 청년 남녀들이여 그대들의 하는 일이 그 무엇인가!
새벽 다섯시 차는 석왕사 고요한 공기를 요란히 깨트리며 달아난다. 침통에 잠겼던 나는 다시금 정신을 차려 던졌던 붓을 잡아 원고지로 옮겼다. 이우에 말한바와 같이 기부승낙을 믿는 일은 끝나고 이제는 기부금 징수에 대한 노력이다. 어떤 부자의 집에는 아홉번만에 가서 받았다 한다. 이로 본다면 돈 받기에도 상당한 노력이 있었다. 이렇게 피와 땀으로 모은 돈이다. 첫째로 고아원원사를 건축하기로 하였다. 애인양은 뜻밖에 서문밖예배당 부근에 빈 집 한채를 발견하였다. 그집의 내력은 이러하다. 전주의 소위 유한제급(有閑 級)의 노리터로 지은 집이었다. 사음육각을 치면서 56명의 기생들과 같이 춤추며 상량한 집이다. 웬 일인지 이 집의 상량식은 곧 준공식이 되었다. 상량만한대로 2개년이나 버려 둔 집이다. 애인양은 신건축보다 이 집을 사드리자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회원이 전부 찬성하였다. 양은 홍선생과 같이 지주와 건물 소유자에게 십여차씩 방문한후에 겨우 샀다. 또 다시 수리에 착수하야 양은 하학후면 돈을 거두기와 수리 감역하기에 너무 피로하였다. 그때 양의 일기의 일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사 고아원 집모양을 생각하게 하시다.”
고아원사의 도형도 애인양의 제안대로 하였다.
그 해 12월 성탄전으로 고아원 수리는 끝났다. 고아원사 건축 보고도 끝나고 준공된 고아원은 일반에게 공개 관람을 시켰다. 여자기독청년회 주최로 12월 18일밤에 성탄 축하식을 열었다. 이밤의 축하 강연은 애인양이 하였다.
열달동안이나 고심하든 고아원 집을 완성하고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탄일을 마지하는 애인양은 천여명의 남녀를 앞에 두고 대담히 강단 우에 나타나서 조리 있게 도도한 열변을 토하였다. 이 날밤 청중은 양의 일언일동에 울기도 웃기도 하며 긴장속에서 지났다. 그런데 유감은 강연의 원고가 없어 그 내용을 여기 기록지 못■삼이다. 다만 그의 일기에 이런 말이 적혀 있을뿐이다.
“여자기독교청년회 성탄축하식에 강연의 순서를 맡고 나흘 밤을 새여 기도하며 생각하는 중에 ‘성탄의 기쁨’이란 제목으로 강연하였는데 주님의 도으심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잘 되었다. 주님께 감사하기를 마지 않는다.”
성탄축하식이 끝난후 그는 집에 돌아가지 않고 전주에 있었다. 그 방학동안에 메넘이란 동리에 다니면서 무식한 농촌 여자들을 모아서 야학을 시켰다.
그 몇날후 밤 열한시쯤이다. 눈보라와 바람이 귀를 에이고 코를 비는듯하게 춥던밤이다. 우리 가족은 자려하던 때이다. 사모님(나의 부인을 부리는 말)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는 애인양이다. 눈보라를 뒤집어 쓴채 등에는 부익잠 자는 고아를 업었다. “이 아이가 길가에서 너무 추워서 떨기에 업고 왔습니다.” 애인양은 그 밤으로 머리를 깎아 주고 목욕을 시키고 새옷을 입히어 고아원에 업어다 두고 갔다. 이것이 애인양이 고아를 업어 드리는 정성이다. 그리고 한달에 몇번씩은 어린 고아는 업고 큰 고아들은 앞에 세우고 목욕간에 간다. 그 가는 태도는 실로 그리스도가 세상죄를 지고 가시는 모양과 방불하였다.
지금도 나는 그의 가는 모양을 생각하면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가 없다.
나의 아내는 고아원 시작하던 때부터 지금까지 회계를 보아 온다. 1933년 6월말 일이다. 때마침 나의 아내는 평양으로 가고 없던 때다. 양은 방학하고 고향으로 근친가던 전날이다. 책보에 봉지봉지 싼 돈을 내놓았다.
“목사님 저는 내일 황주로 갑니다. 이것이 7월, 8월 두달동안 고아원에 쓸 돈입니다. 이것은 신흥학교 학생청년회에서 온 것이고요(신흥학생청년회에서 고아 두아이를 담당하였다) 이것은 회원들의 월연금이고요 이것은 회비중으로 낸것이고요. 이것은 제가 이달에 용돈에서 좀 모아내논 것입니다. 사모님이 계시지 아니하시니 목사님이 수고 하시겠습니다.”하면서 봉지돈을 헤던 그날이 고아원에 대한 성자의 마지막 봉사이던 것이다.
제 8장 사회에 보여준 그리스도의 봉사
누구나 다 사회봉사를 고조한다. 주께서도 사회봉사에 대한 금률(金律)을 주시었다. “네가 남에게 대접을 받
고저 하는대로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하였다. 또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몸과 같이 하라”하시었다. 또는 마태25장 31절로 40절까지는 전혀 사회봉사에 대한 금언이다.
“인자(人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같이 올 때에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으며 모든 백성을 그앞에 모우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면양(綿羊)과 산양(山羊)을 나누어 놓는 것 같이하여 면양은 그우편에 두고 산양은 그 좌편에 두리니 그 때에 그 임금이 우편에 있는 자더러 이르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너를 위하여 예배하였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라. 내가 주릴 때에 네가 먹을 것을 주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대접하고 벗었을 때에 입히고 병들었을 때에 도라보고 옥에 가쳤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 의인들이 대답하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시면 공궤하였고 목마르실 때에 마실 것을 드리었으며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시매 대접하였으며 벌거벗었을때에 옷 입혔으며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가쳤을 때에 와서 뵈었나이까 하니 또 임금이 대답하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내 동생중에 지극히 적은이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함이라”하셨다.
그러나 현대 그리스도인은 이 금언을 매장(埋葬)하였다. 자기 중심의 생활로써 그 신조(信條)를 굳게 하였고 신(神)주심의 생활은 입과 혀에 지나지 못하여있다. 복음의 일면은 수건으로 가리었다. 믿음으로 의가 된다는 개인복음주의는 무던히 발전되었다. 그러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몸과 같이 하라신 사회복음주의는 그 자취도 조기 어렵게 되어있다. 이것도 하여야하고 저것도 하여야 완전하다 하겠다.
양은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신조도 굳게 세우고 애인여기(愛人如己)의 봉사도 충실하였다. 이우에서 말한바 문둥병자 정신병자에게 행한바도 사회봉사가 아니바가 아니다. 그러나 특히 사회봉사라고 볼만한 것은 아래와 같다.
더운 여름에 무거운 짐 지기란 실로 귀찮기 짝이 없다. 어떤 때는 조금씩 내버릴 생각도 없지 않다. 자기의 짐도 그러하거든 하물며 남의 짐이리요. 그러나 양은 길가는 남녀 노소를 물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가 있으면 여름겨울을 불구하고 짐 가진 사람 곁으로 가서 짐 한 덩어리를 들어다 그가 가고저 하는 목적지까지 들어다 주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는 다 내게 오라”하신 복음을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짐을 실은 짐차를 만나면 반듯이 뒤에서 밀어 주었다. 그래서 짐 가졌던 사람들이 모이는 곳마다 애인양의 이야기가 나고 양의 이야기가 나는 곳에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났다.
양은 두벌 옷이 없다. 금번 나는 황주에 들렀을 때에 그의 어머님의 눈물 겨운 이야기를 들었다.
“목사님 보시오. 옷이 하도 없어서 할머님이 입으시던 털로 안을 받친 갓옷 저고리 한 개와 햇솜을 둔 바지 한 개를 하여 보냈더니 한번 입어보지도 않고 다 남에게 주었어요. 금번 제가 죽은 후에 옷이라고 찾은 즉 떨어져 입지 못할 것 몇 개 밖에는 없더이다”
이런 말을하면서 한없이 슬퍼하였다. 참으로 그러하다. 그가 주일학교를 경영하는 메넘이 동리란 곳의 무산자 치고는 애인양의 옷을 얻어 입지 않은자가 없었다 한다. 두벌 옷을 가진 나로서는 부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1932년 여름에는 수재(水災)에 쫓겨 농촌사람들이 전주 시내로 밀려 들었다. 다가공원(多佳公園)은 드디어 그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고목(古木)을 중심하고 무덕이 무덕이 모인 그들의 식구는 혹은 4,5인씩 혹은 6,7인씩 수십호가 늘어 살게 되었다. 양은 그 곳을 지날 때 마다 무덕이 무덕이 찾아 다니면서 혹은 말로 위로하며 혹은 금전으로 혹은 의복으로 혹은 기도로 혹은 전도로 그날 그날을 지내었다. 여름이 차차 지나고 찬 서리 가을바람은 다가공원의 빈민굴을 위협하였다. 그중에도 다소의 운동력이 있는 사람은 혹은 토굴 혹은 세집을 얻어 하나 둘씩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한식구는 첫겨울까지 그 곳에서 유리하였다. 이를 참아 보지 못하는 양은 자기의 가졌던 시계와 만년필을 가지고 교회의 전도사를 찾아 눈물 겨운 말로써 이것을 팔아서 저 건너편 다가공원에 있는 식구를 위하여 셋방을 얻어 이 깊은 겨울을 지나도록 하여 달라 하였다. 전도사는 감격에 넘치어 눈물로 받았다 한다. 교원의 생활로서는 시계와 만년필은 얼마나 긴요한것인지 말할 수 없다. 더욱이 호수돈을 졸업할적에 그의 친족에게서 기념으로 받은 만년필이다. 그는 사랑을 위하여서는 자신에게 아무리 없지 못할것이라도 내어놓았다. 완전히 “나”를 버린 것이다. 그는 이웃을 자기몸 같이 사랑하였다. 아니다 자기몸보다 더 사랑하였다.
속담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부치라 하였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그렇지를 못하여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복돋우기를 좋아한다. 개인 대 개인이 그러하고 사회대 사회가 그러하고 국가 대 국가가 그러하다. 이야말로 인간의 동물적(動物的) 근성(根性)이다. 그러나 애인양은 완전히 이러한 사나운 마음을 끊어버렸다. 길 가다가 무뢰배(無賴輩)들이 길에서 혹은 남자와 남자끼리 혹은 여자와 여자끼리 또는 여자와 남자가 혹은 아이와 아이가 서로 분함을 참지 못하여 차고 때리고 악담과 욕설로 싸울 때에는 양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숙여 기도한다. 종용히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더운 눈물과 온유한 목소리로 그들의 상하고 터진 마음을 어루만져 웃음과 느낌으로 악수를 시킨다. 양은 실로 불한당을 만난 사람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술과 담배와 아편과 창기(娼妓)는 누구나 다 망하는 길이라고 고조한다. 붓과 입으로는 이렇듯이 고조하지만 눈과 발은 그곳을 향하여 다름질 친다.
개인이 그러하고 민족이 그러하고 국가가 그러하다. 슬프다. 이는 인간의 마음 속에 속깊이 숨어있는 환멸의 씨다. 보라 아침을 굶은 초부(樵夫)가 죽을 애를 써 나무 한짐을 팔면 겨우 4,50전을 받는다. 그러나 이 돈중에서 적어도 10전은 술 5전은 담배에 소비한다. 이 초부가 그러하거든 그 나머지는 말할것도 없다. 마치 사람이 술 담배 아편 창기를 위하여 사는 것 같다. 더욱이 도덕과 종교심이 타락되고 마비된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이를 장려하는 경향이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양은 금주운동을 위하여 자기의 성의를 다하였다. 길바닥에 술에 취하여 누워 있는 사람을 보면 그는 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기도한다. 그 날 밤을 새여 기도한다. 금주 포스터를 손에 들고 길 가는 사람에게 더운 눈물로 외친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또 금주회를 조직하여 친히 간부가 되어 전심으로 노력하였다. 금년 4월에 모인 전주서문교회 여자조력회 석상에서 양은 “살터이냐 죽을터이냐”하는 문제로 눈물로써 토한 열변은 실로 만장한 사람들의 잠자는 영혼을 흔들었다.
제 9장 설교(說敎)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구원
양은 설교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혹 부득이한 경우에 설교하게 되면 혹은 2,3일 혹은 4,5일 밤을 새워 기도한후에야 강단에 나섰다. 또한 교원인만치 학교기도회 시간을 의무적으로 인도하게 되므로 때때로 이를 위하여 책자에 적어 둔 것을 많지는 못하나 소개하면 이러하다.
1. 성탄에 한 듯 하다.
본문 : 사도행전4장10절-12절
문제 : 예수님으로부터 온 구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셨다.
이 천지만물을 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내신 처음에는 괴로움이나 슬픔이나 주검이 없는 좋은 동산 따뜻한 품속에서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의 생활을 주시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의 조상은 마귀의 시험에 떨어져 하나님을 반역하고 좋은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쫓겨난 인간들은 죽이는것과 죽음과 치고 빼았는 것 굶주리고 헐벗는 것 병들고 슬픈것뿐입니다. 이로부터 인간들은 하나님을 아주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후에 인간들의 고통은 더하였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산 꼬대기에 계시다면 점점 올라가야 뵈올터인데 점점 아래로 내려왔으니 하나님과 사람사이는 아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심한 고통을 받을 때 마다 누구에게 도움을 받으려고 소위 자연숭배로 심리종교로 헤매고 다니었습니다. 그럴수록 그 생각은 점점 더 허망하였습니다. 마치 캄캄한 방속에 젖 먹고 싶은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제 주먹을 빠는 모양입니다. 인류의 반역한 결과는 멸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형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는 흠도 점도 없을뿐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신이입니다. 이 얼마나 크신 은혜인가요. 보시오 어머니들의 제일 귀한보배는 자녀일 것입니다. 남의 죽음에 그 아들을 대신 내어줌은 누구나 못할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만은 지금으로부터 1천9백여년전에 그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을 유대국 베들레헴에서 동정녀의 몸을 빌어 세상에 탄생케하사 죽을 사람을 대신하게 하셨으니 곧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 속죄하여 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30년동안 우리와 꼭 같은 육신을 가지시고 사람이 당하는 일체 고통을 받으시면서 매일 제자에게 천국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로부터 인간들은 하나님의 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깨닫는자가 있는 반면에 시기와 질투로 대하는자도 있었습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죽으심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것이니 곧 인간의 죄가 그를 죽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그로 인하여 속량하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곧 속죄의 제물되신 연고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함을 받습니다. 믿지 아니함이 이제는 죄입니다. 보시오 어떤 사람이 벗이 있는데 그 친구가 다 갚아 주었습니다. 이제는 채주에게는 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친구만은 믿고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를 누가 갚아 달라 하였나 제마음에 있어 한것이지 나는 암무 상관이 없다 할 것 같으면 오히려 그 전 죄 그것보다 더 악한 죄가 될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로 죽으셨으나 제3일에 부활하셨습니다. 또 승천하셨습니다. 또는 죽은 자와 산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여기에서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벌이 있겠습니다. 영원한 벌을 받을자에게 어찌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아니하리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 그런즉 이 은혜를 깨달은 우리는 기쁨으로 이 소식을 전합시다. 믿지 아니하는 분들은 믿으시고 구원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2. 이설교는 전주벌판에서 육군 대연습이 있던 익일에 학교 기도회 석상에서 한 것
본문 : 에베소서6장10절-17절;디모데전서2장3절-13절)
문제 : 그리스도의 병정
어저께 우리는 군대도 보고 싸움연습하는것도 잘 보았습니다. 그들의 등에는 가방을 메었고 손에는 총을 들었습니다. 대장이 “앞으로”하고 호령하면 생사를 불구하고 발 맞추어 힘이 있게 전진합니다. 그들은 나라를 위하여 즉 그 형제들이 잘 살게 되기위하여 갖은 고생을 무릎쓰고 생명까지 불고하고 적으로 더부러 싸웁니다. 참으로 그들은 더 할 수 없는 고생입니다. 높은 산 험한 골짝이를 몇번이라도 넘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사랑도 떠나고 처자의 따뜻한 위안도 저버리고 오직 가슴에 애국의 피가 뛰놀뿐입니다. 목숨을 내어놓은 그들의 앞에는 적이 없습니다. 적이 있다면 죽음을 아끼는 자기의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병정입니다. 군병은 자기 나라만 위한 군병이나 그르스도의 군병은 세계를 위한 군병입니다. 우리의 대장은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선생으로부터 1학년 학생까지 다 예수님의 군병입니다. 나라에 군병이 있음은 적이 있는 증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적은 누굽니까 눈으로 볼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수도 없으나 극히 간교하고 영리한 마귀입니다. 어느 사이에 쳐들어 오는지 알수도 없이 들어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전쟁장(戰爭場)입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몇번씩 이 마귀의 총알에 넘어집니다. 어느 때에는 시기의 총알이 와서 동무를 속입니다. 어느 때에는 분노의 총알이 들어와서 동무와 싸웁니다. 어떤 때는 교만의 총알, 어떤때는 남의 허물을 전파하는 총알, 어떤 때는 남을 미워하는 총알 이렇게 비오듯 쏟아집니다.
우리는 벌써 상처가 났습니다. 상처가 날 때마다 주 예수님께서는 피 묻은 손으로 싸매어 주십니다. 그러나 지극히 요해처를 명중하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나라들의 싸움은 늘 있는 것이 아니나 이 싸움은 날마다 날마다 시시 각각으로 쉬지않는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군병된 우리들은 언제든지 무장(武裝)을 벗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진실한 것으로 허리를 동이고, 의(義)의 호심경을 붙이고,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화평한 복음의 신을 신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신의 칼을 가져야 합니다. 이 준비만 충분하다면 언제든지 승리할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벌써 이기셨습니다. 광야 40일전쟁에서도 겟세마네 동산 밤새우신 전쟁에서도 십자가 전쟁에서도 백전백승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만 따라가면 승리하는 생활입니다. 그런즉 육신의 나라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데 천국을 위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죽음을 각오하고 싸웁시다. 이 죽음을 통하여야만 영생으로 들어갑니다.
3. 학교 기도회에서 한 설교
본문 : 누가복음12장4절,5절;잠언23장17절
문제 : 두려움에 대한 인생의 착각(錯覺)
흔히 사람은 두려워 하면서 하나님은 두려워할줄을 모릅니다. 가정에서는 아버님 어머님 학교에서는 교장선생님 사회에서는 경찰, 검찰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육신에 관한 권리자일뿐이요 우리 영혼에는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또는 이들은 우리의 피상적(皮相的) 행동만 보고 판정합니다. 마음 속 깊이는 알지 못합니다. 피상적으로 우리를 판정하는 것은 참 우스운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시오. 너희는 오직 육신만을 죽일수 있는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다 죽일수 있는자를 두려워하라 하셨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육신을 좌우하실 권리가 있을뿐 아니라 영혼까지 좌우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사람을 피상적으로 외모만 보시지 않고 그 중심 곧 개인의 은밀한 곳까지 보십니다. 보시오. 요나가 니늬웨 피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마루 밑에 엎드려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었지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하고 그 남편을 남 몰래전쟁에 선봉대로 세워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시었지요. 누가 이 하나님을 피할 수가 있으며 그 눈을 가리우겠습니까? 이를 두려워하는 것이 곧 도덕에 근원이며 선행의 원동력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학생들이여! 우리는 누구를 두려워 할까요. 사람을 두려워할 까요. 하나님을 두려워할까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눈가림뿐만 아니라 속으로는 더한층 악한습관을 양성합니다. 사람을 한번 두려워하면 마음의 습관도 한번 약하여지고 두 번 두려워하면 두 번 약하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한번 두려워하면 마음의 습관이 한 번 선하여지고 두 번하면 두 번 선하여집니다. 또는 육신을 죽인다 하더라도 육신은 언제나 죽어버릴것이거니 하면 그다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의 주검은 참으로 슬픕니다. 육신과 같이 반듯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혼의 죽음은 자기의 행함에 따라서 될것입니다. 영혼을 살릴 것입니까 육신을 취할것입니까 학생들은 생각하시오.
4. 학교 기도회에서 한 설교
본문 : 이사야1장1절-17절,58장1절-11절,59장1절-4절
문제 : 진정한 기도
우리는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언제든지 기도합니다. 밥 먹을 때나 잘 때나 예배 드릴 때나 홀로 있을 때나 언제든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우리 자신부터 기도의 의미를 알수 없게 됩니다. 기도는 곧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원을 다 들으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이루어 주고 말고요. 그래도 어떤 사람은 10년 20년 구하여도 이루어 줌을 받지 못하고 낙심하는 이도 적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구약에 엘리야라든지, 현대 바울이라는 인도의 성(聖) 썬다싱이라든지 다 이루어 주심을 받고 직접 증거하는데야 어찌합니까. 그러면 그들의 기도와 이루지 못하는이들의 기도가 그 성질이 다르고 그 방법이 다를것입니다. 이제 그 다른 점을 봅시다.
기도의 방법
(1) 누가복음18장1절-18절에 가르친 불의한 법관의 비유를 보시오. 과부에 호소에 견디다 못하여 결국 그 원수를 갚아 주지아니 하였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불의한 법관만 못하여서 이루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우리가 쓸 것을 구하기전에 준비하였으나 다만 우리의 기도에 정성이 없는 연고입니다. 그 과부의 호소에는 죽기로 각오한 정성이 있습니다. 생명 없는 송장에게 무엇을 주리오. 주더라도 쓸 곳이 없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시지 않는것입니다. 정성껏 올리는 생명이 있는 기도는 얼마든지 이루어 주십니다.
(2) 누가복음20장9절-14절에 가르친 비유를 보시오. 하나는 세리로서 통회의 기도요 하나는 바리새교인으로서 과장(誇張)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개 바리새교인의 기도는 될지언정 세리의 기도는 아닙니다. 참 기도는 참회의 눈물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죄에대한 우리의 관념이 어떠합니까. 흔히는 윤리적 죄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도적질을 한다든지 살인을 한다든지 거짓말을 한다든지 불효한다든지가 죄 아니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큰 죄는 하나님께 대한 죄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에게 불복종함이요. 둘째는 하나님을 살아 계신 신으로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앞세우려 함입니다. 누가복음15장에 기록된 탕자를 보시오. 아버지를 자기에게 복을 주시는 이로 믿지 않기 때문에 분산하여 달라 함이거나 또는 자기가 아버지보다 나은줄 알기 때문에 분재하여달라 함이거나 또는 아버지에게 절대 불복종할 마음으로 분재하여 달라 한 것이 아닙니까. 결국 그 탕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참회의 눈물로 돌아올때에 그가 간구함보다 몇배나 더주시지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호소하여야 할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다 함은 곧 우리의 참된 참회의 생활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속죄가 없고 속죄가 없으면 인간이 하나님에게 호소할 길이 없습니다. 속죄를 받는 길은 인간이 자기 죄를 통회함에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 학생들이여 진정한 기도를 원합니까. 원한다면 생명이 넘치는 기도 참회의 눈물이 흐르는 기도로 간구하시오. 하나님은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제 10장 전도에 나타난 그의 열정
현대교회는 예배하는 교회요 전도하는 교회는 아니다. 그러나 사도시대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다. 우리 조선의 옛날 교회도 개인 전도로 세계에 이름이 높은 교회다. 오호라! 그러나 오늘의 조선 교회는 그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물론 경제적 정치적 방면으로 보아서는 옛날의 그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교회로서 교회를 산출하는 전도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여자가 생산을 못함과 같다. 여자가 생산을 못하면 어찌 그 집안을 번성하게 하리요. 생명은 새명을 낲고 죽음은 죽음을 낳는다. 죽음은 생명을 낳지 못하고 생명은 죽음을 낳지 못한다. 현대교회는 그 사명으로보아서 생명을 잃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양은 무덤에서 부르짖는 생명이다. 죽음에서 일어난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있다. 누구를 대하던지 그 생명을 살리려하였다. 길을 가면 길가는 사람에게 같이 일하면 일하는 사람에게 전도하였다. 밥을 먹으면 같이 먹는 사람에게 전도하고 학부형을 방문하면 그 학부형에게 전도하였다. 기차를 타면 같이 탄 사람에게 전도하였다. 무엇보다도 걸인(乞人)을 만나면 간곡한 태도로 곁으로 가까히 가서 전도하였다. 걸인에게 전도하기는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은이나 금은 없을지라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은즉 나는 입을 닫을수가 없다. 깊은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목소리로 전하는 복음은 사회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들의 영혼을 흔들어 회개 시킨 일도 적지 아니하였다.
누구의 집에 무엇을 하러 가든지 반듯이 전도를 한다. 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고아원 기부를, 얻기 위하여 들어가는 집마다 전도하지 아니하고는 나서는 법이 없었다 한다. 이러한 일화가 있다.
홍석호 선생과 같이 고아원집을 사려고 집주인되는 유한계급의 늙고 완고한 유교 불교에 젖은 노인들이 모인 처소를 찾았다. 집을 사겠다는 매매계약(賣買契約)이 끝나고 일어나려 한 때에 양은 홍선생에게(활발하고 남성다운 분) 전도하라는 눈짓을 하였다. 그러나 홍선생은 감히 그들 앞에 입을 열어 전도할 용기가 나지를 않아서 그만 그대로 가자는 눈짓을 하였다. 그래도 하라는 눈짓을 또 하나 실로 용기가 없다는 태도로 주저할 때에 양은 대담하게 복음의 진리를 전하였다. 그 완고한 노인들도 처녀의 입으로 쏟아지는 복음의 권위 앞에 충분한 감화가 있었다 한다. 그뿐 아니라 그는 매토요일 오후면 전도지를 들고 노방에서 전도하였다.
“홍선생과 같이 노방에서 전도하였다. 많은 은혜가 있었다. 김선생과 같이 노방에서 전도하다. 홍선생 김선생 김익하씨와 같이 노방에서 전도하다” 그의 일기에는 이렇게 노방전도의 사실이 기록되었다. 그 밖에도 여러곳에 수없이 적혀있다. 그의 전도를 통하여 학습과 세례교인이된 사람이 적지않다.
제 11장 교회에 보여준 그의 성의
위에 말한바와 같이 그가 제1기로 전주기전학교에 취직된 얼마 뒤의 일이다. 그 때 서문밖교회에는 보통 교인보다 선교사 경영인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남녀 교원과 학생들이 반수이상이었다. 때마침 두 학교 교원 가운데 몇분과 청년 일부사이에 전부터 언잖은 감정의 암류(暗流)가 흐르고 있었다. 필경 이 감정은 격화하여 충돌이 일어났다. 이 충돌은 결국 교회 목사대 선교사에게로 전가(轉嫁)되었다. 그리하여 교원들은 선교사를 끼고 단결을 하였다. 그러나 양은 그통에 들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기도와 협조로 힘을 다 하였다. 그의 주장은 이러하다. 학교도 교회가 있은후의 것이요 선교사도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있다. 이러한 각오로써 장구한 이 싸움에 정당한 태도를 변하지 아니하였다. 선교사와 동역(同役) 교원들에게 미움을 받아 교사의 직을 그만두더라도 교회의 존엄을 어디까지든지 잊지 아니하였다. 그때에 이러한 공정한 교원이 있었기 때문에 폭동화가 되지 아니하였음을 지금도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는 제2기로 전주에 온후에 주일 낮에는 완산정교회에서 예배하고 밤에는 서문밖교회에서 예배하였다. 그는 두 교회 사이에 남 몰래 많은 협조를 힘썼다. 그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의무금은 매삭 선금으로 내었다. 완선정이나 서문밖이나 두 교회에 대한 의무금은 꼭꼭 같이 부담하였다. 현대 청년으로서 교회에 대한 의무금이란 처음부터 잊어버린자도 적지아니한 이때에(물론 다 그러하지는 아니하나) 그의 성의는 놀라지 아니할수없었다.
전주서문밖교회에서 경영하는 중산리 주일학교가 있었다. 양은 그 곳 책임자로서 풍우를 불구하고 상당한 먼거리건만 3년을 하루같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성의를 다하였다. 그로 인하여 그 곳에서 많은 신도가 일어났다. 주일학교 시간을 마치면 여자들을 모아서 기도회를 인도하느니 병자를 위로하느니 전도하느니 하여 언제든지 밥 한번을 제끼니에 먹어본일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동리에 가난한 여자치고는 애인양의 옷을 얻어 입지 아니한 사람이 없다 한다.
그밖에 중산리 건너편에 전정리라는 동리가 있었다. 그곳에도 학생들을 보내어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또 그 곳에서 더 가서 발우마을이 있다. 그 곳에도 학생들을 보내어 주일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렇다고해서 결코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태도는 조금도 없었다. 반듯이 서문밖 당회의 허락을 받은후에야 시작하였다. 주일학교 학생의 가정방문이나 기전학교 학생의 가정방문이나 조금도 차별이 없었다. 주일학생의 부형이 병난사람이 있으면 곧 가서 기도하여주고 그들의 집에 죽은이가 있으면 반듯이 찾아 위로하였다. 교회의 직분이면 어디까지 겸양의 태도로 순복하였다. 결코 나는 이러한데 너희들은 어찌 그리 무력한고 하는 태도는 그림자도 찾아볼수가 없었다.
제 12장 독신관(獨身觀)에 나타난 그의 인생관
사람은 누구나 독신으로 살기 어려운 생리적 요구가 있다. 옛날 성자들도 이 요구를 초월하기가 가장 어려웠었다. 반듯이 독신생활을 한다고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로되 흔히는 성자들이 독신생활을 하였다. 또한 우리의 체험으로 보아도 가정생활을 하면서 성자의 생활을 하기는 퍽 어렵다.
성적 요구보다도 생활태도에 관한 난관이었다. 예수님께서도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가 된자도 있느니라 하셨다. 남녀를 물론하고 독신생활이란 그 실현에 있어서는 어렵다.
양은 용모로나 마음으로나 어디로 보든지 미인이다. 예로부터 아리따운 여자로서 성문제로 어려움을 겪지 않은이가 없었다. 그는 미인에 대한 남성의 횡포가 있는까닭이다. 그러나 양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쳐 살기로 결심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굳은 결심을 알아주지 아니하였다. 혹은 그의 부모를 통하여 혹은 그의 친구를 통하여 청혼을 하였다. 이렇게 비발 같이 청혼이있었다. 어떠한 간구가 있든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든지 주저할 여지도 없이 웃음의 말 ‘시집을 가면 무엇을 하나요’ 한마디로 거절 하였다. 한번은 내가 알기에는 정말 어려운 처지를 당하여 양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주님께 바쳤습니다’라고.
누구나 과년된 딸을 둔 부모로서 혼처를 구하지 아니하리오. 황주의 어떤 유산가의 집에서 방선생의 친구인 지(池)선생을 통하여 직접 간접으로 청혼하였다. 그의 어머님은 간절히 권하는 편지를 보내었다. 그의 회답 일절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생략- 금번 방학에는 못 갈듯합니다. 못 가뵙더라도 너무 섭섭히 생각하시지 마시고 또한 불효한 딸을 위하시어 아무 염려 마시옵소서. 모든일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어머님께서 혼자서 얼마나 고생하시는지 이 딸은 잘 아나이다. 지선생이 한 편지는 잘 받아 보았습니다. 어머님도 딸의 뜻을 잘 아시거니와 저는 주님을 위하여 살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애련(愛連)(애인양의 동생)이의 가정문제는 저도 큰 책임이 있음은 움직일수가 없습니다. 저의 앞길은 하나님께 맡기고 염려하시지 말아주세요. 기도하는중에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소서. 저의 일은 집에서 너무 서두르지 마시기를 원합니다. 가정에는 조금도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공부나 더 하려고 하나이다. 잠깐 가는 세상에 하나님의 일외에 더 귀한 것이 없습니다. 지선생에게도 답장하였습니다. 저를 위하여서 염려마시고 지도하시는중에 깨달으실줄압니다. 저는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또 그의 일기의 1절
“1933년 4월 3일. 수일동안 나는 병으로 고생하였다. 병중에 환연히 깨달은 것은 두가지다. 독신으로 병이 나더라도 선을 행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면 외롭지 아니하다. 예수님께서도 염려하시지 아니하시더니 과연 좋은 무덤에 들어가셨다 그런즉 병이 나든지 죽은후 일이든지 염려할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양의 독신관은 순결하게 그리스도께 그 몸을 바치게 한 것이다.
제 13장 별 세
양은 1933년 6월 그믐날 방학식이 끝나고 고향인 황주로 향하였다. 오래간만에 오는 따님을 맞는 그 집에서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쳤다. 더욱이 그의 어머님은 말할수 없이 기뻐하셨다. 딸의 아침금식을 안타깝게 여겨 주님께서는 40일동안 금식하셨는데 너는 벌써 이것이 몇해냐. 밥■르 좀 먹어보아라. 이렇게 권하였으나 양은 웃음으로서 차차 먹는다는 뜻을 표할뿐이었다 한다. 그의 조모님은 늙으신 어른이라 날마다 귀에 대고 성경을 가르치고 애련이 애국(남동생)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이웃사람만 와도 성경을 가르쳤다. 이 방학 동안의 양의 집은 마치 사경회나 하는 듯 한 기분이었다. 양은 웬 일인지 금번 방학에는 한 시간도 쉬지 아니하였다 한다. 각처에 있는 친족에게 전도하러가고, 또는 돌아와서는 하기학교를 인도한다. 찬양대를 연습시킨다. 또는 개인에게 풍금 교수를 한다. 이렇게 양은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노력하였다.
그러하자 9월1일 개학 때가 되던 전날부터 몸이 춥고 두통이 났었다 한다. 그러나 내가 하루를 늦게 가면 수십명의 아동에게 얼마나 못할 일인가 하는 결심으로 피곤한 병든 몸으로 황주를 떠났다 한다. 그 어머님은 전에 없던 슬픔의 눈물로 딸을 보내고 딸도 역시 전에 없던 슬픔으로 눈물을씻고 어머님을 작별하였다 한다.
개학식에 참예하고 누운 양은 드디어 병원에 입원하였다. 나는 수양차로 전주를 떠나던 전날에 양을 찾아 병원에 갔었다. 나는 그의 침대 곁에 고요히 섰었다. 열에 부대끼는 그는 눈을 뜨고 ‘목사님’하고 전에 없던 눈물을 흘렸다. 그가 병석에 있더라도 언제든지 방문온 사람에게 웃음으로 대하였으나 금번만은 그의 심령에 어떤 영감이 있었던 듯 하였다.
바로 그 이튿날 그의 어머님은 황주를 떠나서 전주에 도착하였다. 딸의 병석 곁에 선 그 어머님의 마음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랴. ‘애인아 내가 왔다’하자 양은 손을 내어 밀어 어머님의 손을 만지면서 ‘어머님 오셨어요’하는 한마디 말뿐이다. 열기가 더할가 염려하신 어머님도 말이 없이 수종들뿐이었다 한다. 날로 오르는 열도는 40도에 달하였다. 어느 덧 9월 16일이 되었다. 다시는 회복의 희망이 없다는 전보를 받고 오는 양의 아버지가 오기도 전에 숨이 지려는 딸의 얼굴을 드려다볼적에 그 어머님의 가슴은 얼마나 아프고 미어지는 것 같았으리오 ‘애인아 아버지가 오시거든’하고 딸의 지려는 숨을 다시 돌리려고 하였으나 하늘의 명을 인력으로 어찌하리오. 바로 이때이다. 엎어질듯이 정신을 수습지 못하고 뛰어 들어오는 아버지는 ‘아아! 애인아 이게 웬일이냐. 애인아 내가 왔다’하면서 딸의 손을 잡자 양은 눈을 떠서 ‘아아’의 두어 소리만 남기고 고요히 티끌많은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세상을 이기었나이다’하는 태도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갔다.
아아! 이 애처로운 죽음이여 순직(殉職)의 죽음이로다. 수십명 학생들이 놀것만 생각하고 자기의 몸에 장차 병이 더 할 것을 돌아보지 않고 양심을 위하여 사명을 위하여 병든 몸으로 길을 떠난 양의 거룩한 죽음이여. 실로 순교(殉敎)의 죽엄이로다.
방선생이 운명하였다는 소문은 전보보다 빨리 온 전주에 전하였다. 양의 사랑을 받던 사람들 양의 인격을 존경하던 사람들의 슬피 우는 모양은 보는이로하여금 창자를 에일레라. 초목도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으리라.
고 방애인양의 상여를 매고 공동묘지를 향하여 가는 소복입은 수십명의 여자들은 눈물이 앞을 가리어 참아 가지를 못하였다. 철모르는 고아들은 방선생 방선생 하면서 따을 굴르며 운다. 수백명 학생들의 목을 놓고 우는 소리는 공동묘지에서 전주 부중을 움직였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하신 예수님의 태도로 공동묘지에 평안히 누운 성자의 무덤이 새로울뿐이었다.
나는 그의 죽음의 소식도 알지 못하고 강원도 산골여관에 묵던 때이다 웬 일인지 마음은 매우 비장하여 지면서 전주의 모든 과거가 새삼스러이 느껴지고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가 없었다. 나의 과거 전주 생활은 충실하지 못하였다. 나의 거룩지 못함을 느낄때에 성자 방애인양의 병이 염려되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의 거룩한 생활을 연상할 때에 그에게 대한 기대는 더 컸었다.
그러나 내가 전주에 오던 9월23일에는 그는 벌써 고인이 되었다. 그의 죽음을 듣고 그의 무덤을 찾아가는 나로서는 인간의 덧없음도 느꼈으려니와 그의 지난 생활을 생각하고 울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전주 도상에 걸어다니던 순진한 그리스도적 태도는 그리웁기가 끝이 없다. 아아! 영원한 시간적 선로에서 줄다름질을 처가는 공간의 있는 몸이 참으로 가엾다. 그동안이 그리 길지 않건마는 누구는 이동안을 성자의 생활을 하고 누구는 이동안을 무쌍한 악의 생활을 하는가. 아아! 인간이 자기의 할 일이 자기에게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지. 이러한 명상에 잠겨 양의 무덤에 다달은 나는 마치 모진기둥에 머리를 부딪힌 듯이 캄캄한 암흑을 느꼈다. 이러한 순간에 위로부터 전하는 소리는 이러하였다.
“방애인의 일생은 예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다.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눈과 같이 흰 성자의 생활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가기 원합니다. 아-멘
지금은 11월 30일 새벽 세시다. 한 없이 맑은 석왕사의 새벽 종소리는 죄많은 세계를 향하여 그윽히 사라진다. 종소리를 들으며 붓을 고요히 놓고, 주님을 따라간 거룩한 사람 방애인양의 자취를 묵상하며,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안에 평안히 쉬이는 양을 동경하면서, 우리동산에 떨어진 밀알 하나의 죽음으로 많은 젊은이의 가슴 속에 힘 있는 인상 주고 참다운 생명의 새 싹이 트며 꽃 피어 몇백배의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 땅에 하루 바삐 하나님의 낙원이 이루어지기를 믿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성구
요한복음12장24절-25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